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아이린 유리스(3)
* * *
하늘에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어둠을 몰아냈던 태양은 다시금 어둠에 잠겨 사라진다.
빛이 두려워 사라졌던 별무리가 나타나고, 푸른 빛과 함께 떠오르는 월광은 더할나위 없는 장관이었다.
내가 살던 현대에서는 아마 시골에서조차 보기 힘들 수많은 별들.
창문을 통해 비치는 그 무수한 별빛을 바라보던 중, 귓가에 감탄섞인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와아...”
아이린의 전속시녀인 로페나가 감탄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중세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야경, 마법으로 이루어진 빛들로 밤의 거리가 찬란히 빛나기 시작했다.
전기가 없는 대신 마법인가.
오히려 마력으로 이뤄진 만큼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 쪽이 더 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페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야경에 푹 빠져있던 로페나가 화들짝 놀라며 아이린을 향해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아이린보다도, 그리고 나보다도 어려보이는 아이의 손에 들린 무거운 짐을 보는 마음이 영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그녀가 들고 있는 짐만큼이나, 공작가의 장녀를 수호하는 내 책임 또한 무거웠으니까.
로페나의 손에 또다시 서책 하나가 올려졌다.
끄응, 로페나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지만. 그런 그녀의 상태를 헤아리는 대신 아이린은 한 권의 책을 더 올렸다.
“으아...”
부들거리는 팔이 자꾸만 눈에 밟혀 애써 시선을 돌렸다.
아까 잠시 들어주었다가 크리스라는 그 험상궂게 생긴 기사에게 딱 걸려 머리를 얻어맞았다.
맞은 자리가 아직도 욱신거리는 것이 멍이 심하게 든 것 같은데,
로페나 또한 그 광경을 본 터라 내 쪽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 묵묵히 짐을 챙겼다.
책, 논문, 책, 필기구, 책. 로페나의 작은 손 위로 올라간 짐들을 바라보자 괜스레 속이 울렁거렸다.
순수하게 공부를 즐기는 사람이 저렇게 샀다면 이해했겠지만, 그 책을 고르는 그녀의 얼굴 또한 무표정했기에.
그 짐들이 그저 불편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도대체가.”
알 수가 없네. 그 무표정한 가면 속에 있는 감정은 그저 짐작할 수 있을 뿐, 도통 드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아이린이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고 인형이란 착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언제나 수평을 이루는 그녀의 입꼬리를 바라보던 나는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아이린은 계속해서 책을 골랐다.
서점에 들린지도 어느덧 3시간 째, 로페나가 결국 아이린의 책을 한 곳에 두고 올 때까지도 그녀는 멍하니 책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녀가 책을 통해 보는 것이 뭘까.
그러고 보면, 소설 속에서의 아이린 또한 등장할 때마다 책을 읽고 있었다.
소설이던, 철학이던, 아니면 경제학이던. 어떠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은 책 덕인지 꽤나 박식했으며,
그런 그녀의 지식 덕에 주인공이 그녀를 상대할 때 꽤나 애를 먹지 않았던가.
칼날꼬리 도마뱀의 독이군, 나를 암살하려 하는 건가. 루나 드림웰.
일반적인 차와 다를 바 없는 홍차의 향을 맡은 그녀가 내뱉었던 말에 독자였던 나마저 소름이 돋았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암살자들도 쉬이 구분하기 힘들다던 그 독을 단숨에 구별해낸 것은, 모두 책에서 얻은 지식 덕이라 그녀는 덧붙였었다.
...암살.
감탄으로 시작된 생각은 이내 이어진 한 단어에 턱, 하고 가로막혔다.
내가 떠올린 아이린의 모습은, 그저 그녀의 과거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를 노리는 수없이 많은 암살시도, 그리고 결국 막지 못해 스러지는 그녀 주변의 인연들,
하지만 그럼에도 앓는 소리 하나 낼 수 없었던 철혈이란 그녀의 처지.
철로 이루어졌기에, 그녀는 언제나 무감해야 했고, 무엇이든 막아내야 하는 방패가 되어야 했기에 완벽해야했다.
그 어떠한 창조차 막아내는 무적의 방패.
주인공과의 악연이 깊어지기 전 그녀를 칭했던 호칭이었으나, 나는 그 칭호가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신이 빚어낸 창을 막아내는 방패라 한들, 결국 충격을 받아내는 것은 그 방패이지 않은가.
아무리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과연 멀쩡하다 단언할 수 있을까?
켜켜히 쌓여가는 흠집이, 마음속에 쌓여가는 흉터가 그녀를 결국 무너트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최후는.
아까 방에서 보았던 그녀의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금의 그녀는 과연 괜찮은 걸까. 어쩌면 내가 빙의한 지금시점부터, 그녀의 말로는 이미 예견된 것이 아닐까.
입 안 부드러운 살이 씹혀 이내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상념이 흩어진 것은, 나를 바라보는 그 미묘한 시선 탓이었다.
자그마한 흠 하나 없이 깨끗한 사파이어를 닮은 그 눈동자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살짝 풀어져 있던 자세가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무언가 시키실 일이라도.”
로페나는 책을 미리 포장해두겠다며 자리를 비웠으니, 지금 이 곳에 있는 것은 아이린과 나 뿐 이었다.
어쩐지 그 사실에 숨이 턱 하고 막혀오는 것 같았지만, 나는 자세를 바로잡은 뒤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가씨?”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본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 아이린에게 입을 열자,
그녀는 그런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이내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가씨라.”
책을 본 채 입을 연 그녀의 눈썹이 잘게 떨렸다. 내가 혹여 말실수를 한 것일까.
그런 마음에 고개를 더욱 숙이자, 아이린은 아무런 말없이 그저 내 앞에 손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손?
잠시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들자, 내 눈 앞에 놓인 무언가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책...아닙니까?”
“아무래도 예절에 대해 더 배울 필요가 있는 것 같으니, 읽고 공부하세요. 호칭은 항상 유념해주시길.”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아가씨라 부른 것이 문제인가 보군.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책을 받아들자, 더 이상 이 곳에서 고를 책이 없는지 아이린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책이라, 나름 아이린 유리스라는 인물에 애착이 있던 터라이렇게 그녀에게 받은 책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예의범절에 대한 얘기를 하며 주었던 책이니, 아무래도 그와 비슷한 책이겠지.
{귀족에 대한 예의범절 30선}
“하.”
그렇게 책의 제목을 읽은 내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나중에 포장이라도 해둘까.
#
“...괜찮니?”
“아, 저는 괜찮아요. 조금 무겁긴 하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로페나 위에 쌓인 짐들을 보며 눈매를 좁히자, 로페나는 괜찮다며 내게 옅게 웃어보였다.
로페나와 만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아무래도 아이린의 호위를 하는 만큼 많이 붙어있던 탓에 꽤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의외로 나이도 나와 같았고, 로페나에게 아이린의 나이 또한 15살이라는 걸 알게 되기도 했다.
성격도 누구에 비하면 꽤나 좋은 편이었고, 이렇게 작은 체구에도 묵묵히 짐을 드는 것을 보면 싫어할 수가 있긴 할까.
호위라 하더라도 항상 모든 상황에 집중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인지라, 크리스 경과 교대를 할 때면 어슬렁거리며 로페나와 떠들곤 했다.
그러다가 크리스 경에 들켜 머리를 한 대 쥐어 맞긴 했지만, 로페나가 좋은 녀석임은 변함없으리라.
그런 로페나의 팔 위에 있는 짐을 잠시 안쓰럽다는 듯 바라봤다가, 이내 시선을 떼어 아이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아침부터, 이제는 어둑해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는 표정에 나는 속으로 감탄을 자아냈다.
서리를 머금은 것만 같은 차가운 인상, 곧게 뻗은 속눈썹이 때때로 깜빡일 때면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올 만큼이나 아름다운 그녀였지만.
오히려 그런 외모인 탓에 사람들이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다른 영애들에겐 잘도 붙어 호객행위를 하던 상인들마저 아이린을 볼 때면 주춤거리며 물러섰으니까.
물론 그런 상인들마저 무감한 얼굴로 쳐다보는 그녀였으나,
다만 나는 그녀가 그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낮에 보았던 그녀의 눈, 영애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속에 희미하게나마 담겨진 감정은 분명 동경이지 않던가.
생각해보면 그녀가 오늘 밖을 나와 산 것들은, 그 나이대의 영애라 보기 힘들 물품들뿐이었다.책과 필기구, 그런 것을 밖에 나와 사는 영애라.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도대체.
그 맑아 보이던 눈동자가 왜 이렇게 흐려 보이는지.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마치 심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의 겉면이 푸르지만, 그 속은 앞조차 볼 수 없을 만큼 탁하고 어두웠다.
아름다운 나머지 시선마저 미혹하는 그녀의 겉모습과 달리, 어쩌면 그 속은 심해와도 같이 어두울 거란 상상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동경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지 못했던 것을 해내는 이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하지만 그녀가 품은 동경은 같은 영애였다. 마치 자신은 그리 하지 않을 거라는 듯, 정확히는 하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에서 나는 공작을 비춰볼 수 있었다.
현 제국의 심장을 수호하는 방패. 철혈의 의지를 이은 자이자 검에서 극의를 이룬 자.
황제의 앞에서는 하나의 순한 개였지만, 자식에게는 엄한 늑대가 되는 자.
가롯 유리스.
아까 씹었던 살에서 비린 맛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 15살의 나이인 그녀가, 다른 모든 이가 부러워해도 모자랄 공작가의 장녀인 그녀가.
다른 영애에게 동경이란 감정을 품어야 하는가.
차라리 오만한 것이 나았다. 차라리 상식을 몰라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나았다.
그녀는, 그래도 될 나이였으니까.
한창 꿈을 꾸며 그 눈을 빛낼 나이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눈에 비춰지는 것은 오직 한없이 어두운 어둠뿐이라, 저도 모르게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컴컴한 그림자가 진 길을 홀로 걷는 그녀가 너무도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15살이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고독이라, 나는 일부러 그녀의 곁 가까이에 섰다.
내가 곁에 섰음에도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그녀를 힐끔 바라 보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즐거우셨습니까?”
한없이 가벼운 질문과는 달리 내 목소리는 꽤나 진중했기에, 그녀는 그런 나를 설핏 바라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것은 긍정의 뜻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말을 걸지 말라는, 일종의 축객령에 나는 실소를 흘렸다.
“...책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
“훌륭한 기사가 되려면, 그에 걸맞은 상식을 지녀야한다 들었습니다. 혹여 추천해주실 책이라도 있다면 감사히 새겨듣겠습니다.”
대답하는 이 없는 화담이 시작되었다.
이 세상에 온지 이제야 하루, 훌륭한 기사가 어떻게 되는 지 따위 하나도 몰랐지만 어찌 됐든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어둠 속에 조용히 파묻힐 것만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떠올랐다.
침묵이 이어지고, 다시 그 침묵이 침묵을 불러 일으켰다.
홀로 말을 주절거리는 나를 로페나는 이상한 듯 쳐다봤지만, 크리스 경은 그런 행동을 제지 하지 않은 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내가 하는 행동이,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는 듯이.
“에반.”
밤마저 얼어붙게 할 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한 어떠한 말에도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고, 내게 향하는 시선은 꽤나 싸늘했기에.
나는 그녀 앞에 고개를 숙였다. 사실, 이런 반응이 돌아올 것도 알고 있었다.
“훌륭한 기사가 되려면, 일단 상식부터 알기를 바라죠. 대화를 원치 않는 상대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 않는, 그 간단한 상식부터 말이에요.”
가슴 마디마디를 콕콕찌르는 신랄한 독설에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마 이 표정을 보이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겨우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온 뒤에 고개를 들자, 아이린은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하."
괜한 오지랖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째선지 후회는 되지 않았다.
상식이라, 그녀가 했던 말이 괜스레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비척거리며 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비록 욕도 먹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녀의 호위이지 않은가.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째를 내딛었을 때.
“......”
왠지 이 거리가 고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 오직 발걸음 소리만이 들려왔다. 저벅, 저벅.
그리고 이내, 그 발걸음 소리가 익숙치 않음을 깨닫는다. 아이린도, 나도, 크리스 경도, 로페나도 아닌.
철컥
그 미세한 소리를 깨달았는지 크리스 경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것을 본 나는, 언젠가부터 뛰고 있었다.
아이린, 제 호위 대상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발걸음은 다급했다. 한 번도 경험치 못한 감각이 몸에 넘실거렸다.
피가 뒤섞여 질척거리는 죽음의 비릿한 향, 넘실거리다 못해 이 어두운 거리를 뒤덮는 자욱한 살기에 피부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오싹한 감각이 다가옴에 허리춤에 들린 검을 쥔 손이 일순간 파르르, 떨렸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손이 아이린을 향해 나섰을 때, 내 몸이 마치 하나의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그림자를 가르고, 적막을 베어내며. 태어나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던 검이 찌르릉, 하며 울어댔다.
새로이 얻은 몸은 가벼웠고, 들린 검은 호쾌하게 나아갔다.
서걱
아이린의 앞으로 다가오는 암살자의 몸을 베어내자, 그 입에서 조용한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암살이라, 나는 지긋이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분명 제게 칼을 겨눔에도 여전히 무감했던, 되려 이런 상황이 질린 듯 보였던 그 푸른 눈을 떠올리며.
하얀 빛의 마나가검을 휘감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