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차도살인(借刀殺人).
“프락치요? 그 스파이 같은 거 말입니까?”
“그래. 임원회의에서 해운대 라면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어.”
“네? 어떤 이야기인가요?”
임원회의에서 라면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니 괜히 켕겼다.
“너도 알고 있잖아. 비밀이지만, 비밀이 아닌 거래금액으로만 잡을 수 있다는 거. 그 이야기지. 외식 사업부 이재영 상무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상품 판매 관리부의 내부 서류를 다 보여주더라.”
97년도에 있었던 라면 생산 회의록부터 매출 관련 서류까지 다 외식 사업부에서 내놓으며 해운대 라면의 문제점을 이야기했다는 말에 건호는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직접 데이터화 시킨 회의록은 부서에서도 본인 포함 5명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창모 부장은 확실히 아닐 것 같았고, 오랫동안 이창모 부장을 모시고 있는 김한철 차장도 아닐 터였다.
그러면 김승재 대리나 이신애 라는 건데.
직접 일을 시키는 부하들을 의심하는 게 기분이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내부 단속부터 해. 그래야 무슨 일이든 진행할 수 있는 거야. 누구인지 잘 모를 때는 변화가 있는 사람부터 체크를 하고.”
“변화가 있는 사람부터요?”
“그래. 정보를 흘린 대가로 뭘 받았던지 했을 거야. 사람은 그걸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하거든. 분명 걸릴 걸 알면서도 자랑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야. 그런 변화가 있는 사람부터 확인해봐.”
근래 가장 큰 변화가 있는 사람은 머리에 부분 가발도 맞추고 향수도 뿌리며 한참 깔롱을 부리고 있는 김승재 대리였다.
하지만, 이건 해운대 구청의 미녀 공무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하는 몸 치장이니 제외를 해야 했고, 그러면 이신애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회사와의 계약이 다음 달이면 끝이었다.
퇴사 후엔 볼일이 없다는 생각에 서류를 유출했을 수도 있었다.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다음 달이 계약 만료가 되는 여직원이 있는데, 이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그건 알아서 하고. 일 이야기 좀 하지. ‘해운대 라면’ 사업자 대표가 동생 이름이던데. 실제로는 자네 거지?”
“저. 그게...먼저 임원회의에서 무슨 말이 나왔는지부터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 거기에 따라 준비된 대답이 다릅니다.”
“답이 달라? 미친놈. 웃기네. 그래, 서로 가진 패를 까자. 회사에서는 해운대 라면을 인수하려고 한다. 상표권과 회사, 생산 공장까지 턴키(Turn key)로 살 생각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뭘 준비했냐?”
“어...이 질문일 줄은 진짜 몰랐는데요.”
“인수하겠다는 거 말고 그럼 무슨 질문을 기대한 건데?”
“제 순익이 얼마인지를 물어보거나, 이거 잘되었으니 퇴사할 거냐고 물어보실 줄 알았습니다.”
“훗. 순익이야 라면이 500원, 1000원인데, 끽해야 거기서 20% 정도겠지. 그리고, 퇴사는 네가 나가겠다고 할 때까지는 돌려야지. 그래서 회사 팔 생각은 있지?”
당연히 팔 거라고 생각하는 김독수 전무의 말을 듣고 보니, 라면으로 잔잔바리 재미를 보는 것은 생각했지만, 상표나 회사를 넘기는 것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같았다.
“당연히 돈만 많이 주신다면 매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 문제는 돈이겠지. 그런데, 진짜 회사 파는 건 생각해 본 적 없는 거야? 열정이 묻은 회사니, 분신과 같은 회사니 하면서 안 팔겠다고 밀당하는 게 아니고?”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나중에 은퇴할 때까지 라면 만들겠다는 생각도 안 했고, 파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진짜 이 라면 자체를 매제를 만나고 생각한 거라. 회사를 키워서 판다거나 하는 건 아예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하루 시간 주지. 내일까지 얼마면 팔 수 있을지 고민해서 다시 보지. 실제 대표로 이름 올린 여동생하고 제대로 이야기 해봐.”
***
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가는 김 전무를 배웅하고 나니, 그제야 회사를 파는 문제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백억? 너무 작나? 아니지, 그 반대로 너무 많다고 안 줄 수도 있어.
한국에선 저작권이나 상표, 특허에 대한 금전적 보전은 물론이고 그 가치에 대해서도 제대로 인정을 잘 해주지 않았다.
외국이었다면 은행에 특허를 맡기고 수십억 원을 대출받을 수 있다면, 한국은 그런 유망한 특허 20개는 있어야 은행에서 대출을 1~2억 정도 해줄 터였다.
그런 지적 재산권에 대한 가치가 짠 한국에서 상표권과 회사를 넘기는 가치가 얼마 정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변리사이자 직접 상표권을 내어준 김성웅 선배에게 전화해 보려다가 참았다.
괜히, 선배가 이 해운대 라면 상표권 가치를 알아본다고 이리저리 묻고 하다 보면 또 어디서 주워듣고 훼방꾼이 나올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차, 생산 공장까지 턴키로 인수할 생각이라고 했으니 문성철 대표와 상의를 하면 되겠구나.
밤이었음에도 바로 전화를 걸었다.
“문 대표님.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통화는 가능한데, 제가 먼저 물어볼 게 있습니다. 라면 공장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이미 문성철 대표에게도 컨텍을 한 것 같았다.
“대표님. 혹시, 거산에서 연락이 왔습니까?”
“아, 다행이네요. 알고 있으시니. 외식 사업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 회사를 인수하고 싶다고 합니다.”
“실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물어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얼마를 준다고 하던가요? 얼마길래 문 대표님이 바로 매각할 마음을 먹은 겁니까?”
문 대표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300억입니다.”
***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아침 일찍 출근을 했으나, 그저 책상 의자에 팔짱을 끼고 앉아 멍하게 있었다.
그러면서 문성철 대표와 통화했던 것을 되새겨 봤다.
“공장의 핵심 인력들이 2년 동안 이직하지 않는 조건으로 공장과 생산직원들을 모두 다 인수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대표님은 그 금액이 제대로 책정을 해준 금액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충분한 금액이라 생각합니다. 공장을 운영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공장이란 놈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감가상각이지요. 처음 공장 설립에 50억이 들어갔다면 5년 후 공장의 가치는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어 30억도 채 책정해 주지 않습니다.”
회사가 가진 무형의 가치인 상표나 브랜드 없이 하청 생산만 하는 공장의 일반적인 가치 환산이었다.
“헌데, 지금 공장 그대로 가져가며 300억을 준다고 하니 그 돈으로 더 큰 공장을 지을 수 있겠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문성철은 하루 최대 생산량이 20만 개라는 것이 근래 들어 계속 마음에 남았었다.
지금처럼 잘나가는 브랜드의 라면이라면 하루에 30만 개, 50만 개까지 생산해서 발주처나 유통처에서 닦달 전화가 오지 않게 넣어주고 싶었다.
그런, 기회가 다시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규모로 공장을 세우고 싶었다.
그런 문성철의 욕심을 채워 줄 수 있는 금액이 바로 300억이었다.
유형의 재화로 볼 수 있는 생산 공장이 300억이라면 과연 무형인 상표권은 얼마일까 하는 고민이 밤새 머리를 괴롭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었다.
문 대표와 같이 300억을 달라고 하면 김독수 전무가 주먹을 날리려나. 흐흐흐.
밤새 머리를 괴롭히는 즐거운 고민이긴 했지만, 그만큼 부담이 되는 고민이었다.
기업의 도메인 같은 경우는 몇백만 불을 받고 파는 경우가 있었고, 중국 같은 경우에는 미국 기업이 현지 사업 진출을 위해 기존에 중국 업체의 회사명을 구매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상표권과 실질 판매되는 상품을 포함한 인수, 매각에 대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단순하게 기업 인수로 볼 수도 있겠지만, 생산 공장은 또 다른 하청 업체이다 보니, 그 가치 상정 자체가 특이해서 근거를 가지고 가격을 산정해 내기 힘들었다.
고민을 하는데, 이창모 부장이 출근했고, 이신애도 출근을 했다.
판매 관리부는 아침 체조를 하지 않았기에 바로 이창모 부장을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뭐? 내부 서류가 유출되었다고? 누군데? 누가 유출한 건데?”
“아마도, 김한철 차장은 부장님의 확실한 라인이니 제외고, 김승재는 요즘 연애해 보려고 바쁩니다. 그래서 이신애 씨로 추측됩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이신애는 인사부에서 연락이 온 게 있었지.”
“인사부에서요?”
“그래. 부산지사 퇴사 후 서울 쪽으로 재계약되어서 올라간다고 하더군. 이게 그 서류 유출의 대가일지도 모르지.”
“햐아...”
단순히 퇴사하면 볼일 없다고 서류를 그냥 막 달라는 대로 준 게 아니었다.
목적과 이익을 가지고, 서류를 유출했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물론, 이렇게 약삭빠르게 사는 것이 저 사람의 삶의 방식일 수 있었다.
“다음 달 이직이라면 그냥 다른 잡일 시키고 그냥 놔둬. 괜히 서류 유출했다고 공론화시키면 말이 돌게 되어 있어. 퇴사하려는 애 괜히 건드리면 골치 아파.”
말년 병장과 단기복무 대위는 건드리지 않는 게 맞듯이 퇴사 직전의 사람도 건드리지 않는 게, 맞긴 맞았다.
하지만, 너무 괘씸했다.
“이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회의실을 나오면서도 내 일을 믿고 시킬 수 있는 내 사람을 키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4과에 꽂았던 김이서였다.
고등학생 때 범죄 이력이 있다지만, 이제까지 일을 맡기거나 부탁했을 때 완벽에 가깝게 일을 해줬었다.
한번 확인할 것도 있다 보니 김이서를 불러 7층 탕비실 앞에서 만났다.
“4과는 뭐 특별한 일 없지?”
“네. 차장님 그냥 무난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근데, 이서 너는 재계약이나 정직원 전환 같은 이야기는 없어?”
“네? 재계약이나 정직 전환요? 전 이제 1년 차인데요.”
“아니, 너처럼 일 잘하는 애들은 1년 안에도 그렇게 인사과에서 물어보고 해야지. 괜히 윗사람한테 잘 보여서 재계약하는 사람도 있는데. 진짜 불공평하네. 일이라도 잘하면 내가 말도 안 하는데. 어휴.”
일부러 탕비실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이 불공평하다고 언성을 높였다.
그런 내 모습과 어투를 보곤 센스있는 김이서는 바로 눈치를 챘다.
“와! 진짜예요? 진짜 윗사람에게 잘 보여서 누가 재계약을 했데요?”
“그런 사람이 있더라고. 다음 달 계약 끝인데, 서울로 재계약을 하고 간다고 하더라고.”
“대박! 부럽다. 어떻게 했길래 부산에서 서울로 간대요. 신기하네.”
“뭐, 나도 자세한 건 잘 모르지. 그런 게 있더라고. 그럼. 민욱이랑 이서 다음에 같이 밥이나 먹자고. 요즘은 진짜 4과 사람들이 그리워.”
건호는 성공적으로 입을 턴 것 같자, 이서에게 눈으로 인사하곤 자리를 떴다.
이서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이 탕비실에 차를 마시러 들어갔고, 탕비실의 터줏대감들인 총무과와 영업과 여직원들에게 붙잡혀 이야길 털어놓기 시작했다.
“뒈에박! 상품 판매 관리부가 완전 묫자리였잖아. 그런데, 재계약을 했다고?”
“미이친! 그래서 누군데.”
대부분의 여직원들이 계약직 입사이다 보니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퇴사할 수밖에 없는 부산 지사의 현실을 알고 있었다.
헌데, 그걸 뚫고 위에 잘 보여 재계약을 했다는 여직원이 있다는 소리에 탕비실이 불판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건호의 말에서 찾아낸 정보로 이신애가 바로 재계약한 여직원이라는 것이 부산 지사 여직원들 사이로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