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미국 구경.
어플 다운로드 순위에서 1위를 하고 흑자 전환이 눈앞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뭔가 해이해졌던 건지도 몰랐다.
승자의 입장에서 LT 그룹과 배송의 민족이 어떻게 나올지를 보고 대응하겠다고 자연스레 생각했는데, 이게 잘못된 것이었다.
1위 자리에서 내려다보고 대응하겠다는 것 자체가 보수적으로 생각하고 방어적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는 증거였다.
설령, 그렇게 방어적인 수단으로 1위를 지켜내더라도 그런 방식으로는 1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할 터였다.
권투에서도 챔피언이 되면 실력이 줄어든다는 말이 있었다.
챔피언이 된 다음에는 방어전 상대만을 생각하다 보니 아래로만 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실력이 줄어들게 된다는 말이었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딱 그런 눈앞의 방어전만 생각하는 챔피언의 자리였다.
방어전을 막아내고, 그 이상의 통합 챔피언 같은 것을 노려보기 위해서는 아래의 도전자를 보면 되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들어 위를 봐야 하는 것이었다.
LT 그룹과 배송의 민족이 어떻게 나올지 보고 대응하겠다는 그런 안이한 생각을 버렸다.
“진짜 미국 한번 가서 천상천(天上天)을 좀 보고 와야겠다. 미국 애들의 어플 사용 패턴 같은 걸 봐야겠어.”
“그런데, 양놈들도 다 비슷한 거 아니야? 직접 가기 싫어서 시키는 건데 무슨 패턴이 있겠어?”
“그건 그렇지. 그런데, 한국과 미국 사람이 똑같은 사용 패턴이라면 미국 진출도 한번 노려볼 만할 것도 같아서.”
“햐, 글로벌 진출할 겸 가보겠다는 거야? 대에바악~! 역시 마인드가 다르구나. 난 이제 안정 위주인데 확실히 다르네.”
의사인 동규는 사업가와 봉급쟁이(?)는 마인드가 다르다며 오바질을 했다.
“그런데, 미국 가봐도 대표적 공유 어플인 유버에서 음식 배달을 벌써 하고 있다면 우리가 들어갈 구멍이 없을 거야. 그냥, 진출하겠다는 것보다는 외국 애들은 어떤 부가서비스를 운용하고 있는지 견학하러 간다고 봐야지.”
“그럼, 그 벤처 업체들이 몰려 있는 실리콘 밸리도 가는 거냐?”
“가보기는 하겠지만, 거기 가더라도 현업 종사자나 대표들을 만날 수가 있겠냐?”
“미리 이메일 다 보내서 한번 보자고 하면 되지. 한국과는 달리 외국 애들은 기업 대표라도 메일 보낸 거 제대로 보고 답도 해줘. 아니면, 실리콘 밸리에 있는 헤드헌터에게 의뢰해서 관련업 종사자랑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걸.”
“오, 그 방법이 있었네. 회사 대표를 못 만나면 실무진이라도 만나서 이야길 해보면 되겠네.”
***
“민지 씨 미국 비자 좀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외환거래를 위한 계좌도 하나 만들어야 하는데. 흠. 계좌 건은 내가 하는 게 맞겠네요. 일단 비자 알아봐 주시고, 비자 나오면 가장 빨리 LA로 갈 수 있는 비행기랑 숙소 잡아주세요.”
“넵.”
LA나 뉴욕에서 최소한 일주일을 살아보며 주문배달을 시켜봐야 했고, 실리콘밸리에서 사람도 만나봐야 했기에 미국 각 업체 메일에다가 방문하고 싶다고 메일을 보내고 답장을 기다렸다.
그리고, 실리콘밸리에 있는 헤드헌터에게 이직이 아닌, 그 업계의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의뢰를 하자 포스트 메이트(post mate)에 근무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다.
핵심 개발자도 아닌 운영지원 파트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4시간 인터뷰 만으로 5천 달러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보름 넘게 자리를 비워야 되다 보니 은근 걱정이 되었는데, 이제야 웬만한 중견기업만 되어도 비서실을 만들고 비서실장부터 두는지를 알 것 같았다.
문제는 수족이나 마찬가지인 비서실장으로 쓸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거산 때부터 같이 일구어온 이서나 민욱이가 가장 좋았는데, 그들에겐 이미 맡긴 일이 있다 보니 그 둘을 비서실장으로 두는 건 손해였다.
어쩔 수 없이 개발 관련으로 데려와서 개발팀 관리를 맡긴 이종사촌인 이석건을 비서실장으로 둘 수밖에 없었다.
“개발팀은 알아서 잘하니깐 넌 이제 이 형의 스케줄 관리나 하거라.”
“오! 그럼 저도 미국 같이 가는 겁니까?”
“널 비서실장으로 두는 이유가 뭔데, 새벽에 편하게 전화해서 보고 받고, 일 시키려는 거야. 여직원에게 새벽에 전화 못하잖냐.”
“저도 새벽에는 자야 하는데요. 여자친구도 있다구요.”
“내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다. 더러우면 네가 사장하던지.”
“에혀.”
사촌이다 보니 편하게 욕도 좀 할 수 있고, 잡다한 일도 맡길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최선의 인선이었다.
***
“저쪽입니다.”
짐이라야 옷 가방이 전부였고, 나름 첫 미국에 가는 것이라 퍼스트 클래스로 표를 끊었기에 여유 있게 공항 라운지에서 터미널로 향했다.
비행기에 타기 위해 50명 정도가 줄을 서 있었는데, 안내하는 스튜어디스는 한 명밖에 없었다.
어디서 주워듣기로는 퍼스트 클래스는 대기하지 않고 바로 먼저 탄다고 들었기에 표를 스튜어디스에게 보여주었다.
“네. LA행 A325편 티켓 맞으시고요. 저쪽에 줄 서 주시면 됩니다.”
승객들을 응대한다고 땀을 뻘뻘 흘리는 스튜어디스의 말에 줄 서 있는 사람들도 다 일등석인가 싶었다.
한참을 줄 서 있다 그제야 줄지어 비행기에 탔는데, 비행기 안에서 좌석 위치를 안내하는 직원이 티켓을 보고 놀랐다.
“헉! 일등석이신데 줄을 서신 건가요?”
“네. 표를 보여주니깐 줄 서서 타라고 하더라고요.”
“어머나, 죄송합니다. 저희 신입 직원이 티켓 확인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쪽입니다.”
뭔가 큰일이 났다는 듯이 거듭 사과를 하는 스튜어디스를 따라 비행기 앞쪽으로 가니 다른 퍼스트 클래스 좌석은 이미 사람들이 다 앉아 있었다.
비싸게 티켓을 구매했지만, 돈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섭섭한 마음이 있었지만, 무전으로 대차게 까이고 있을 신입 직원을 생각하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저희 직원이 불쾌하게 해드린 데 대해서 사무장인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모쪼록 불편하신 부분이 있으시면 바로 호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샴페인이 맛있는데, 한잔 더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저 흔한 웰컴 음료인 샴페인이었는데, 한번 사고가 있어서 그런지 서빙하는 스튜어디스도 조심하는 게 보였고, 뭔가 특급 호텔급의 서비스에 마음이 금세 풀렸다.
‘이야, 역시 돈이 좋네. 뭔가 이런 대우 받는 거에 중독될 거 같은데. 의자도 바로 침대가 되고, 뭔가 버튼도 많고 신기하네.’
마음 같아서는 일등석 좌석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셀카도 좀 찍고 하고 싶었지만, 천만 원이 넘는 일등석에 앉은 사람들이 뭔가 다 상류층 사람 같은 느낌이라 그렇게 설칠 수가 없었다.
비행기가 뜨고 난 이후로 미리 준비해온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슬리퍼를 신고선 로션이나 그런 게 들어가 있는 편의용품 구경을 했다.
와인 리스트와 커피, 식사메뉴를 고르고 있으니 비행기를 탈 때 줄을 섰던 것도 잊어버렸고, 그저 나오는 식사를 맛나게 먹었다.
그리고 영어 감을 다시 깨우기 위해 기본 제공하는 CNN 뉴스를 보고 있었다.
“오! 라면 냄새난다. 나도 하나 먹을까.”
일등석이 12좌석이었는데, 누군가가 라면을 먹는지 라면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나도 라면을 먹기 위해 호출을 하니, 사무장이 먼저 말을 건네었다.
“출출하시면 캐비어 어떠십니까?”
“네?”
머릿속으로 파팍하는 정보가 처리되었다.
사고 친 게 있다 보니 라면보다 캐비어를 추천해주는 거라는 생각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달달한 맛의 샌드맨이란 와인이 먼저 나왔고, 작은 통 안에 든 캐비어가 나왔는데, 캐비어 통 밑에는 얼음이 깔려 있어서 캐비어 통 전체가 차가웠다.
“오스테라 캐비어입니다. 이걸 여기에 올려서 드시면 됩니다.”
사무장은 캐비어 통을 뜯기 전에 잔파와 버터를 발라 구운 빵에 생크림과 마요네즈 크림 같은 것을 발라주었다.
그러곤 그 위에 캐비어 알을 올려서 건네주었는데, 흰색의 빵과 흰색 크림 버터 위에 검은색의 알들이 올라가 있으니 식욕을 제대로 자극하는 비주얼이 되었다.
잔뜩 기대를 하고 한입 베어 물어보니 버터와 크림의 맛에 짭조름한 무염 명란젓이 올라가 있는 그런 맛이었다.
출출할 때 건강하게 입맛을 만족시킬 수 있는 맛이었기에 나름 괜찮았다.
그리고 바로 드는 생각은 매제에게 이걸 똑같이 만들어서 요리쇼에서 팔면 잘 팔릴까 하는 생각이었다.
비싼 캐비어 대신 명란이나 다른 생선의 알에 향을 가미하면 거의 비슷한 맛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달콤한 와인과 함께 먹는다면 명란인지 캐비어인지 구분도 잘 안 될 것 같았다.
“캐비어 이거 한 통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작은 도장 인주 크기의 캐비어 통은 15g이었는데, 빵 하나에 발라 먹으니 금방 없어졌다.
“네.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내가 캐비어를 올려서 바게트빵을 야무지게 먹자, 라면을 먹으려던 사람들도 다들 캐비어를 찾았다.
“아니, 다들 먹는데, 왜 나는 캐비어가 없다는 거야? 사람 차별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승객님. 본래 이게 간식으로 나가는 것이라 총 정원보다 적게 실리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 다 서비스가 되었고, 남은 재고가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니, 그럼 내가 라면 먹을 때 미리 이야길 해주던지. 누군 라면 입이고, 누군 캐비어 입이야? 기분 더럽네! 이거. 라면 다시 끓여와!”
50대의 남자가 큰소리로 항의를 했는데, 괜히 내가 캐비어를 2개 먹어서 문제가 난 건가 싶어 괜히 미안했다.
“라면 다시 끓여와 설익었잖아! 다시 끓여와.”
“아니, 이번에는 라면이 너무 퍼졌잖아. 이따위로 서비스하면서 국적기라고?”
캐비어를 못 먹은 화풀이를 하는 건지 남자는 괜한 직원들을 똥개 훈련하듯이 다시 해라 새로 하라 하면서 괴롭혔다.
남자 사무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스튜어디스 여직원은 아예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끓인 라면이 아닌 컵라면을 가져오라고 했다가 컵라면이 맛이 없다며 다시 라면을 끓여오라는 소리를 할 때는 다른 승객들도 짜증을 내었고, 혀를 찼다.
“아니, 그쪽은 캐비어 먹었으니깐 그렇게 있는 거라고. 난 라면밖에 못 먹을 것 같아서 이런 대우 받아야 하겠다고.”
“좀 조용히 좀 갑시다. 그렇게 캐비어가 먹고 싶으시면 제가 캐비어 값 드릴게요.”
추태 부리는 남자 옆자리에 있던 젊은 남자가 돈을 주겠다고 했는데, 이게 더 화를 내게 만들었다.
“내가 돈이 없어서 이러는 거 같아? 캐비어에 목욕할 수 있을 만큼 사 먹을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잖아. 내가 그런 취급을 당해야 되겠어? 그리고, 그쪽은 부모 잘 만나서 편하게 미국 가는 거면 조용히 하라고. 어딜 어른이 화를 내는데 끼어들고 그래.”
“네에?”
“부모덕에 먹고 살면 웃어른들에 대한 존경이 있어야지. 어딜 내 말을 막아?”
“하하하. 제가 저희 부모님 돈으로 이거 타고 미국 가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시는데요?”
“이제 군대나 제대했을 거 같은 놈이 일등석 타고 미국 가는 거면 뻔하지 뭐. 돈만 있는 졸부들이 이렇게 비행기 타고 돌아다니니 문제야.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우리 같은 기업인들이 이런 자리를 타야지.”
“저희 부모님이 졸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시는데요?”
“뻔하지. 그렇게 부모님이 자랑스러우면 부모님 이름 이야기해 봐. 누가 알아주는지. 이름 이야기해 봐.”
이름을 이야기하라는 말에 청년이 머뭇거렸는데, 그냥 놔두면 내가 피곤할 것 같아 나섰다.
“이름을 밝히기 전에 그쪽은 얼마나 대단한 회사에서 근무하는지나 들어 봅시다. 어느 회사에 누구입니까? 얼마나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고 있는 회사인지 한번 들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