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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6화 (16/181)

〈 16화 〉 축제(6)

* * *

하늘을 물들였던 불꽃이 사그라든다.

다채로웠던 색들이 찬란했던 하늘을 다시금 그림자가 뒤덮고,

그림자의 틈새를 뚫고 새어나오는 별빛들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법이 있는 세계의 불꽃놀이는 내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웠기에,

아까 보았던 그 화려한 불꽃들이 눈에 아른 거려 쉽사리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그 감은 눈의 어둠에 그 불꽃이 다시 보이지 않을까 싶을 만큼 단단히 내 마음을 빼앗은 장면이었다.

허나 그런 화려함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꽤 커다란 허전함이라서.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이내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아이린에게 축제에 나가자 한 것이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그저 가슴 속에 쌓여있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잠시나마 마음 편히 있으면 하는 마음에 부추긴 것이었는데.

이 곳에 온 뒤 아이린의 표정에 훤히 드러난 것은 분명 그림자였으니까.

그녀는 빛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다.

해가 떠오르면 그녀는 그 반대편에 서있는 것만 같이, 언제나 자신을 어두움 아래에 두려했다. 저 밝음과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말도,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는 아이린을 바라보며 알게 된 것은 그녀가 주변 사람들이 웃을 때마다 눈살을 찌푸린다는 것이었다.

싫거나, 짜증이 나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이 불편한 듯, 마치 물을 만난 기름처럼 본능적으로 꺼려하고 있을 뿐.

그 표정이 어째서 나오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아서, 나는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었다.

나마저 눈살을 찌푸린다면 이 우중충한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을 것이 두려워 웃었을 뿐이었다.

한 차례 숨을 크게 들이쉬자, 선선한 바람이 코를 타고 들어와 이내 폐에 가득 들어찼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답답함에 무거운 숨을 토해내자, 아이린이 나를 힐끔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요.”

누구 덕분에 마음이 조금 불편해서요. 허나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나는 애써 미소를 띤 채 어깨를 으쓱였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그냥, 더 좋은 날에. 더 좋은 분위기를 가지고 더 좋은 기억을 가지고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겐 아쉽게만 느껴졌다. 아이린이 이 축제를 그저 즐길 거라고만 생각했던 자신의 잘못일까.

아니면 이 즐거움의 온상 속에서 부정적인 것만을 보았던 그녀의 잘못일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품는 감정이란 한 줄기의 아쉬움이었다.

5년에 한 번, 아마 이 일주일 동안 볼 수 있는 마지막 불꽃을 이토록 허무히 보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아쉬움.

고개를 털며 쓰게 웃자, 그런 나를 멍하니 바라본 아이린이 시선을 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또 기회가 있을 지 모르겠네요."

“네?”

“다음에 축제가 열릴 때, 다시 오자는 얘기에요."

갑작스레 말한 그녀의 저의를 알 수가 없어서, 내가 멍하니 그 푸른 눈을 응시하자 아이린이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 그때도 에반이 있다면, 지금처럼 복잡한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리도 비우고, 길가에서 파는 꼬치도 사서 먹고.”

“...네.”

“그냥 그렇게 나와서, 가볍게 즐기죠.”

하늘을 바라보던 아이린은 이내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꽤나 후련해 보이는 그 얼굴에 놀라기도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표정 좀 풀어요. 누가 보면 실연이라도 한 사람 같잖아요.”

“...제 표정이 그렇게 안 좋습니까?”

“네, 무척이나요.”

나름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비틀린 입꼬리는 사실 웃는 것이 아닌, 꽤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나 보다.

입가를 매만지며 옅게 한숨을 내뱉는다.

그녀의 심정이 갑작스레 바뀐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괜찮아졌으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

창백한 얼굴에는 더 이상 그늘이 끼어있지 않았다.

근심도, 걱정도 남지 않은 그 얼굴은 이전보다 퍽 괜찮아보여서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아까 불꽃놀이 보셨습니까?”

“봤어요. 녹색 빛이 퍼지는 게 꽤 아름답더군요.”

“...녹색 불꽃이 있었습니까?”

내 기억에 그런 폭죽은 없었는데. 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묻자, 아이린은 그저 아무 말도 없이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저 착각이라도 한 거겠지. 심란했을 테니, 하늘에 떠 있는 불꽃의 색을 착각한 것일지도 모르리라.

거울에 비치던 내 녹안이 갑작스레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불꽃 대신 별들이 자리 잡은 하늘은, 그럼에도 퍽 아름다워 보였다.

#

“아가씨, 어디 계셨던 겁니까?”

한 손에 꼬치를 든 채, 등에 잠든 로페나를 업고 있는 크리스 경이 우리 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로페나는 축제를 아주 제대로 즐겼던 걸까, 그 넓은 어깨에 매달린 채 잘도 자는 모습은 꼭 아기 곰을 보는 것만 같았다.

“에반이랑 같이, 그냥 이곳저곳 돌아다녀 봤어요.”

“...말씀이라도 해주고 가셨으면 합니다. 아무리 에반이 있어도 녀석은 정식 호위 기사가 아니잖습니까.”

“유념하죠.”

전혀 유념하지 않을 것 같은 표정에 한숨을 내쉰 크리스 경은 나를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안 그래도 무서운 얼굴인데, 요즘 들어 나를 볼 때마다 저러니.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그는 제 어깨에 매달려 있는 로페나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업어라.”

“...네.”

로페나는 체구가 작은 탓인지 꽤 가벼운 편이었다.

업었음에도 별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맨날 그렇게 단 걸 먹으면서 그 살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겠다.

“괜찮나요? 그렇게 로페나를 업고 움직여도.”

“가벼워서 괜찮습니다. 다행히 로페나가 가벼운 편이라서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아이린은, 이내 고개를 돌리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사람들도 서서히 집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고, 하늘에 피어오른 연기를 치우고자 몇몇이 천을 흔들며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는 공작저로 돌아가야겠지.

공작저란 생각에 그녀 책상 위에 올라가 있던 그 서류뭉치가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내가 그 것을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오늘은 그녀가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긴 했다.

무엇을 보지도 않고 온종일 시가지를 돌아다녔으니,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보여도 쌓인 피곤 탓에 나중에는 꽤나 노곤할 테니까.

또 무리하게 서류를 보다 쓰러지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오늘은 일찍 주무시고, 하던 일은 내일 아침에 처리하시죠.”

하여 내가 말하자, 아이린은 잠시 나를 힐끔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참 쉽게도 말하네요. 그걸 처리하는 건 나인데.”

“...또 쓰러지실까 봐 말씀드리는 겁니다. 책상에서 주무시다간 자칫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담요도 덮어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덧붙이자, 아이린은 이내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다시 휙 돌렸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건지, 아무리 내 호위 대상이지만 참 까다로운 여자가 아니던가.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등에 업혀있던 로페나가 앓는 소리를 내며 등에 볼을 부벼댔다.

잠꼬대라도 하는 걸까. 등에 닿는 그 말랑한 감촉에 피식 웃자, 그 소리를 들었는지 로페나가 무어라 중얼거리며 어깨를 잡은 손을 움찔거렸다.

로페나는 나름 축제를 즐겼을까. 크리스 경의 한 손에는 아직도 꼬치가 있는 걸 보아 하니 아마 로페나의 투정을 다 들어준 것이리라.

험상궂게 생긴 것과는 달리 마음이 따듯한 편이라서, 크리스 경이 로페나를 대하는 모습은 꼭 자신의 딸을 대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잠시 나를 바라본 크리스 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무엇을 그리 빤히 보느냐?”

“그냥, 축제에서 뭐 하셨는지 궁금해서요.”

“뭘 하기는. 로페나가 자꾸 뭘 먹고 싶다 칭얼거리는 바람에 괜히 돈만 썼지.”

맘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잔뜩 일그러트린 그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정말 싫었으면 돈도 안 썼겠지. 나한테는 박하게 대하면서, 이상하게 로페나한테는 유하단 말이야.

내가 웃자, 그런 모습이 영 보기 싫었는지 크리스 경이 나를 사납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또 나한테 화풀이를 하는 것 같은데. 허나 그 성난 시선도 잠깐이었는지, 헛웃음을 지은 크리스 경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찌르르­

이윽고 고요함이 사방에 퍼진다. 현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중세의 고요.

높은 건물도, 별을 가리는 네온사인도 없는 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매연도 없고,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연초의 향도 나지 않았다.

숲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의 향은 풀 향이었고, 이따금 흐릿하게 섞인 비린내가 저 산에 강이 있음을 알려주곤 했다.

벌레가 찌르르 우는 소리, 바람이 풀에 스쳐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땅을 밟을 때마다 들려오는 그 자갈 밟는 소리엔 묘한 운율감이 있어서,고요함 사이로 전해지는 백색의 소음에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만 같았다.

축제의 소란스러움도 물론 좋았지만, 이런 적막함도 나쁘진 않으리라.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는 바람을 느끼며 걷기도 잠시, 저 멀리서 거대한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색으로 칠해진, 아마도 이 주변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울 저택.

이윽고 정문에 다다르자 보인 것은 경비대장이라,

이전에 겪었던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나는 로페나를 크리스 경에게 다시 맡긴 채 아이린을 따라갔다.

내가 자신의 곁에 있음을 알아차린 것일까, 그녀의 곁에 거의 다가갔을 때쯤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피곤하지 않나요?”

피곤하냐니,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몰랐지만 이내 고개를 젓자 아이린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자신의 방문 앞에 멈춰선 채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가씨?”

혹시 무엇을 잊은 걸까. 하지만 그녀가 따로 챙겨간 것은 없었으니, 아마 그런 이유는 아닐 텐데.

아이린을 걱정스레 바라보자, 이내 그녀가 내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들어가서 쉬도록 하세요.”

“네?”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아이린은 못마땅한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손으로 이마를 쓸어내리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 고생했어요."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잠시 일렁이더니, 질끈 감긴 두 눈 사이로 숨어버린다.

마치 부끄러워하기라도 하듯이.

"대답도 안 해주는 사람한테 계속 말 걸어주느라, 이곳저곳 걸어다니는 나를 신경쓰느라, 고생했다는 말이에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다녔는지 알고 있었던 건가.

한편으로는 내가 그랬음을 알아주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져서, 나는 그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똑바로 내 시선을 마주할 때까지.

이윽고 감겨진 눈이 서서히 뜨이며, 이제는 떨리지 않는 푸른 눈동자가 내 눈과 마주하였다.

"저는 괜찮­"

내가 입을 열자 아이린이 단호히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내가 안 괜찮아요. 괜히 사람 신경쓰이게 하지 말고 이제 좀 쉬도록 해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이내 다시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곤 문을 향해 등을 돌렸다.

자신이 할 말은 여기서 끝났다는 듯 완전히 변해버린 태도에 벙쪄있기도 잠시,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이내 나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가봐도 돼요. 곧 있으면 로페나가 올 테니."

쿵­

그리고 문이 닫힌다. 내가 무어라 하는 말도 듣지 않은 채, 참으로 매정하게도 닫혀버린 문을 나는 그저 황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따금 지나가는 시녀가 나를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시선이 꽤나 따가웠다.

이러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건지. 이대로 다시 돌아가기엔 아이린이 마음에 걸렸다.

혹여 그 서류를 계속 들여다 보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다가 또 쓰러지듯 잠들지는 않을까.

문득 피어오르는 걱정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결국 나는 닫힌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그리고 잠시 후, 문 너머에서 아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일찍 잘 거에요. 그러니 맘 놓고 쉬어요."

그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답답했던 속이 조금이나마 풀려서, 이젠 조금 편히 숨을 쉴수 있을 것만 같았다.

허나 그 방 문 앞에 서있는 자신의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기에, 쓰게 웃으며 그녀가 있을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괜히 사람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이제 좀 쉬도록 해요."

그녀가 말했던, 괜히 신경쓰게 하지 말라는 말이 묘하게 귓가에 아른거렸다.

왜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일까. 처음에는 모질게 굴던 그녀의 태도가 유순해진 탓에?

아니면, 아이린이 나에 대해 신경쓴다는 그 말이 그저 순수하게 기뻤던 탓에?

아마 별 의미가 없었을 말일 게 분명한데도, 어째선지 자꾸만 그 나른한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주변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내가 왜 이러는 지 모르겠네.

얼굴을 마른 손으로 한 차례 쓸어내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피곤해서 그런 것이리라.

한숨 자고나면, 금방 잊어버릴 감정일 터였다.

분명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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