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대 탈출.
핸드폰에 보이는 발신자는 중국 LT마트 지사장인 박종일이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졸았었다.
탄산수를 런칭한 것을 시비걸기 위해 LT그룹에서 전화가 온 게 아니니 여유 있게 전화를 받았다.
박종일 지사장은 내가 오히려 위로해줘야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이었으니깐.
“네 지사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중국 상황 어떻습니까?”
“아유 죽겠습니다. 진짜 죽지 못해 버티고 있습니다.”
박종일 지사장은 280개로 늘어났던 LT마트가 사드 미사일 문제로 박살이 났고, 매장을 줄이고 있는 상황이라고 절망적인 상황을 이야길 했다.
“정말 아쉽네요. 우리가 지점을 늘리기 위해 진짜 고생을 했는데. 본사의 ‘그분’도 계속 중국에 계신 겁니까?”
“어딜요. 사드 사태 터지고 바로 본사로 가셨지요. 이제 발생하는 적자나 문제는 오로지 제가 더 떠안고 죽어야 할 판입니다.”
“어휴. 미사일 기지 부지를 기부하고 한 것은 본사의 분인데, 그로 인해 벌어지는 모든 건 밑에 사람이 떠안아야 하니 참 억울하실 것 같네요.”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헌데, 이번에 용진 음료를 인수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축하드립니다. 사실, 이건 때문에 전화를 드린 겁니다.”
설마, 올 것이 온 건가 싶었다.
그러고 보니 박종일 지사장과는 개인적인 친분 관계가 없었기에 이런 중국 상황을 서로 이야기하며 흉을 보고 떠들 만한 사이가 아니긴 아니었다.
“스타 코퍼레이션이 음료 회사를 인수하셨을 정도라면 본격적인 식음료 사업에 나서시는 겁니까?”
“네. 이제 음료부터 해서 생산 납품하고, 동남아 쪽으로 스타 마트를 확장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혹시 여력이 좀 있으십니까?”
“여력요? 어떤 여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까 이야기해 드렸다시피 본사에선 지금의 상황이 가라앉을 동안 중국 내 LT 마트의 지점 수를 50개 미만으로 줄이라고 통보가 내려왔습니다.”
“저런. 그러면 230개나 문을 닫아야 하는 겁니까?”
“네. 그러다 보니 문 닫는 지점에서 나오는 재고가 엄청납니다.”
“아아, 그럼 그 재고를 저희더러 인수할 여력이 있느냐는 말입니까?”
“네. 맞습니다. 여력이 좀 되십니까?”
“그런 여력은 되는데 말입니다. 그 여력을 따지기 전에 궁금한 게 있습니다. 보통은 마트에 진열 납품하는 상품의 경우에는 그 상품이 판매된 이후로 정산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마트가 망하더라도 물건을 도매상이나 원 생산 업체에서 다시 들고 가는 것으로 아는데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다른 마트와 판매가격이 같아져 버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공격적으로 지점을 늘려야 하는 입장에서는 가격 싸움에서 최저가를 확보하기 위해 별도의 주문생산을 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단가 할인을 조건으로 선 매입해서 판매할 경우도 있습니다.”
“아, 그런 케이스의 재고가 많은 모양이군요. 헌데 중국 내의 다른 마트에 덤핑으로 넘기는 것은 안 되던가요? 한국에 있는 스타 마트가 저희 주력인데, 중국 상품들은 받아서 처리하기가 힘이 들 것 같은데요.”
물건을 싸게 받아서 동남아로 유통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런 재고상품들을 모아서 동남아로 들고 가는 물류비가 더 들어갈 것 같았다.
“이게 우리 LT 마트가 코너에 몰린 것을 알고 있다 보니, 재고상품을 덤핑으로도 잘 받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더 싸게 처분하려고 할 테니 중국 업자들은 그냥 간만 보고 더 시간을 끌고 있습니다.”
“허허. 이거 진퇴양난이군요.”
“네. 그래서 중국 애들에게 그쪽 말고도 다른 루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임 대표님께 연락을 드린 겁니다.”
“흠. 이럴 때일수록 한국 사람끼리 돕는 게 맞는 것이겠지요. 일단 단가표를 좀 보내주십시오. 검토하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시 고정적으로 운송을 맡기는 해운사가 없다면 그 부분도 처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음, 그렇다면 베트남 붕따우 항의 저희 물류 본부로 가는 용선 비용까지 견적을 보내 주십시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용진 음료를 인수하고 캄보디아로 갈 수 있는 타이밍을 만들어 준 것이 LT 마트 박종일 사장이었기에 금액만 맞는다면 재고 부담을 어느 정도는 덜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단순하게 스타마트 운영만이 아닌 동남아에 한국과 일본의 상품을 유통할 계획도 있었기에 서로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미끼 상품으로 풀 수 있는 덤핑 상품이 있으면 시장 개척이 쉬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네. 그럼 자료 보내드리고 내일 오후에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
“와! 대표님. 이거 물량이 장난 아닌데요. 물건 가짓수가 200개가 넘고, 재고가 20피트 컨테이너로 400개 이상은 나올 것 같은데요.”
자리를 비운 김민욱을 대신해서 스타마트 물류 담당 부장을 올려서 목록을 검토시켰는데, 재고 물량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재고 처분을 어떻게 해서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실 대부분이 중국산 제품이다 보니 한국에서 재고를 처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긴 했다.
“재고 물량이 엄청 많다고는 하지만, 베트남 붕따우 항까지 가져다주는데도 45억밖에 안 한다는 거지. 이 물량을 다 소화할 수만 있다면 인도차이나반도의 어중간한 중국 도매상들은 다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거든. 어때?”
“이 정도의 많은 물량이라면 충분히 도매시장을 다 잡아먹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재고 물량을 들고 도매 영업을 하고 관리할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 아니겠습니까?”
하긴 그랬다.
김민욱 마트 총괄이 캄보디아에 있으면서 스타마트와 베트남의 뿡따우 물류 본부 창고는 만들어 두었지만, 지금도 죽어라고 일을 하고 있었다.
아시아 총괄로 둔 이종민은 골든타워42에 들어갈 매장과 호텔 입점을 알아본다고 정신이 없어서 이걸 맡길 수도 없었다.
지금 좋은 가격에 물건을 동남아에 들여온다고 해도 그걸 쳐내어서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현실적으로 일을 맡아서 핸들링할 사람이 없었기에 추진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쉽네.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기회를 못 살리…아니네. 살릴 수 있네. 방법이 있었네.”
나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김 부장은 이 재고상품들 중에 한국에서 처리할 수 있는 상품들을 한번 뽑아봐. 특히 중국산 말고 타 국에서 만들어서 중국에 납품된 물건들을 뽑아. 그건 한국으로 들고 오자고.”
“이걸 다 인수하시기로 한 것이면 운영인력은 그럼 어떻게 하시기로….”
“그건 방법이 있을 것 같아. 일단 제품 리스트업부터 해놔.”
***
업무가 마치는 6시 반 이후로 박종일 지사장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네 보내주신 목록을 살펴보고 분량을 확인해보니 20피트 컨테이너로 400개 이상이 나올 정도로 물량이 엄청나더군요.”
“네. 하지만, 정말 최저가로 드리는 겁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헌데, 저희에게 이렇게 저가로 파는데도 중국 애들은 이거보다 더 싸게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까?”
“네. 유통기한이라는 게 무작정 길 수가 없으니 유통기한이 다 되어 가길 중국 놈들은 기다리는 거지요.”
“흠. 이거 우리가 다 인수하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베트남 붕따우 항까지의 운송도 다 해드리기로 해서 45억으로 견적을 드렸는데, 더 가격을 낮추길 원하시는 겁니까?”
“아, 가격 이야기가 아닙니다. 박종일 지사장님께 거는 조건입니다.”
“제 개인에게 조건을 걸겠다는 겁니까?”
“네. 중국에 와 있던 후계자가 도망을 쳤다면 중국에서 일어나는 손실은 다 지사장님이 책임져야 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럼,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자의든 타의든 회사를 나오셔야 할 거 같은데 맞습니까?”
“그, 그렇지요.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옷을 벗어야 하겠지요.”
“그럼 저와 함께 일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스타 코퍼레이션은 직원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습니다.”
박종일 지사장은 갑작스러운 스카우트 제의에 뭐라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중국 내 LT 마트가 10개 지점에서 280여 개로 늘어났을 때만 해도 일본 본사에서는 역대급으로 빠른 확장이라며 중국사업부의 실적을 아주 높게 평가해 주었다.
그 높은 평가와 실적은 3세 경영으로 이어지는 후계자의 실적이 되어 오너로 가는 실적 발판이 되기 충분했다.
문제없이 시간이 흘러 성공적으로 후계자가 그룹을 물려받았다면 함께 중국사업부에 있었던 박종일도 대기업 LT 그룹의 임원이 되어 대기업 본사 임원 라이프를 즐기며 말년을 마무리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드 문제가 터지고 한국 제품, 한류의 불매 운동이 중국에서 벌어지기 시작하자 230개 이상의 마트를 정리해야 하는 최악의 사업부가 되어 버렸다.
발판 실적을 만들기 위해 왔던 후계자는 바로 본사로 불려가 중국사업부와의 인연을 끊어 버렸으니 이제 박종일은 끈 떨어진 연과 같은 처지였다.
중국사업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손해는 지사장인 자신의 책임이었으니, 그 미래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같이 있었던 후계자가 커버를 해 줘서 잘리는 것은 막아준다고 해도, 어디 들어보지도 못한 지점이나 사업부로 발령되어 뒷방 늙은이로 은퇴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아, 그리고 지사장님만 데리고 오고 싶은 게 아닙니다. 280개 지점이 50개 이하로 줄어들게 되면 각 지점에서 일했던 한국인들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 인원들까지 해서 이직 제의를 드리는 겁니다.”
박종일은 답답하던 가슴이 '펑' 하고 뚫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 내 LT 마트가 늘어나며 한국에서 옮겨 왔거나 신규로 채용한 한국인이 수십 명이었다.
지점이 줄어들게 되면 결국 다른 사업부로 배치되거나 하겠지만, 대부분이 2년 이내 퇴사를 하게 될 운명이었다.
헌데, 그런 이들까지 함께 옮길 수 있는 방법이 생겼으니 근심 고민만 가득하던 박종일의 가슴이 시원하게 풀린 것이었다.
“그럼, 저와 직원들이 스타 코퍼레이션으로 옮기게 되면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겁니까? 스타 마트의 일인 겁니까?”
“스타 마트의 일이 주가 되겠지만, 전체적인 물류 유통을 지사장님이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인도차이나반도에 2곳의 물류 창고와 필리핀, 인도네시아에 2곳까지 4개의 물류 창고를 기반으로 스타마트와 한인 마트에 물품을 대어주는 유통망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한국과 동남아 물류 본부를 오가는 컨테이너선도 도입할 예정입니다. 해운사까지 연계된 물류 유통망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이 유통망을 지사장님이 직원들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흠. 일단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저를 따르는 직원들과 상의를 해야겠습니다.”
“네. 근무 조건에 대한 것은 내일 오전 중으로 메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유통 관련으로는 대기업 LT 그룹의 정직원이 최상위의 일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IT나 첨단 산업에 비해서 유통업은 임금조건이 나쁜 축에 드는데, 그런 것들이 대기업이면 어느 정도는 상쇄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LT 그룹을 같은 유통 재벌들 회사와 비교하면 가장 낮은 연봉을 받기는 했지만, 중견업체와는 또 확연히 다른 복지나 혜택이 있었으니 이직을 쉽게 하기 힘들 터였다.
아마도, 평상시라면 그런 것을 다 포기하고 중견기업으로 이직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특수 상황이다 보니 타 사업부로 가서 허수아비가 되기 보다는 중견기업으로의 이직을 더 하려고 할지도 몰랐다.
박종일 지사장과 직원들이 팀을 이루어 옮겨 온다면, 중국 내 LT 마트의 재고를 덤핑 가격으로 다 가져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트 230여 개 지점에 깔린 재고상품을 저렴하게 동남아에 풀어 버리면 도매시장을 잡고 있던 기존 동남아나 중국 업체들이 어떤 비명을 지를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