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시간 끌기.
“에, 그게 유업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황채근 전무의 말에 심정호 회장은 손을 내밀었다.
유업체 관련 자료와 유업체를 정리했을 때의 일들이 나와 있었다.
“2008년에 너무 무리하게 들어간 건가?”
LT 그룹에 처음부터 유업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2008년 중국의 분유 파동이 터지면서 유업체를 인수했기에 스낵류를 메인으로 하는 근본과는 맞지 않긴 했다.
현재 유업으로 버는 돈은 1년에 500억 내외였기에 이 정도면 정리를 해도 괜찮은 범위라고 심정호 회장도 판단했다.
“헌데, 인수할 회사는 있습니까?”
“우리와 일이 있는 스타 음료에 파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마무리입니다. 그래야 떨어진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채근 전무는 유업체에서 벌어들이는 몇백억보다, 망가진 LT란 브랜드에 더 비중을 두었다.
“피해 입었으니 그걸 정리하겠다는 그런 의미인가. 뭐, 좋아요. 황 전무가 한번 그쪽에 의사를 타진해 보세요.”
“네. 언론에는 이번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를 담아 매각하기로 했다고 기사를 내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한번 끌어보겠습니다.”
“시간을 끌겠다고?”
“이번 사건이 덮어질 때까지 시간을 끌어보고 여론 동향에도 피해받는 게 없다고 판단되면 매각을 취소해서 다시 들고 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나름 알짜 기업입니다.”
“후후후. 내가 이래서 한국을 황 전무에게 맡기는 거라니깐. 재민아. 이리 와서 인사 드리거라. 황채근 전무님이 앞으로 너에게 일을 가르쳐 주실 거다.”
“안녕하신밈까.”
이제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키가 멀쑥한 청년이 고개 숙여 인사했는데, 말 억양이 기묘했다.
“애가 일본이랑 미국에서만 자라서 한국어가 아직 서툴러. 황 전무가 좀 잘 봐주도록 해요.”
“글로벌한 감각을 지니셨으니 LT를 잘 이끌어 나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
“SG 편의점에 가격 파괴 우유가 들어가게 되면서 꼼수로 남는 쿼터를 받아오는 원유가 있어도 물량이 딸리고 있습니다.”
스타음료의 이일찬 부사장은 유통처가 다양해지자 정신이 없다고 했다.
“정부 주체로 유업 회의가 열린다고 하니깐 그 회의 결과 한번 기다려 보죠.”
“그 회의에 참석하실 겁니까?”
“참석하려고 했으나 김유환 국장이 참석하면 안 된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스타음료와 LT유업, LT파미테르는 제외하고 회의를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사건의 당사자를 뺀다면, 가장 영향력이 큰 남한유업에서 회의를 주도하려고 들지 않을까요?”
“뭐, 회의 결과를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정부에서 감사원이 내려왔다는 말도 있으니 예전처럼 담합을 대 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언론에 보도가 되며 감사원이 내려왔다면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진행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유 쿼터제가 바로 없어지진 않겠지만, 빨리 없어져서 원유 수급이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는 이일찬 부사장이었다.
“그건 그렇고, 3공장에서 생산하는 건 준비 잘 되고 있습니까?”
“아, 그건 오늘부터 생산하고 있습니다. 물량이 전국에 나갈 정도가 되면 바로 우리 마트부터 공급이 될 예정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 사건 덕분에 전국 유통을 한번에 시킬 수 있을 것 같네요.”
“네. 나름의 전화위복이 된 거 같습니다. 하하하.”
“기대가 큽니다. 그리고, 이게 성공하게 되면 상장까지도 할 생각이니 힘내 주십시오.”
***
“이제 다들 오신 거 같으니 회의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쪽은 준법감시팀에서 오신 분이고….”
축산 정책국의 김유환 국장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유업체 관련 회의가 있었을 때면 늘 한쪽 구석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있었는데, 오늘은 앉아 있는 자리부터 달랐다.
자리가 달라지면 행동도 달라진다는 말과는 좀 다르지만, 오늘 김유환 국장은 목에 힘을 줬다.
“다들 뉴스 보셔서 아시겠지만, 감사원에서 우유 시장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쿼터제로 신규 사업체가 진입하기 어려운 닫힌 구조라는 것은 이미 문제가 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감사원이 지적했다는 말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닫힌 구조이기에 담합이 쉽게 이루어진다는 분석이 나왔기에 이 구조를 변경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즉, 쿼터제의 개편이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다들 머리가 복잡해졌다.
“쿼터제가 사라지면 자연스레 원유 가격연동제 또한 없어지게 될 겁니다. 그러니 다들 미리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렇게 갑자기 바뀌게 되면 우린 어떡하라는 겁니까? 뭔가 유예기간을 주든지, 새로운 법이 적용될 때의 혼란기에 생기는 손실분을 보장해 주든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정책국에서 이런 건 막아주셔야지요.”
남한유업의 서진석 부장이었다.
“뭐, 축산 정책국이 그런 유업체와의 연계를 하는 곳이긴 합니다. 헌데, 지금 상황을 보십시오. 커버를 해 드리려고 해도 해 드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어진 원인 제공자들에게 따지십시오. 정부에서는 더 해 드릴 게 없습니다.”
김유환 국장은 평상시 해보고 싶었던 ‘정부에서는 더 해 드릴 게 없습니다’를 드디어 유업체들에게 해 보는 것이었다.
“지금 쿼터제를 유지하고, 원유 가격연동제를 유지하자고 하면 LT 그룹과 같이 묶여서 매국노가 될 판입니다. 그거 우리 정책국에서는 감당 못 합니다.”
“크흠. 저도 쿼터제로 이제까지 단물을 빨았지만, 이제 바꿔야 하는 거에 찬성입니다.”
김유환 국장과 남한유업 서진석 부장의 대화에 메르밀 유업 대표 정길환이 들어왔다.
“지금 돌아가는 여론 추이를 보면 사람들이 아예 우유 마시는걸 보이콧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시민단체에서도 우윳값을 내리지 않는다면 원가표 공개하라고 압박도 넣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거야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별거 아니라는 듯 남한유업의 서진석이 핀잔을 줬다.
“예전이었다면 그냥 덮고 넘어갈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이번은 아닌 거 같습니다. 여론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 사장님. 그 예전이랑 지금이랑 달라진 건 없습니다. 어떻게든 버티면 됩니다. 며칠만 기다려 보십시오. 다른 화제가 자연스레 터질 겁니다. 그러면 예전처럼 다시 여론의 화제가 옮겨 갈 겁니다.”
“맞아. 정 사장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거야? 음주운전 하는 연예인이 나오거나 마약하는 연예인이 자연스레 나와서 여론의 화제가 옮겨 갈 거야. 뭐 그런 게 없다면 내가 탑 연예인하고 스캔들이라도 터트려서 파파라치들에게 사진 좀 주지 뭐.”
탑스타와 열애 스캔들이라도 터트리겠다는 말에 다들 웃었지만, 마냥 웃고 넘길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실제로, 정부나 대기업에 피해가 갈 정도로 뭔가가 터지면, 며칠 안에 연예인들의 사건 사고가 일어났었기 때문이었다.
“LT 그룹이 조용한 건 아마도 그런 여론을 돌릴 만한 사건을 기다리며 타이밍을 재는 걸 겁니다. 그러니 우리도 일단은 좀 기다려 보죠. 이왕 손해 난 거 한두 달 적자 감수해서 버텨내면 다시 그 손실 다 채울 수 있을 겁니다.”
서진석 부장의 말에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 죽은 듯이 누워 있으면 소나기가 지나가고 해가 뜨겠지.”
“버텨보자고.”
김유환 부장도 서진석의 말이 얄미웠지만, 저 말이 진짜 맞았다.
대다수의 금방 끓어오르는 국민들은 새로운 화제로 쉽게 넘어간다는 것이 역사로 증명되었기 때문이었다.
“흠흠. 그럼 일단 보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보름 정도 지켜본 이후 다시 회의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럼. 최정윤 씨 폭력 문제는 보상금 1억 원으로 합의하는 것으로 법적인 책임을 다 마무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LT그룹에서 나온 변호사의 말에 우리 측 변호사인 정진이도 괜찮은 조건이라고 마무리를 했다.
“그럼 다른 건으로 이야기를 해보지요.”
변호사가 물러나고, 황채근 전무가 나섰다.
“이번 사건으로 기업 이미지가 실추되었기에 그룹에서는 LT유업과 LT파미테르 유업을 매각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 두 업체를 스타 측에서 인수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이야기를 들은 임건호는 깜짝 놀랐다.
이 폭력사건 합의를 위해 변호사와 황채근 전무가 같이 온다고 들었을 때 그룹의 2인자가 온다고 해서 너무 과한 사람을 보내온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황채근 전무를 직접 보낸 이유가 폭력사건 합의 때문이 아니라 인수/매각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기업의 이미지를 망쳤다고 1년에 순이익 500억은 나오는 두 유업체를 매각하겠다고 결정한 회장의 배포에 놀랐다.
“가격만 맞는다면 두 곳 모두 인수할 의향 있습니다.”
“흠. 그런 매각/인수를 위한 TF팀을 만들어서 다시 한번 보도록 하지요. 그쪽의 TF팀은 박정진 변호사가 맡게 되는 겁니까?”
“네. 아마도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럼, 상세 일정이 나오면 그때 다시 보죠.”
갑자기 인수합병 건이 생겼기에 정진이에게 두 회사의 실사와 관련된 일을 맡겼다.
***
[LT그룹 문제가 된 LT유업과 LT파미테르를 스타 코퍼레이션에 매각하기로 결정. 세부 사항 조율 중.]
…매각 협상을 맡은 황채근 전무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고, 그 피해를 준 스타 코퍼레이션 측에 매각하는 것이 사회정의에 가장 맞는 것으로 생각하여 매각을 결정하기로 했다고.
매각 협상은 이미 실무단계로 넘어갔으며 세부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매각금액은 2천 500억 내외로 보고 있다고…
“이게 오늘 아침 신문이라고? 어제 황채근 전무를 만났었는데?”
신문을 가지고 온 정윤이도 그렇고 나나 정진이도 어이가 없어서 신문을 계속 볼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이 어제 직접 만나셨다면서요?”
싱가포르에서 들어와 있는 김신현은 오히려 기사를 보고 어이없어하는 이들에게 되물었다.
“어제 만난 건 맞아. 하지만, 이제 서로 TF팀을 만들어서 보기로 했거든.”
“한번 만나보고 구체적인 금액이나 세부 조율 중이라는 기사가 난다는 건 뭔가 이상한데요.”
“그렇지. 아주 이상해.”
어제 황채근 전무를 처음 만났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이 신문 기사만 보고 LT 그룹이 사죄의 의미 유업 관련을 다 스타 코퍼레이션에게 넘겨주는 그런 모양새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의 댓글에는 LT 그룹이 좋은 판단과 결정을 한 거라고 이제 욕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진짜 LT그룹 내부에서는 확정을 해서 황채근 전무가 왔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게 무서운 거지. 이미지 쇄신작업으로 이 카드를 쓴 거야.”
“하긴 우리가 어제 처음 만났다고 아직 세부적인 의견 조율 없었다고 기사를 내더라도 아무도 안 믿을 것 같네.”
“사람들은 우리가 인수 금액 낮추려고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겠지.”
“이야, 황채근 전무에게 한 방 먹은 것 같네. 기자를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할 수도 없고. 좋은 방법 없어?”
“대표님 그럴 땐 이이제이(以夷制夷)로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