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다과회(1)
* * *
시간은 유수처럼 흐른다. 눈 깜빡할 새, 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릴 만큼.
내가 공작가에 적응하는 사이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사라졌다.
내 신분에 대해 보다 잘 알게 된 시간이 되기도 했고, 시녀 몇몇과 친분을 쌓게 된 시간이기도 했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린이 나를 껄끄럽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점일까.
“어깨는 좀 괜찮으세요?”
주르륵
언제 왔는지 조용히 다가와 차를 따르는 로페나를 바라보았다.
나름 기사의 몸에 익숙해졌음에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다니.
아무래도 책에 너무 집중한 탓일까. 잠시 뺨을 긁적이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이제는 다 나았어.”
애초에 기사가 가진 육체란 워낙에 강건했기에, 마나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얕은 상처즈음은 하루이틀이면 흉터도 없이 사라졌다.
이 세상의 약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이유가 이런 점일까.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이였으면 얕은 상처즈음은 순식간에 회복시킬 수 있으니까.
잠시 붕대가 감겨있었던 자리를 바라보던 로페나는 주전자를 들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앉자마자 쏜살같이 내 앞에 놓인 쿠키 접시를 당기는 것이, 어지간히도 간식이 먹고 싶었나 싶어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먹어도 되죠?”
“나 단 거 별로 안 좋아해. 먹어.”
그나저나 왜 자꾸 내게 존댓말을 하는 건지.
나이도 같은 데다, 다른 시녀들이 내게 말을 편히 하는 걸 보면 로페나도 슬슬 말을 편히 할 때가 되지 않았던가.
다람쥐처럼 볼 가득히 쿠키를 집어넣은 로페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끔뻑이며 시선을 돌렸다.
뭐, 나중에 어련히 말을 놓겠지.
손에 놓여있는 책을 다시 살피자, 금세 책의 내용에 집중이 되는 것이 퍽 신기했다.
애초에 이 세계의 글씨를 바로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 이상하긴 했지만.
최근 들어 책을 읽는 것이 꽤 재밌게 느껴졌다.
그래, 그 훈련보다는 훨씬 나을테니.
호위 기사로 임명받긴 했으나 아직 견습 딱지를 떼지 못한 터라, 크리스 경은 꼭두새벽부터 나에게 훈련을 강요했다.
원래도 매일 같이 이런 훈련을 했으면서 무얼 그리 놀라냐는 얼굴이 떠올라 괜스레 눈살이 찌푸려졌다.
군대에서 했던 훈련들은 내가 여기서 하는 훈련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툭하면 저를 죽이려 달려드는 칼날을 피하는 훈련이란. 훈련이 아닌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었으니.
처음에는 그냥 다 때려치고 공작저를 도망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도망갈 자신이 없어 포기하긴 했지만.
그리고 하나 더 걸리는 점이 있다면, 당연하게도 아이린 유리스였다.
이 공작저의 사람들이 은연중에 그녀에게 보내는 기대감. 만약 내가 여기서 나간다 하면, 오히려 비난 받는 것은 그녀이리라.
제 호위하나 챙기지 못하는 이.
그녀가 비난 받을 생각을 할 때마다저번에 보았던 그 일그러진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 같아서,
그냥 참고 훈련을 받는 것이 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괜찮냐는 그 한 마디에 무너지는 사람이라니, 도대체 어떤 말을 듣고 자라 왔기에.
생각해보면 아이린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그녀의 최후와 소설에 나왔던 그녀의 과거 정도일까.
막연하게 그저 불쌍하다는 생각에 동정했건만, 실상 이렇게 접하는 그녀의 생활은 그야말로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였다.
저번에 서점에 들려 샀던 책들과 논문은 그녀의 과제였으니, 매일매일 그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습에 보는 이가 질릴 정도였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차기 방패로써 지녀야 할 무력을 위해 크리스 경에게 검을 배우기도 했으니까.
그녀의 하루는 여명에 시작하여 다시 여명에 끝날 만큼 빡빡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 걸까.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하기에, 그런 일정을 버텨낼 수 있는 걸까.
내 몸은 비록 15살이었지만 정신은 25살이었으니, 나이가 어림에도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에 절로 감탄이 일었다.
“잘 먹었어요. 근데, 무슨 책을 그렇게 읽으세요?”
쿠키를 다 먹었는지, 로페나가 입가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내게 물어왔다.
최근에 내가 책을 살 일이라곤 단 한 번이었으니까, 당연하게도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아이린이 주었던 책이었다.
“귀족...에 대한 예의범절 30선?”
내가 왜 이런 책을 읽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로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는 차를 한 번 홀짝인 뒤 입을 열었다.
“나보고 상식이 부족하다네.”
“...아가씨가요?”
“응, 나는 아가씨라 부르면 안 되나 봐. 내가 영 맘에 안 드나 보지.”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하자, 로페나가 쿡쿡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비웃기라도 하는 건가, 힐끗 로페나를 흘겨보니 이내 비웃는 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해명하기 시작했다.
“비, 비웃는 게 아니에요.”
“그러시겠지.”
“진짜 아니라니까요? 제 팔찌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로페나는 자신의 손목에 걸린 보랏빛의 구슬들이 꿰인 팔찌를 흔들며 말했다.
아이린이 준 팔찌라 했던가. 누군가에게 저런 것을 선물하는 그녀가 쉽사리 상상되지 않긴 했지만, 로페나는 그것을 제 목숨처럼 여겼다.
그런 것을 걸고 말한다면 최소한 거짓말은 아니겠지.
내가 더 말해보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로페나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은 조금 달랐거든요. 아가씨가 기사님을 맘에 들지 않는다 생각하시죠?”
그 말에 나는 며칠 전, 아이린이 나를 불렀을 때를 떠올렸다.
갑작스런 호출에 의아해하기도 잠시, 무슨 일이냐는 말에 그녀는 괜스레 짜증을 내며 나를 흘겨보지 않았던가.
‘무슨 일이십니까.’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그대를 부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태만하다 생각하진 않나요?’
그 차가운 눈빛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한겨울의 냉혹함과도 같아서, 그녀와 함께 있는 내내 싸늘한 눈초리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그저 불렀기에 갔을 뿐인데 왜 짜증을 내는 건지.
그 표정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으나, 분명 말투는 짜증이 다분히 묻어있었다.
그때의 기억에 눈살을 찌푸리며, 동시에 입에서 퉁명스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분명 날 싫어해.”
“...음, 분명 겉으로는 조금 심하게 대하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정말 맘에 안 들었으면 벌써 자르고도 남았을 테니까요. 지금까지 호위기사 노릇을 하고 있는 걸 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 괜찮다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요?”
“전에는 맘에 안 들면 막 해고하고 그랬어?”
“그랬죠. 그런 걸 보면 의외로 아가씨는 기사님을 마음에 들어 한다니까요.”
로페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살얼음판에 서있었던 건가. 나조차도 몰랐던 내 처지에 순간 오스스, 하고 소름이 돋았다.
내게 짜증을 그토록 부리던 행동이 어쩌면 나를 시험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일주일 동안 꽤나 잘 해왔던 걸까.
문득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여기서 해고를 당한다면 앞길이 막막하지 않은가.
당장 이 세상에 대해서 얼마 알지도 못했고, 할 줄 아는 거라곤 이 몸이 타고난 칼질뿐이었으니까.
어쩌면 공작저에서 쫓겨나 용병일을 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것은 어디까지나 생각에 그칠 따름이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릴 때면 아른 거리는 얼굴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날 밤, 호위기사가 된 첫 날 그 어둠 속에서 부서지던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눈앞에 아른거렸다.
잡지 못했던 그녀의 뒷모습. 아이린의 표정을 보고 놀라 눈을 홉떴던 로페나까지.
그녀의 호위기사이기 이전에 아이린 유리스라는 악녀를 동정했던 하나의 독자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어라 욕을 한들, 결국 그녀가 맞이할 처참한 결말을 떠올릴 때면 여전히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녀가 죽은 나이 21살, 한창 꽃을 피우며 제 향을 자랑할 나이였건만.
그 꽃이 꺾여 차디찬 쇳날 아래에서 잘려나갔다는 사실이 가슴을 죄여왔다.
결국 공작저에서 벗어나 어딘가를 떠돈다하더라도 결국 나는 아이린 유리스라는 여인을 기억할 터였다.
그녀의 죽음을 처음 글로 보았던 그날 밤, 자신을 이 소설 속 세상으로 보냈던 그 운명적인 밤.
그때 흘렸던 눈물이 떠올라 눈가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조용히 책을 덮었다.
그녀의 마지막을 떠올리자 또다시 치솟는 감정 탓에 책을 계속 읽기엔 무리일 성 싶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그냥.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싶어서.”
“평소처럼 하세요. 아가씨는 눈치가 빠른 편이라, 태도가 달라지면 금방 알아채거든요.”
이런, 그런 부분에서는 또 까다롭기까지 하군.
잠시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으나, 텅 빈 찻잔을 보곤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쭉 앉아있기만 하면 크리스 경이 귀신 같이 찾아와 훈련장으로 끌고 갈테니.
“치우는 거 도와줄까?”
“아니에요, 이런 건 제가 치우면 되는 걸요.”
“그럼 먼저 갈게. 혹시 아가...아니, 소가주님이 부르면 알려주고.”
“네, 들어가세요!”
해맑게 웃는 로페나를 뒤로 하고, 나는 곧장 내 방으로 향했다.
며칠 전 방 서랍에서 찾은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빙의한 당일에는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간 탓에 생각할 시간이 없었지만,
역시 이 빙의라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닐까.
에반 프리드, 소설 속에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프리드 백작가라는 존재가 영 거슬렸기에 내가 누워있던 방을 샅샅이 뒤졌을 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었다.
[너를 사랑하는 아서 프리드가.]
꽤나 서툰 글씨체로 적혀진 글씨는, 그것이 편지라는 것을 쉬이 짐작하게 했다.
아서 프리드라면 내 아버지라도 되는 걸까.
태어나 한 번도 아버지라는 존재를 본 적이 없었기에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이내 종이를 보곤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엄청 오래된 것 같은데.”
누렇게 변색되어버린 종이는 아무리 보아도 퍽 오래되어 보였다.
분명히 이전에는 꽤 고급졌을 종이는 이곳저곳이 얼룩지고 누렇게 떠서, 못해도 몇 년 동안은 구석에서 썩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것 말고 다른 편지는 없었으니 아마 이게 마지막으로 온 편지겠지.
이 편지는 어째서 이렇게 됐을까.
제 아버지께 온 마지막 편지가 이렇게 오래된 것은, 아마도 아버지를 그리 중요치 않게 여기는 불효자였기에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버지가, 편지를 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이겠지.”
괜스레 입에 쓴 맛이 감돌았다.
가족 중 한 사람의 죽음, ‘너를 사랑하는’이라는 글귀에서 보이듯 부자간의 사이가 꽤나 좋아보였기에 편지지를 움켜쥔 손이 살짝 떨려왔다.
부디, 내가 생각하는 그런 나쁜 일은 없었기를.
그렇게 속으로 잠시 기도하다가, 이내 편지지를 덮고 있던 포장을 살짝 열었다.
내용을 살핀다면 뭐라도 알 수 있겠지. 그렇게 편지를 꺼냈을 때, 나는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복도에 울려 퍼지는 무거운 발걸음, 아마 이 공작저에서 이런 울림을 만드는 이는 한 사람 밖에 없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이 편지를 다시 서랍에 넣고 등을 돌리자 타이밍 좋게도 크리스 경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에반, 아가씨의 호출이다. 아마 외출 준비를 해야 할테니, 빠르게 준비를 마치도록.”
“책이라도 사러가는 겁니까?”
로페나의 말로는 일주일마다 서점에 간다했나, 내가 그리 묻자 크리스 경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오늘은 이 공작저에서 열리는 다과회에 아가씨께서 참석하실 예정이다. 이번에는 내가 갈 수 없으니, 네가 따라가야겠지.”
“알겠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검을 집으며 대답하자, 크리스 경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곤 그 무거운 발걸음과 함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편지의 내용이 궁금하긴 했지만, 아까 로페나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곧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아마도 나를 시험하고 있을 터, 만약 준비가 늦어진다면 내게 또 그 차가운 시선을 보낼 게 분명했으니까.
저를 바라보던 그 푸르고도 시린 눈동자를 떠올리는 내 얼굴은,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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