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환영 회식.
정진이가 사주는 KNM타워의 밥을 먹으면서도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 바빴다.
“야야, 그냥 밥이나 먹어. 그리고 무슨 첩보영화 찍냐. 사진도 대놓고 그냥 찍어.”
“대놓고는 못 찍어 여기 방송국 식당은 CT그룹이 운영하는 곳이라 경쟁사란 말이야.”
“꼴값을 떤다. 언제부터 그렇게 회사에 충성했다고.”
“내가 취미로 회사 생활 열심히 하기로 했거든.”
“웃기고 있네. 하여튼 여기가 5천 원에 뷔페식으로 밥을 먹을 수 있어서 근처 빌딩 사람들 엄청 와. 버스 타고 올 정도라니까.”
“이 근방에 제대로 된 식당이 없다는 거구만.”
“뭐, 제대로 맛있는 집도 있긴 있는데, 그런 집은 부산 직장인들이 점심으로 쉽게 먹을 수 있는 가격이 아니야. 부산에서는 점심으로 10,000원 쓰기 힘들거든.”
부산 직장인들의 워너비 점심 메뉴인 돼지국밥이 5,500원에서 6,000원의 가격이었으니 서울 가격화된 가게의 1만 원대 점심을 먹기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점심 가격이 강남 물가이긴 하네.”
“거기에 커피까지 먹어봐. 만 이삼천 원이야. 부담될 수밖에 없는 가격이야. 그걸 또 사수가 부사수들 사준다고 생각해봐. 빡시다니깐.”
중식 지원을 해 주는 회사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 직장상사들이 사줘야 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좀 멀어도 KNM 타워까지 와서 점심을 먹는 게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보통 이렇게 사람들 많은 비즈니스 빌딩의 경우에는 지하에 값싼 정식집 같은 게 발달하지 않나? 서울은 대부분 건물 지하나 그 옆에 식당들이 생기잖아.”
“그건 아마 구도심을 새로 재개발했을 때만 해당할걸. 옛날부터 근방에 사는 원주민들이 있으면 자연스레 집을 가게로 바꾸거나, 건물 지하에 세를 얻어서 장사를 하게 되거든. 하지만, 여긴 그냥 허허벌판이었잖아. 구도심이나 원주민 자체가 없으니 외부 업체들만 들어오는 거지.”
그러고 보니 서울의 비즈니스 빌딩 근처에는 구도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저층 건물이나 재래시장이 있었다.
하지만, 해운대 신도시는 아예 그런 구도심이 없었다.
지금 벡스코가 있는 곳은 미군정 시절 만들어졌던 수영 비행장 부지였고,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들어선 곳은 컨테이너를 쌓아두는 군수 물자 저장구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빌딩 지하라고 해도 월세를 몇백 달라고 하는데, 저렴한 밥집이 되겠어? 어쩔 수 없이 프랜차이즈나 비싼 식음료 가게만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어.”
“그럼, 이 KNM 타워의 구내식당 같은 걸 비즈니스 빌딩에 넣는 건 어떨까?”
“그것도 힘들걸.”
“왜?”
“넌 여기서 출퇴근 안 하니 모르겠지만, 잘 봐. 여기는 KNM 방송국 자체 인력이 많으니까 보장 인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기본 사람 수가 나오기 때문에 구내식당 운영이 가능한 거야. 하지만, 다른 건물은 그렇게 고정 인원이 안 나와.”
“빌딩 크기만 보면 KNM 타워보다 더 큰 빌딩도 있던데.”
“빌딩은 큰데, 사실 말이 비즈니스 빌딩이지 거기에 사채업자가 사무실 차리고 있는지 우리 같은 시민단체가 들어와 있는지 어떻게 알겠냐? 아님, 임대만 해두고 아예 출퇴근 안 하는 사무실도 있을 수 있어.”
“아, 고정직이 아닌 사람이 많다면 최소 인원수를 못 맞추겠구나.”
중고차 매매단지의 판매상처럼 이름만 올려져 있고, 아예 나오지 않는 사무실이 많다면 최저인원을 채우기가 힘들 것 같긴 했다.
비즈니스 빌딩 내 구내식당을 만들려면 이러한 거주 인구부터 조사를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정진이랑 밥을 먹으면서 궁리를 하다 보니 어느 정도 기획은 섰다.
***
정진이랑은 다음 주에 한잔하기로 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영업기획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임 과장님 따로 못 먹는 음식 없으시죠?”
3과의 막내 김민욱이었다.
“개고기 빼곤 없어서 못 먹지. 왜?”
“오늘 과장님 환영 회식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금요일 환영 회식이 있다고 했었다.
“팀장님이 콜레스테롤 관리하신다고 해서 저희는 언제나 수육 집에서 1차를 하거든요. 물에 빠진 고기 안 드시고 하는 건 없지요?”
“난 뭐든 상관없어.”
“넵 그럼 예약하고 하겠습니다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들어온 신입사원 김민욱은 회식 참여 여부를 일일이 묻고 다녔는데, 자신도 신입 때 저렇게 일일이 묻고 다녔던 기억이 났다.
자신이 신입일 때는 회삿돈으로 맛있는 고기 먹으러 간다고 맛집을 찾고 예약하고 했던 것이 그리 나쁜 기억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회식이 끝나면 택시비 하라고 부장님이나 과장님이 몇만 원 쥐여주고 하는 일도 있었는데, 늘 돈이 부족했던 나는 그런 고기와 택시비 때문에 오히려 회식을 기다렸었다.
하지만, 요즘은 나이 든 직장 상사들과 회식하는 게 피곤하다고 신입직원들은 다들 피한다고 하니 뭔가 세대 차이가 여기서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그만큼 꼰대가 되어 버린 건지도 몰랐다.
***
우리 거산 랜드는 물론이고, KBC 방송국의 사람들이 자주 회식을 한다는 마당쇠 국밥으로 가니 기다란 자리가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다들 자리에 앉으니 막내급인 김민욱과 젊은 친구들이 여기저기 움직이며 잔에 술을 채웠다.
내가 신입 때도 저렇게까진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영업부의 전통인지 아니면 부산 지사의 전통인지 뭔가 까라면 까는 군대식이었다.
저렇게 바지런하게 막내들이 움직여야 하니 회식을 싫어한다는 요즘 신세대가 또 이해가 되었다.
“자자, 다들 주목!”
수육과 국물이 나왔음에도 다들 안 먹고 있길래 뭔가 했더니 허문도 팀장이 잔을 들고 일어나 일장 훈시를 시작했다.
“에, 오늘은 서울서 온 임건호 과장의 환영식을 위한 회식인데, 그 전에 할 거부터 하겠습니다. 1과의 김주원 과장. 2과의 이철훈 과장 둘 다 잔 들고나오세요.”
두 사람은 뻘쭘하게 잔을 들고 나섰는데,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던 것 같았다.
“사실, 직장 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목표를 위해 달려가고 경쟁자와 싸우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이 있는 곳에서 안 싸울 수는 없는 거죠. 특히나 성과를 내어야 하는 영업 조직이라면 싸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허문도 팀장의 말을 들어 보니 1과와 2과가 싸움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영업부는 그렇게 서로 싸우더라도 하나의 목표를 보고 달리는 조직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더라도 같은 조직이라는 것을 늘 잊지 말고 과끼리 소통, 화합하도록 합시다. 자, 세 명이서 먼저 한잔하자!”
허문도 팀장이 잔을 든 손을 내밀자 두 과장들도 손을 내밀었는데, 짠 하는 게 아니라 러브샷처럼 세 명의 손이 꼬여 들었다.
두 명이 하는 러브샷도 가까이 붙어서 팔을 꼬아야 잔을 마실 수 있는데, 세명의 팔이 서로 꼬이다 보니 세명의 몸은 거의 밀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캬! 이렇게 붙어서 마시니 술이 다네. 서로 싸운 건 오늘 회식으로 풀자! 알았나?”
허문도 팀장이 회식으로 풀자고 먼저 두 사람을 안아주자 두 사람도 마지 못해 서로 안아줬다.
“우와아!!”
“멋지다!”
짝짝짝짝!
그리고,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과 박수 소리에 두 과장은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 다시 잔을 채웠으면 잔을 듭시다. 자 우리 영업부의 구호! 오!징!어!”
허문도 팀장의 구호가 울리자 다들 큰 소리로 외쳤다.
“오래도록! 징그럽게! 어울리자! 와아아!”
짝짝짝짝!
구호를 외치고 다들 술을 마신 후에는 다시 박수를 쳤다.
“자, 그럼 오늘의 본론 임건호 과장 잔 들고 앞으로!”
방금 비운 술잔은 어느새 김민욱이 채워주었기에 잔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허문도 팀장은 나와도 러브샷을 하자고 팔을 내밀었는데, 뜨겁게 러브샷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허문도 팀장은 러브샷 성애자인 것 같았다.
“자,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임건호 과장이 부산 지사로 왔습니다. 사실, 서울 본사에서 뭘 했는지 나도 몰라. 하지만, 이번 주 하는 모양을 보니깐 영업은 잘할 것 같아. 아주 기대가 커! 그러니 다들 임 과장이 우리 식구가 된 것을 환영해 주고, 끈끈하게 함께해나가도록 합시다. 그런 의미에서 한마디 하고 건배사.”
왠지 회식 분위기상 멘트를 쳐야 할 것 같아 준비를 했는데, 역시나 맞았다.
“다들 서울에 못 가서 안달인 판국에 부산으로 자진해서 보내 달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허문도 팀장님 이하 정말 멋진 부산 싸나이들이 모인 영업부로 오게 된 것이 진짜로 행운인 거 같습니다.”
일부러 말을 끊고 허 팀장과 차장들 과장들과 눈을 한 번 맞혔다.
“이런 행운이 가득한 영업부에서 함께 커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하.여!”
“위하여!!”
짝짝짝짝!
다시 채워져 있는 술잔을 들고 다시 한잔을 마셨고, 그리고 다시 다들 박수를 쳤다.
그러곤 이번에는 차장들과 러브샷을 했다.
안주도 제대로 못 먹고 내리 몇 잔을 먹고 나니 술기운이 바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과장들과도 연이어 잔을 부딪치며 인사 겸 서로 잘하자고 술을 마셨는데, 영업과라서 그런지 다들 술이 셌고, 남자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호기롭게 원샷을 때려댔다.
겨우 자리에 돌아오니 소주를 못 먹는다고 맥주를 홀짝거리는 장민호 대리가 있었다.
“장대리. 그런데, 1과랑 2과에 무슨 일이 있었어?”
“영재 교육원 때문입니다.”
“영재 교육원?”
“네. 이번에 부산시에 영재 교육원이라고 생긴다는데, 거기 따내는 일로 서로 자기 영역이라고 싸웠습니다.”
1과는 학교, 2과는 관공서를 영역으로 삼는데, 영재 교육원이라는 곳은 학교이기도 했고, 관공서 같기도 한 복합적인 이미지였다.
“그럼, 어느 과가 영재원 하기로 한 거야?”
“아직 결정이 안 났는데, 아마도 팀장님이나 차장님들이 조율해서 정해줄 겁니다.”
허문도 팀장이 두 과장을 앞에 두고 술을 마시며 한참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니, 조직 내 문제가 있으면 회식으로 정리를 하는 문화인 것 같았다.
이게 영업직의 특징인지 아니면 허문도 팀장의 문제 해결 방식인지는 몰라도, 서로 꿍해서 욕하고 하기보다는 중재자를 끼고 술자리에서 정리하는 것이 더 빠른 방법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빈속에 소주를 몇 잔이나 마셨기에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음식을 먹어 술기운을 눌러볼까 했지만, 왠지 허팀장이나 차장들에게 더 불려가서 술을 먹고 할 것 같았기에 토하기로 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기보다는 그냥 토해내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솔직히, 술을 더 먹기 위해 술을 토해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헛짓거리였다.
하지만, 남자들의 세계에선 술이 약하다는 것은 정력이 약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식을 하고 사람을 판단했기에 토해가면서라도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몸 생각하는 요즘 젊은 친구들이 회식을 싫어하지 하는 궁시렁이 나도 모르게 나오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속을 게워내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들어와 오줌 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임 과장은 좀 어때? 병원 영업 기획서 이후 뭐 다른 건 없어?”
허문도 팀장이었다.
“뭘 한다고 돌아다니긴 하는데, 아직은 없습니다. 그리고 과장이면 뭐합니까. 그냥 신입사원입니다. 뭐 영업도 안 해봤고, 단체 급식 판도 처음인데, 기대도 안 합니다.”
이수길 차장의 목소리였다.
“고대 나왔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뭐, 별거 없더라구요. 4과가 만들어지기 힘들 것 같은데요. 근데, 진짜 자청해서 부산으로 온 거 맞습니까?”
“그래. 인사과에 일 개같이 한다고 전화했더니 어머니가 아프시다고 하더라고. 이혼도 해서 어머니 고향으로 가고 싶다고 자청한 게 맞더라고.”
“에헤이. 그럼 야근이나 뭐 그런데 일 못 시키는데. 피곤한 애가 와 삤네요.”
“우선은 그냥 뭘 하든지 그냥 놔둬. 영업 실적 없으면 알아서 전출 청원 하거나, 고과 점수 낮아서 대기 발령되거나 하겠지.”
“넵. 그럼, 오늘 회식하고 좋은 데로...”
시원하게 오줌을 싸고 두 명이 나가는 소리를 들었는데,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뭐,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나에 대한 평가를 듣게 되니 술기운인지 아니면 호승심인지 뭔지 모를 열기가 뱃속에서 확 솟구쳐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