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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8화 (18/181)

〈 18화 〉 수정궁 아래에서(2)

* * *

“...왜 하필 접니까?”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이었다.

황태자가 여는 무도회, 그 자리에 그녀와 함께할 영예를 얻는 사람이 어째서 나란 말인가.

처음 로페나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녀가 자신의 약혼자와 함께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란, 내가 그녀의 파트너가 되어 달라는 말이었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필이라.”

그녀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옅게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혹여 싫은 건가요."

"싫은 것이 아니라, 이미 약혼자가 계시지 않습니까."

당황으로 얼룩진 얼굴을 숨기고자 고개를 숙여보였다. 어찌하여 자신일까.

보통 그런 자리에는 약혼자와 함께하는 것이 맞지 않던가.

허나 그녀는 내게 그런 제안을 했으니,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약혼자는 약혼자일 뿐이에요. 늘 함께할 동반자가 아니라."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는 순간 몸이 움찔거릴 만큼이나 서늘했다.

방금까지 썩 괜찮아보였던 그녀의 표정에 그늘이 지고, 나를 바라보는 그 눈에 한기가 담겼다.

내가 혹시 말 실수라도 한 것일까.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실수한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약혼자라는 단어가 문제겠지.

그녀의 대한 건 기껏해야 소설에 나왔던 서술 몇 가지가 전부였기에, 약혼자와의 사이가 어떠한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어렸을 때 약혼을 맺었던 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델 로만, 그의 약혼자는 못난 점이랄 것이 없었다.

외모 또한 준수 했으며 검이란 영역에서 그의 재능은 출중하다 알려져 있었으니, 게다가 어렸을 적부터 약혼한 사이가 아니던가.

소설에서 아이린과 그의 관계가 나오진 않았으나, 적어도 어렸을 때부터 봤으니 사이가 괜찮을 거라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았다.

약혼자라는 단어에 아이린의 시선이 싸늘해진 걸 보아, 아마그다지 좋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정말로, 내가 그녀와 함께 해도 괜찮은 것일까. 조심스레 묻자 그녀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이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이번에는 그저 가벼운 자리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말도록 하세요.”

아무렇지 않은 듯 선선히 대답하는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미약하게 피어오른 걱정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았다.

정말로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무도회의 파트너야 물론 그녀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었지만, 내가 그런 역할을 맡아도 되는 건지.

내게 점점 멀어지는 아이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

“아가씨, 로만에서 편지가...”

“나중에 읽죠.”

보나마나 그 사람에게 온 편지겠지. 그 편지를 구태여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진 않았다.

늘 같은 내용에 더해진 것은 이번 무도회에 같이 가자는 얘기일 테니, 이내 찻잔을 들며 편지에 놓인 시선을 돌렸다.

파르르­

찻잔을 쥔 손이 살짝 떨려왔다.

아까 자신의 호위 기사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자, 문득 피어오르는 감정에 괜스레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 했다.

그저 무도회의 파트너를 부탁했을 뿐이었다. 늘 하던, 지금껏 몇 번이나 누군가에 제안했던 말일 뿐인데.

어찌하여 이토록 떨리는 것인지.

무도회에 함께 가자는 그 한 마디의 말이 이토록 내뱉기 힘든 말이었나.

허공에 손을 움켜쥐었다 이내 펴면서, 방금 보았던 에반의 당황한 표정을 떠올린다.

자신이 들은 말이 정말 사실인지 의심하는 듯 크게 뜬 두 눈이란 퍽 우스운 모습이 아니던가.

...이번 일은, 분명 자신의 충동적인 결정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행사면 언제나 엮이는 제 약혼자를 잠시나마 피하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그 때문에 제 호위 기사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었으니까.

혹여 에반이 부담스럽게 생각하진 않았을까.

문득 후회가 피어올랐으나, 애써 고개를 저으며 그 감정을 털어냈다.

그다지 중요한 자리도 아닐뿐더러, 모든 자리에 제 약혼자와 함께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번 무도회는, 그저 조금이나마 편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하.”

이윽고, 방금 자신이 생각한 것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언제부터. 자신은 에반을 그토록 편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던 걸까.

어렸을 적부터 보았던 제 약혼자보다도, 심지어 자신이 알고 있던 몇몇 가문의 자제보다도 그가 더 편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퍽 우스웠다.

밀어낼수록 다가오는 그 존재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같이 있으면 편안한 감정을 느끼곤 했으니까.

축제에서 보았던, 오직 자신만이 보았던 그 녹색의 불꽃도 그런 마음에서 나온 것일까.

그래, 차라리 그가 나았다. 자신의 약혼자보다는 훨씬.

로만이라는 가문에 속한 약혼자를 떠올리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특별히 모난 곳은 없으나, 괜스레 꺼려지는 것은 그 알 수 없는 속내 탓이겠지.

늘 제게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 속은 꼭 먹을 칠한 듯 새까맣게 보여서. 자신은 항상 그를 볼 때면 거리를 두곤 했다.

어쩌면 약혼자와 에반의 차이는 천성의 차이일지도 몰랐다.

그가 짓는 미소가 거짓된 미소라면, 에반이 짓는 웃음은 늘 마음이 우러져 나오는 편안한 미소였으니까.

­전 아가씨 한 사람만 신경 쓰기도 벅차니까요.

문득 떠오른 말에 찻잔을 쥔 손이 흠칫, 하고 떨린다.

그 말을 들은 순간이란, 나름 무감하다 생각했던 자신조차 꽤나 놀라지 않았던가.

이내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표정을 되찾았지만, 그 여파가 아직 남아 눈가가 잘게 떨렸다.

그런 말을 다른 영애들이 들었다면 저 혼자 착각해서 기뻐했겠지.

그 날의 다과회 이후로 수많은 편지를 받아온 그였다. 아마도 그의 훤칠한 외모가 어린 영애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리라.

오늘 손에 들고 있던 편지도 한 영애에게 받았다고 했던가.

어째서인지, 그 고급진 종이로 곱게 포장되어 있던 편지를 떠올리자 괜스레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점이 좋다고 그리 편지를 보내는 것인지. 애초에 자신의 호위 기사였다.

자신을 호위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그에게 그런 구애를 했다가, 혹여 호위가 소홀해지면 어쩌려고 그리 생각 없이 행동한단 말인가.

옅게 찌푸려진 눈 사이로 주름이 지어졌다.

자신의 호위 기사에게 향하는 그 끈적이는 감정이, 왠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

늘 향긋했던 다즐링의 향이, 그저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

“히히.”

뭐가 그리 우스운 건지, 얼굴을 손으로 덮은 채 한숨을 내쉬는 나를 바라보며 로페나가 눈을 곱게 휜 채 웃어댔다.

내가 아이린과 무도회를 함께 간다는 것이 웃긴가? 그것도 파트너로 간다는데?

생각해보니 우습긴 했다. 자기 약혼자를 내버려두고 호위 기사를 파트너 삼아 무도회에 가는 공녀라니.

이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을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그냥 편히 생각하세요. 애초에 이번엔 그냥 가벼운 자리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리 깊게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입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황태자가 여는 무도회였지만, 결국 늘 있을 사교회의 하나일 뿐이었다.

언제나 약혼자와 같이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약혼자가 아닌 자신의 가족이나 친한 이와 함께 가는 일도 간혹 있다 하니 어쩌면 괜찮을 수도 있지 않을까.

­호위 기사 에반이 아닌, 에반 프리드에게 말하는 거예요.

프리드 백작가의 둘째 아들이라, 그 정도 신분이면 그다지 꿇리진 않긴 하지.

게다가 어쨌든 그녀의 호위 기사이기도 했고.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어찌 되었든 이렇게 된 이상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터였다.

얼굴을 손으로 한 차례 쓸어내리자, 그런 나를 바라보던 로페나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신 거예요?”

“...뭐를.”

“아가씨가 이렇게 호위 기사에게 편하게 대하는 건 처음 봐서요. 나름 여기서 6년을 있었는데, 그 동안 호위 기사 분들은 아가씨가 그다지 안 좋아하셨거든요. 무도회의 파트너로 약혼자 대신에 기사님을 선택한 걸보면, 진짜 편하게 대하시는 것 같다니까요.”

그 말에 나는 그저 쓰게 웃어보였다. 정말로 그런 걸까.

하지만 나를 볼 때나 다른 누군가를 바라볼 때나,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 눈에 비치는 것 중 자신은 여전히 없었고, 얼굴을 뒤덮은 그 무감한 표정의 가면은 자그마한 실금조차 가지 않았다.

축제에서 보았던 그 음울한 모습을 다시 보이진 않았지만, 가끔 그 때가 생각나 걱정이 되기도 했고.

게다가 아까 그녀의 표정을 보아 아이린은 제 약혼자와 사이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닌 듯 했으니,

아마 그저 약혼자와 함께 하지 않기 위해 나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윽고 상념을 깬 것은 로페나의 밝은 목소리였다. 표정이 다시금 펴지고, 나는 은은한 미소를 띈 채 로페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제 입고 가실 옷을 챙기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옷이라.”

늘 입는 것은 보통 검을 다룰 때가 아니면 평복 몇 벌 뿐이었으니까,

아마 이번에는 꽤나 화려한 옷을 입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아이린 옆에 서기 위해선 나름 차려 입어야 할 테니까.

“근데 나 옷이 없는데.”

옷장 속에 들어있는 건 평소에 입고 다니는 평복 몇 벌 뿐이었다.

아무래도 빙의 하기 전의 녀석도 사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던 건지, 파티에 나가기 위해 입을 화려한 옷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당장 무도회가 내일인데, 옷을 맞추러 갈 수도 없고.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로페나가 괜찮다는 듯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 찾아보면 옷이 있을 법도 한데요. 치수가 어떻게 되시죠?”

“...아니, 치수를 알려준다 해도 나랑 맞는 옷이 있을까?”

내가 의문스런 표정으로 묻자, 로페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는 이런 말이 있죠, 유리스엔 없는 것이 없다고. 딱 기다리세요. 제가 옷 찾아올게요.”

그렇게 갑작스레 떠난 로페나를,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내가 입을 만한 것이 있긴 할까.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떼우기도 잠시, 이윽고 저 멀리서 다다다, 하고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렇게 뛰는 사람은 이 저택에 아마 로페나 한 사람 뿐이리라.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자,로페나가 따라오라며 두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찾았어?"

내가 묻자, 로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말했잖아요. 유리스에는 없는 게 없다니까요."

도대체 자식이라곤 아이린 하나 있는 이 곳에 왜 그런 옷이 있는지는 몰라도,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옷이 없다는 이유로 가지 못한다니, 그랬다간 로페나가 두고두고 비웃을 터였다.

그리고 아이린의 입장또한 곤란해졌겠지. 내 실수로 그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으니, 정말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꽤 괜찮은 옷을 찾았는지 가볍게 발을 놀리는 로페나를 따라가자, 의상실에 들어간 로페나가 잠시 뒤 옷 하나를 꺼내어 보였다.

얼핏 보면 검은색으로 보일 만큼이나 짙은 파란색, 거기에 꼭 흑요석을 떠올리게 하는 검정색이 적절히 섞인 제복.

그 가운데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하얀색의 띠가 옷과 적절히 어우러져 멋들어진 옷이라 할 수 있었다.

하얀 띠에 아로새겨진 금색의 꽃들이 눈에 띄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나름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이런 제복을 입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과연 어울릴지.

"얼른 입어 보세요. 그거 꽤나 비싼 옷이라구요. 입고 가면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걸요."

"별로 시선을 받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야."

망설이는 나를 재촉하는 로페나를 잠시 흘겨보다, 이내 그 옷을 받아 평복 위로 걸쳐 입기 시작했다.

입는 것조차 불편한 옷이라, 아무래도 이번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입지 않겠지.

어색한 손길로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고, 그렇게 제복을 모두 차려입자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썩 괜찮아 보였다.

딱 달라붙는 제복인 터라 굴곡진 가슴 근육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만 어떻게 하면 참 좋을 텐데.

금색의 머리를 뒤로 넘기며 살짝 나른한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자, 역시 옷걸이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구역질만 나왔을 모습이건만, 이 모습으로 그런 표정을 지으니 꽤나 잘 어울리지 않은가.

"...와."

내가 이렇게 입은 모습이 놀라운지 로페나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탄성을 흘렸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아이린 옆에 서도 어색하게 보이진 않으리라.

허나 무도회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이 복잡해져서, 거울에 비친 내 표정은 약간 일그러져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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