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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5화 (5/181)

〈 5화 〉 아이린 유리스(5)

* * *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너무 빤히 바라본 탓일까, 불편하다는 듯 잘게 떨리는 눈썹을 본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방금 느낀 그 감정이 너무도 거슬리는 탓에, 나는 그녀에게 닿은 시선을 쉽사리 뗄 수 없었다.

섭섭하고 야속하여, 마음이 언짢다.

고깝다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를 떠올릴수록 그 의문은 더욱 커져만 가서, 나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네.”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들어 드리죠.”

의무실 한 구석에 있는 탁자에 앉은 그녀가 작게 손뼉을 두드리자, 문을 열고 로페나가 들어왔다.

“차 좀 가져와주세요. 호위가 아무래도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까.”

“네, 아가씨.”

아가씨인가.

로페나가 아이린을 부르는 호칭을 곱씹다가, 이내 내게 닿은 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피가 스며든 붕대를 보고 놀랐는지 토끼처럼 커진 로페나의 눈이 퍽 우스워 옅게 웃자,

걱정스런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천천히 등을 돌리곤 사라졌다.

아이린이 시킨 일이 있었으니, 아무래도 더 이상 말을 걸진 않은 거겠지.

그나저나,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사실 아이린에게 할 말이랄 것도 딱히 없는데 말이야.

그저 그녀가 그냥 사라져버리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두 눈이, 꽤나 섭섭했을 뿐이었으니까.

주르륵­

텅 빈 찻잔으로 흐르는 붉은 색의 차를 바라보면서도, 이윽고 차가 다 따라져 잔잔한 물결이 찻잔 안에서 부딪힐 때도.

그녀는 내가 할 말을 기다리는 것인지 그저 덤덤한 태도를 고수하였다.

차라리 먼저 물었으면 무어라도 대답했으련만, 야속하게도 차를 홀짝이기만 하는 그녀의 얼굴에 가슴속에서 탄식이 일었다.

그렇게 아이린과 내 사이에선 침묵만이 오갔고, 가끔씩 들려오는 소리라곤 그저 차를 홀짝이는 소리뿐.

어색한 분위기에 자연스레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그냥 보내드릴 것을, 갑작스레 차올랐던 충동에 그녀를 멈춰 세운 것을 후회하며, 나는 빈 찻잔을 입에 대곤 쓰게 웃었다.

탁,

찻잔을 접시에 내려놓자, 저 앞에서 푸른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제 슬슬 얘기하라는 듯 고요히 일렁이는 눈동자를 보니, 아까의 그 눈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제게 칼을 들이미는 암살자들 앞에서도, 약간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던 그 눈이.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아무리 죽음의 위기를 많이 겪었다한들 결국 두려워하는 것이 사람일진데,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거세된 듯 동요조차 하지 않던 그 모습은 결코 정상적이라 할 수 없을테니까.

그리고 아이린의 암살이라는 말을 듣고도 별 감흥이 없어보였던 이 저택의 사람들도.

심지어 로페나마저 암살자들을 보고 그리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으니, 혹여 그런 시도가 꽤나 많았던 것이 아닐까.

놀람이라는 감정마저 무뎌질 만큼이나.

향긋한 차향과 달리 씁쓸해지는 입을 매만지자,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기다려주는 것은 여기까지라는 듯,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담긴 가시가 귀를 찌르고 들어와 욱신거렸다.

“...도대체, 언제쯤 입을 열지 궁금하네요. 화를 나게 할 목적이었다면 훌륭히 성공하셨군요.”

한껏 싸늘해진 기운에 주변의 더위가 싹 가시는 듯 했다.

목덜미에 얼음을 가져다 댄 듯 전해져오는 오싹함에 어깨를 떨기도 잠시, 그런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궁금한 거라뇨?”

“...괜찮으신 겁니까.”

그저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이 저택에 들어와 혹시 누군가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물어는 봤을까 하는 마음에.

호위로써, 그녀가 혹여 다치지는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가벼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순간, 나를 응시하던 그녀의 눈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메두사의 눈과 마주친 사람처럼, 한순간에 딱딱히 굳어버린 그녀의 모습에 되려 황당한 것은 내 쪽이었으니.

내 표정에 놀람이 물들자, 순식간에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

언제나 한결 같을 거라 생각했던 그 표정에 균열이 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가면이 부서지고, 그 속에 드러난 적잖이 놀란 그녀의 얼굴에 순간 내 눈이 크게 뜨였다.

마치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녀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대답해주었으면 했는데. 그런 마음에 무어라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녀의 하염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에 입을 다물었다.

그 한마디가 그리도 놀라웠습니까. 괜찮냐는, 그 흔하디흔한 안부인사가.

그토록 놀랄 만한 말이었습니까.

차오르는 의문에 입술이 작게 벌려졌으나, 결국 튀어나온 말은 내 마음과는 달랐다.

“괜찮으시다면, 놀라지 않으셨다면. 다행입니다.”

저택에 들어온 뒤 누구도 그녀에게 건네지 않았던 말, 나가려 했던 그녀의 발걸음이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주전자를 들고 있던 로페나가 아이린의 얼굴을 보곤 이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탁­

여전히 입을 다문 그녀가 다시 돌아서는 일은 없었다. 그저 처음보다는 조금 빠른 발걸음으로, 그렇게 의무실을 빠져나갔을 뿐.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황급히 아이린을 따라 사라지는 로페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혹여 내가 말실수라도 한 걸까. 그런 걱정을 하며 들이쉬는 숨에는 아까의 다즐링 향이 그윽하게 묻어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빈 탁자, 차향이 아직까지도 맴도는 텅빈 찻잔을 무심히 들었다가, 이내 내리며 한숨을 내뱉는다.

“...하아.”

저를 향해 뒤돌았던 그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기에.

#

“아가씨.”

“...로페나. 물러가세요.”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저를 바라보던 그 초록색의 시선이 자꾸만 떠올라서, 들고 있는 서류마저 녹색으로 보였다.

걱정스레 쳐다보는 로페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휘저으며 나가라 명하였다.

이 방에 있는 것은 오직 자신 하나 뿐. 그 것을 깨달았을 때, 언제나 무감했던 표정이 천천히 깨지기 시작했다.

꽈직,

들고 있던 서류를 무심코 움켜쥐며, 차오르는 무거운 숨을 토하듯 내뱉는다.

가슴 속에 응어리진 답답함이 숨 쉬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아서, 가느다란 손을 들어 가슴을 두드렸다.

에반 프리드.

처음 보았을 때부터 자신을 바라보던 그 시선이 쉽사리 잊히질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아는 것 마냥 저를 동정하던 그 눈.

어찌하여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본단 말인가.

“...하아.”

텅 빈 방, 허공을 가득 메운 공허 속을 한숨이 파고들었다.

속에 담겨져 있던 감정이 너무 자욱하여, 순간 눈앞이 흐려지는 것만 같은 느낌에 눈을 비볐다.

­괜찮으십니까.

자신을 걱정하는 그 한마디가 왜 이리 아프게 느껴지는지.

분명히 상투적인 말이고, 그저 안부를 묻는 하나의 표현에 지나지 않을 터인데.

귓가에 들리는 그 소리는 저에게 화살이었다. 그것도 화살촉에 독이 묻은 화살.

마치 몸에 독이 들어온 것처럼 무거웠다.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그 증거였고, 이내 달뜬 숨을 내뱉곤 소파에 몸을 묻었다.

푹신한 솜이 몸을 감싸고, 이내 쿠션의 부드러움에 머리를 기대었다.

­괜찮으시다면, 놀라지 않으셨다면. 다행입니다.

쿠션으로 막은 귀를 파고드는 그 목소리에 다시금 몸이 움찔거렸다.

아무리 손으로 귀를 막아도 그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도대체, 도대체 어째서.

어차피 곧 있으면 바뀔 호위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곁에 있는 이들은 언제나 그랬으니까.

또 암살자를 마주칠 것이고, 또 검에 맞아 상처를 입을 것이고. 그렇게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이었다.

하여 정을 주지 않았다. 언제나 냉정히, 자신은 차기 방패였고, 유리스의 장녀였으며, 또한 만인의 위에 우뚝 설 귀족의 수장이 될 이였으니까.

어렸을 적부터 귀가 닳을 만큼이나 들어왔던 ‘완벽’이란 것을 자신은 꽤나 잘 해내왔지 않던가.

그러니까 이번에도.

이번에도 똑같이 대하면 될 터인데.

­책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훌륭한 기사가 되려면, 그에 걸맞은 상식을 지녀야한다 들었습니다. 혹여 추천해주실 책이라도 있다면 감사히 새겨듣겠습니다.

자꾸만 제게 문을 두드리는 그 모습이 아른거려서, 자신의 외로움을 깨닫고는 그 옆에 있으려하는 그 행동이 너무도 거슬려서.

손으로 가린 입 사이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자신을 볼 때면 흔들리던 눈을 어찌 보지 못했겠는가.

자신에게 다가와 저 혼자 주절거리던 이의 의도를 어찌 눈치 채지 못했겠는가. 단지 무시했을 뿐이었다.

잠시 그러다가 이내 포기하겠지. 일부러 차갑게 대하고, 일부러 신랄한 말을 내뱉으면 알아서 포기할 거라 생각했다.

상처를 보고도 말하지 않았음은 그런 이유였다.

나중에 상처를 보고 나를 욕하기를. 그렇게 제게 쏟은 관심을 멀리하고 싶었거늘.

어두운 밤, 복도를 거닐다 의무실 문틈 새로 흘러나온 빛을 발견한 자신의 실수였다.

차라리 보지 않았다면, 그렇게 무시하고 지나갔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그렇게 악담을 듣고도 에반이 내뱉은 말이란, 내게는 독처럼 느껴졌다.

너무도 달콤해서 다가가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독.

그 향에 잠시나마 미혹되어 무심코 손을 내밀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신은 돌아섰다.

이 무정한 저택에서 누구도 제게 말해주지 않는 말을 해준 이가 내민 동아줄을 쳐내고, 그렇게 돌아섰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았다. 무섭고, 무서워서. 그 공포마저 잊을 만큼이나 놀랐을 뿐이었다.

놀라는 티를 낸다면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타박과 완벽을 기하라는 훈계였으니.

그저 아무렇지 않은 듯 연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얼굴에 씌워진 가면에 균열이 일지 않도록, 자신은 미소를 잊었다.

자신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깨져나가 부서진 가면의 파편만이 남은 얼굴은 흉측하리라.

투명한 창에 비친 모습을 보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뺨에 붙은 젖은 머리칼에,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이 일그러진 그 얼굴 속에서도 제멋대로 빛이 나는 푸른 눈동자가 원망스러웠다.

왜 자신은 유리스의 장녀인 걸까.

왜 자신은 남들에게 방패라 불려야 하는 걸까.

나를, 차기 방패가 아닌 아이린 유리스로 바라보는 이는 정녕 없는 것일까.

씁쓸히 웃던 에반의 얼굴이 문득 떠오르다 이내 허공에서 부서졌다.

그 모진 말을 듣고도 제게 한 말은 그저 걱정이 담긴 말 뿐이라, 가슴 속에 사무치는 죄책감에 꽉 쥔 주먹이 하얗게 물들었다.

“...제발.”

내게 다가오지 말아줘요.

아무도 듣지 못할 속삭임이 허공에 퍼진다.

닿지 못할 목소리가 창문에 부딪혀 사그라들고, 다시 찾아오는 적막이 유난히도 고요했다.

네글리제의 옷깃을 움켜쥔 손에서 힘이 풀리며, 다시 쓰러지듯 소파에 몸을 뉘인다.

에반 프리드, 잠시 그 이름을 곱씹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피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그렇게 다시 가면을 꺼내 쓴다.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듯 다시금 표정에 무감함이 자리 잡으며, 푸른 눈동자만이 형형하게 허공에서 빛을 내었다.

아버지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무심히 허공을 스친다.

잠깐의 달콤함에 취하려 했던 저를 책망하며, 다시금 불을 켜 서류를 들여다본다.

이미 자신의 가슴 속에서 뿌리 깊이 스며든, 그 독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 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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