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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으로 유통재벌-5화 (5/203)

005. Welcome to the 부싼! (1)

아니 시발 세상이 어느 땐데 임원이 탄다고 엘리베이터에서 다 내리는 거야. 서울도 안 이런다고.

외부 유입이 없는 시골 동네일수록 꼰대 수치와 악·폐습이 많다는 말이 있다더니 지금 이게 딱 그 짝인 듯싶었다.

밀레니엄을 지난 지 10년이 다 돼가는 이 시대에 임원이 탔다고 직원이 내려야 하는 문화가 남아 있었을 줄이야.

아직 근무 책상에 앉아 보지도 못했지만, 수직적으로 경직되어있는 부산 지사의 기업 문화를 바로 알 것 같았다.

똥이 무서워 피하랴. 하는 심정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릴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냥 버텼다.

지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게 되면 잘못된 악습에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꼬리를 만 채 도망치는 기죽은 개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닫힘 버튼을 꾹 눌렀다.

“9층이시지요? 올라갑니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임원으로 보이는 사람보다 비서가 더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뭐 잘못했냐며 오히려 고개를 더 꼿꼿하게 들었다.

2주 전의 나였다면 아마도, 죄지은 죄인마냥 엘리베이터에서 고갤 숙이고 내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엘리베이터를 임원이랑 같이 탔다고 위에서 지랄하면 ‘족구하라 하세요.’ 하고 사직서를 던질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바 이제는 돈도 있고, 가오도 있다고.

“재미있네. 어디 부서에 누구야?”

[띵 7층입니다.]

“7층 영업팀으로 오게 된 임건호 과장이라고 합니다.”

“공채?”

“네. 공채 20기입니다.”

“그래 가봐.”

뭔가 ‘그래 이름을 알았으니 갈궈줄게.’ 하는 그런 오싹함이 묻어있는 말투와 눈빛이었다.

독사같이 강한 눈빛에 좀 쫄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는 양손을 배에 모으고 깊숙하게 인사를 해줬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다음에 고개를 들었는데, 그제야 그냥 가오 좀 접어줄 걸 하는 후회도 되었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7층에는 영업팀과 총무/인사과가 있었는데, 영업팀 파트로 가니 팀장도 방금 도착했는지 슬리퍼를 갈아신고 있었다.

8시 정각. 아직 출근 시간까지는 30분이 더 남아 있었다.

하지만, 부장급인 팀장이 8시에 출근을 하면 직원들은 무조건 그 전에 출근해 있어야 했다.

그게 봉급쟁이들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물론, 이제 그런 것들이 사라져 간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지켜야 하는 암묵적인 룰이자 처세의 일부분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느꼈지만, 확실히 서울보다 경직된 직장문화라는 것이 느껴졌다.

“허허 이거 참 곤란하네. 원래 영업팀 TO가 대리 TO였는데, 과장이 와 버리면 어쩌지. 뭐 작년에 과장을 단 1년 차라고는 해도 이게 참 애매한데 말이지.”

영업팀의 허문도 팀장은 고개를 좌우로 휘적거리면서 애매한데, 곤란한데를 계속 중얼거렸다.

그러다 전화기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며 고민을 했는데, 뭣 때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허문도는 팀에 두 명 있는 차장을 불러 임건호를 배정시키려다 안 되겠는지 직접 임건호를 데리고 영업 3과로 움직였다.

그렇게 오게 된 영업3과를 보니 허문도 팀장이 왜 곤란하다고 고개를 휘적거렸는지 알 것 같았다.

영업 1과와 2과는 과장 밑에 대리가 2명씩 있고, 대리 밑으로 주임이나 사원이 2명씩 있는 총 7명으로 구성된 과였다.

하지만, 영업3과는 내가 배속된다고 해도 4명밖에 되지 않는 인원이었다.

그리고 영업 3과의 과장은 내 또래였다.

“이쪽은 영업 3과의 권영일 과장. 권 과장이 공채 21기지?”

“네. 맞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서울에서 전입해 온 임건호 과장.”

간단한 허문도 팀장의 소개말이었지만,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권영일 과장은 바로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2009년 2월 인사공고가 났을 때 공채 21기에서 처음으로 과장 진급자가 나왔고, 그 진급자 중에 권영일 자신이 있었다.

그 말은 전입해 온 임건호 과장이 자신보다 선배라는 뜻이었다.

이 말을 같이 들은 건호도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개 같은 인사부 새끼들은 일을 뭐 이따위로 하는 거야.”

허문도 팀장이 쌍욕까지 써가며 골치 아프다는 것을 어필했다.

하지만, 건호는 이렇게 꼬인 인사처리가 어머니의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오기 위해서 인사과 선배에게 부탁한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먼저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제가 일반 사원 TO에 배정이 된 것이니 권영일 과장님 밑으로 가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기수나 그런 거 상관없습니다. 과장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어엇, 그래도 되겠어? 아무리 1년 차이라지만 그래도 선배가 후배 밑으로 들어가는 건데. 그게 말이 되는 거야?”

“저는 괜찮습니다. 까라면 까야죠.”

물론, 2주 전의 건호였다면 이렇게 쉽게 마음을 접고 후배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이런 곤란함은 이미 건호의 멘탈에 상처를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임원으로 보이는 이에게는 내가 난데 하는 가오를 부리며 목을 세울 수 있었지만, 나로 인해 피해를 받게 된 후배에게는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어? 진짜? 그래도 되겠어?”

건호가 오히려 쉽게 고개를 먼저 숙이자 허문도 팀장이 더 놀랐다.

그는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고전적 스타일의 봉급쟁이였기에 선배인 임건호에게 영업 3과를 맡기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먼저 고개를 숙이며 임건호가 권영일 밑에 들어가겠다고 하니 일이 잘 해결된 것 같아 그냥 슬그머니 넘어가기로 했다.

“좋아. 그럼 그냥 상호 존칭 쓰고 해. 내가 어떻게든 이야기해서 영업4과를 만들어 줄 테니깐. 그때까진 서로 좀 불편해도 버텨.”

“네 팀장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권영일도 팀장의 말에 임시로 임건호가 3과에 있다가 간다는 언질을 받자 쉽게 임건호 과장을 받아들였다.

특히나, 자신이라면 후배에게 저렇게 바로 고개를 숙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임건호 과장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저 선배님은...”

“아유, 선배님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상호 존칭을 쓰는 것으로 합시다 권영일 과장님.”

“아아,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권영일은 말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은연중에 말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임 과장님은 그럼 서울에서도 영업부셨습니까?”

“본사에서는 상품기획팀에 있었습니다. 아, 서울 억양이 있지만, 부산 사람입니다. 대학교를 서울로 가면서 서울에서 생활했지 부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다 나왔습니다.”

“와아! 서울 말투라서 원래 서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딩동댕-동~!]

“자자 다들 출근했으니 시작합니다!”

8시 30분이 되자 잠자리 안경을 쓴 이수길 차장이 사무실 입구에 섰다. 그러자 모든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매일을 불태워라!!”

이 차장이 크게 외치자 전 직원이 크게 따라 외쳤다.

서울에서는 보지 못한 일이었기에 놀랐지만, 건호도 다른 이들과 함께 외쳤다.

“영업에 마음을 넣지 마라. 마음이 없으면 언제든지 고갤 숙일 수 있다.”

“...숙일 수 있다아!”

“영업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마음으로! 오늘도 움직여라!”

“...오늘도 움직여라아!”

“영업은 실적이다! 실적으로 나를 증명한다!”

“...증명한다아!”

“박수!”

짝짝짝짝!

박수를 치는데, 뭔가 군대에서 아침마다 복무 신조를 외치게 만들어 정신교육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 그럼 거산체조!”

구호를 외친 이수길 차장은 들어가고 마른 체형의 정영호 차장이 카세트 플레이어를 틀며 앞으로 나왔다.

“넓고 거대한 거산을 표현합시다! 팔을 쭉 펴고, 온몸을 스트레칭합니다! 거산 체조 시이-작!”

카세트에선 국민체조를 할 때 나오던 따라라라라! 따라따라다! 하는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다들 자연스레 제자리걸음을 하기 시작했다.

“스트레치-잉부터!”

따라라라 하는 국민체조 음악을 따라 전 직원들이 한둘 셋 넷 구령을 붙이며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헐. 거산 체조를 진짜 한다고?

건호는 사무실 전 직원이 체조를 하는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회사 공채에 합격한 이후 신입직원 연수에서 거산 체조를 배웠었지만, 본사로 발령받은 이후로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몸담고 있던 상품기획팀은 물론이고 다른 부서에서도 거산 체조를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거산 랜드의 창업자인 최민배 회장이 70년대 섬유 사업으로 사업을 불릴 때, 직공들의 굳은 몸을 풀어주기 위해 만든 체조가 거산 체조였다.

그래서 제조라인 쪽에서는 체조를 아직도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여기에서 할 줄은 몰랐다.

“목소리가 작잖아! 큰 산을 울리듯이!”

영업팀의 실세인 차장들이 아침 행사를 주재했는데 두 명 모두 체조에 대한 의욕이 대단했다.

“정리운동~! 크게 숨쉬기!”

후아~! 후아~

팔을 접었다 펴며 숨쉬기 운동을 마지막으로 체조가 끝이 나자 이번엔 팀장이 나섰다.

“오늘은 훈포상은 없고, 전입자가 있습니다. 서울 본사에서 내려온 공채 20기 임건호 과장입니다. 다들 환영의 박수!”

짝짝짝짝!

“임 과장은 임시로 영업 3과에 있는 것으로 하고, 최대한 실적을 내서 영업 4과를 만들어 내도록 합시다. 이상! 아, 이번 주에 임 과장 환영 회식 있을 거니깐 다들 스케줄 체크하도록. 진짜 이상! 자 오늘 하루 시작합시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직원들의 복명복창으로 진짜 업무가 시작되었다.

월요일이다 보니 각 과에서 주간회의를 하기 시작했고, 부산하게 사무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뭔가 출근 이후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런 90년대 방식의 아침 조례도 오랜만에 하니 나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서울은 그냥 출근하면 각 팀이나 과끼리 인사를 대충하고 바로 주간회의 후 업무를 시작했었다.

팀별로 공지해야 하는 것은 대부분 인트라넷에 게시물로 올라오는 것이 전부였는데, 부산은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서울 본사보다 뭔가 더 인정미가 있는 그런 느낌도 들긴 했다.

“음. 임 과장님도 일단은 우리와 같이 주간회의 하시죠.”

각 과 앞에 마련되어 있는 회의 탁자에 둘러앉았는데, 다행히 회의를 주재해야 하는 권영일 과장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내 눈치를 본다거나 하는 그런 긴장감 같은 건 없었다.

허문도 팀장이 영업 3과에는 임시로 있는 것으로 하자는 말을 했기에 주도권 싸움 같은 것을 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텃세가 없다면 나로서는 땡큐였다.

“일단, 저희 영업 3과는 기업체 위탁을 중심으로 일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냥 영업팀이라고 뭉뚱그렸지만, 정확하게는 거산랜드 식품사업부 부산지사 단체 영업팀이었다.

우리 거산 랜드는 1970년대 섬유사업으로 시작을 했지만, 건설과 식음료, 유통, 레저 등의 사업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

물론, 자동차의 대운기업이나 전자의 신성전자, 가전의 백기전자처럼 똑 부러지게 업계를 선도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문어발식 확장을 해서 덩치를 불렸기에 그룹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식품사업부의 영업팀은 주로 단체급식 영업과 그 운영지원을 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김주원 과장님이 이끄는 영업 1과는 학교 단체 쪽을 담당합니다. 2과의 이철훈 과장님은 관공서 쪽이구요. 혹시라도, 임 과장님이 학교나 관공서 영업을 하시게 되면 꼭 이야길 하셔야 합니다.”

“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시원하게 답은 했지만, 사실 조금 난감하긴 했다.

단체급식을 하는 곳은 사실 학교나 관공서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권영일이 이끄는 3과는 기업체의 단체급식을 맡아보고 있었으니, 나중에 영업 4과라고 별도 영업과를 만들게 되더라도 새롭게 개척 영업을 할 만한 곳이 없었다.

학교, 관공서, 기업체를 빼면 어디서 단체 급식을 하겠는가.

주간회의에서 전달사항과 일에 대한 것을 듣고 자리에 앉으니 막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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