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수정궁 아래에서(3)
* * *
“잘 어울려?”
목에 걸린 자보를 잡아당기며 눈살을 찌푸린다.
평복과는 달리 몸에 딱 맞는 이 착용감이 불편한 것도 있지만, 이제 이 옷을 다 입으면 무도회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마음 같아선 하루 기절했다가 일어나고 싶으나, 세상일이 그리 쉽게 흘러가겠는가.
불편한 목깃을 살짝 풀어헤치며 로페나를 바라보자, 로페나는 살짝 멍한 얼굴로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누구세요?”
“왜, 이상해?”
“아니...그렇기 보다는 제가 아는 기사님이랑 너무 다른데요.”
도대체 네가 알고 있던 내 모습이 어땠길래. 허나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란 것쯤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 멍한 시선 속에 담긴 것은 분명 감탄이었으니까.
살짝 붉게 달아오른 볼이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로페나에 앞에 섰다.
“이상하진 않지?"
"전혀요."
아이린이 어떻게 옷을 입을진 몰라도, 적어도 꿇리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래도 내가 소설 속에서 가장 좋아했던 이와 함께하는 무도회가 아니던가.
이번이 마지막으로 영영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혹시 몰라서 춤도 연습했고 말이야.
리제가 얼마나 성을 내던지, 칼은 잘 쓰면서 춤은 왜 못추냐고 그리 구박을 했다.
아직도 리제에게 밟힌 발이 욱신거려 쓰게 웃기도 잠시, 옷매무새를 모두 정리한 로페나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내게서 떨어졌다.
“좀 꾸미고 다니는 건 어때요?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데.”
“매일 이러고 있으면 답답해서 죽을 걸. 어차피 오늘 이후면 입을 옷도 아니잖아.”
호위 기사가 된 이후로 늘 허리춤에 걸려있던 검을 떼어내자 어쩐지 허전함이 몰려왔다.
호위 기사의 신분이 아닌 백작가 자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니.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렇게 옷을 전부 차려입은 뒤 문을 열고 나오자, 문 밖에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나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어머, 에반. 너 에반 맞니?”
“...그렇게 차이가 나요?”
“평소에도 괜찮은데, 이렇게 꾸미니까 진짜 몰라보겠는데? 이제는 내가 편지를 일일이 전해주기도 힘들겠어. 영애들 눈이 돌아가겠는 걸.”
음, 지금도 그 끈적한 구애는 조금 부담스러운데 말이야.
어쩐지 나를 대견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리제를 보며 피식 웃자, 이내 그녀가 내 등을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 무도회는 그냥 황태자가 이름만 걸고 연 거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마. 그냥 아가씨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괜찮을 거야. 아가씨가 왜 널 데려가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잘 하고 올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적어도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걱정하지 말라며 옅게 웃자, 리제가 갑자기 움찔거리더니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거기 가서 아무한테나 웃어주지 마.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입꼬리는 항상 수평을 유지하는 게 좋을 거야. 가슴에 단단히 새겨 둬. 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너도 다른 여자들한테 시달리는 거 힘들 테니까.”
“알았어요. 그냥 입 꾹 다문 채 있으면 되죠?”
왜 웃지 말라는 건지는 몰라도, 나름 자작가의 여식인 그녀였으니 아마 아이린보다도 더 오랜 시간 사교계에서 활약했을 터였다.
그런 그녀의 말이라면 귀담아 들어야겠지. 그렇게 리제에게 무도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를 한참, 저 멀리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 그래?”
“아마 아가씨가 준비를 다 마치신 것 같네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방금 들렸던 소리는 분명 아이린이 있는 방 쪽에서 났던 소리였으니까.
내가 이제 가야겠다며 어색하게 웃자, 리제는 잘 하고 오라며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음.”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아이린이 있을 방향을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딜 때마다, 그 발자국 소리 만큼이나 큰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묘한 긴장감이 몸을 휘감아 눈살을 찌푸리며 무거운 숨을 토해낸다.
이렇게 긴장해본 적이 얼마만인가. 암살자들과 마주했을 때도 이토록 긴장하지는 않았는데.
옆에 서있던 로페나가 괜찮냐며 묻자, 나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야 없지.
“준비는 다 한 것 같군요.”
이윽고,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로페나를 향해 있던 시선이 천천히 앞을 향했다.
들려온 목소리의 차가움이, 이 앞에 있는 여인이 아이린임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이내 아이린에게 시선이 닿자, 나는 무심코 탄성을 흘렸다.
수많은 촛불이 일렁이는 샹들리에 아래, 환히 밝혀진 복도에 더없이도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군청색의 드레스, 그리 화려한 악세사리가 걸려져 있지도 않았건만 마치 보석처럼 화려하게 보이는 그 모습은 그녀가 타고난 천성일 터였다.
그 어떤 옷을 입던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그녀의 외모,
짙은 푸른색의 눈에 담긴 한기를 순간 잊을 만큼이나 그녀의 지금 모습은 사람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해 보였다.
“무얼 그리 멍하니 바라보는 건가요.”
“...잘 어울리십니다.”
그 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힘겹게 입을 열자, 아이린이 나를 바라보며 이내 덤덤히 입을 열었다.
“그대도 잘 어울려요. 나름 준비를 꽤 했군요.”
“며칠 전부터 준비했거든요. 춤 연습도”
“로페나.”
옆에서 조잘거리는 로페나를 쏘아보자, 녀석은 헤헤 하고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춤 연습을 했다는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허나 아이린은 그런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그저 무감한 표정으로 나를 지나칠 뿐이었다.
그녀가 내 곁을 지나치자, 그런 그녀를 힐끔 바라본 로페나가 내게 입을 열었다.
“다녀오세요. 너무 긴장하지 마시구요.”
“...그래, 네 덕분에 조금 긴장이 풀린 것 같기도 하네.”
후우.
한 차례 한숨을 내뱉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만연한 어둠, 그 사이로 가끔씩 비치는 별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아이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 밤이, 유독 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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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
중세의 마차라, 솔직히 자동차에 익숙해져있던 내가 마차에 적응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내 앞에 있는 이가 자신의 모셔야하는 이라면 더더욱.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도로, 이따금 바퀴에 돌부리가 걷어차이고 말이 난동을 부릴 때면 지진이라도 난 듯 덜컹거리는 마차 탓에 내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어버린 지 오래였다.
“...괜찮나요?”
얼마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으면, 그 아이린이 이렇게 묻겠는가.
차가운 시선 속, 아주 조금이나마 걱정이 담겨있단 사실에 그저 쓰게 웃어 보였다.
마나로 강화된 초인의 몸을 가졌다 한들, 이런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정 안 좋으면 마차를 잠시 멈춰도 되는데.”
“그러면 무도회 시작에 늦지 않습니까.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자, 아이린은 그런 나를 잠시 빤히 바라보다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방금 보았던 그 시선엔 분명 걱정이란 것이 담겨 있었으니, 어쩐지 그 사실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아이린에게 걱정을 받을 만큼이나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일까.
그녀의 호위 기사가 된 지도 어느덧 세 달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런 시간 속에서 그녀와 가까워졌냐를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이겠으나, 그녀의 마음을 열었냐 묻는다면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어보일 수 있었다.
가까워진 듯 하면서도, 막상 다가가면 차갑게 선을 긋는 것이 아이린이었으니까.
언제나 제 속에 영문 모를 어둠을 품은 그녀를 볼 때면 자연스레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을 날이 과연 언제쯤 오려는지.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알게 된다면, 그녀가 후에 맞이할 비극을 막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녀가 후에 악녀라 불린 것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 버린 그녀의 마음 때문이리라.
제 영지민을 아끼고, 자신의 사람에겐 친절한 그녀가 후에 제 가문마저 망가트리며 여주를 핍박했던 이유는 분명히 그 뒤틀린 마음 탓일 터였다.
아직은 괜찮지만, 혹여 이대로 그녀가 마음을 열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 내가 아는 비극을 그녀가 맞이하게 된다면.
아마 나는 죽어도 편히 죽지 못하리라.
그녀의 시선은 마차에 있는 창문 밖을 향해 있었다.
한적한 거리, 건물이랄 것도 없는 공허한 밖에서 과연 무엇을 보는 것일까.
그녀를 따라 창문에 시선을 두자, 말이 움직이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가는 밖의 풍경이 보였다.
유리스 공작령, 제국에서 손꼽히는 영지답게 광활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저 중에서 가장 높이 솟아오른 건물이 우리가 출발했던 공작저이리라.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였건만, 그 와중에 홀로 찬란히 빛나는 건물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저 것을 보고 있던 것일까.
아니면, 이토록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음에도 여전히 멈춰있는 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영문 모를 그 시선은 여전히 밖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나는 그저 멍하니 창 밖에 시선을 둔 채 입을 다물었다.
그러기를 한참, 이윽고 저 멀리서 이 밤에도 찬란히 빛나는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어쩌면 달에 닿지 않을까 생각이 들 만큼이나 높은 궁전.
별을 깎아 만든 듯 저 홀로 그 빛이 일렁이는 궁전은 하나의 광원(光?)과도 같았다.
수정궁. 제국의 건국 황제가 세상의 빛을 담아 만들어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 궁전.
그 위용은 공작저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었기에, 그저 멍하니 궁전을 바라보며 감탄을 흘렸다.
수정궁 아래에는 벌써 도착했는지 수많은 마차와 그 옆에 서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마 귀족들 이리라.
허나 그 사실을 깨닫자 잊고 있던 긴장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저 수많은 이들 사이에 껴 있어야 한다니,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피하자는 충동이 슬금슬금 기어오는 듯 하여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덜컹
계속해서 마차를 흔들리게 만들던 진동이 멈추자, 이내 수정궁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까지는 앉아있기 조차 힘들었던 마차였건만, 왜 지금은 이토록 내리기가 싫은 것일까.
마차에서 내리자 내게 향한 것은 무수히도 많은 시선들이었다.
마차에 새겨진 가시 방패의 문양, 그 것은 오직 이 제국에서 유리스를 상징하는 것이었기에.
마치 온 세상의 모든 이들이 내게 시선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허나 아무렇지 않은 듯, 마차에 여전히 앉아 있는 아이린을 향해 손을 내민다.
지금 나는 그녀의 파트너. 약혼자 대신 나를 선택한 그녀에게 결코 우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마음은 약간이나마 긴장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내 손을 가볍게 쥔 그녀가 이윽고 마차에서 내리자 쏟아지는 시선이 한층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유리스의 소가주와 함께 있는 이, 그녀의 약혼자가 아님에도 그녀를 에스코트 하고 있는 이.
그런 내게 향하는 시선은, 마치 몸 구석구석을 핥는 것처럼 끈적했다. 당연하게도이 상황이 그저 불편할 따름이었다.
허락 받지 못한 이가 이 수정궁에 왔음을 불만스레 여기는 것일까.
내게 향하는 그 시선 속에 호의란 전혀 담겨져 있지 않았다.
약혼자 대신 아이린과 함께온 이에 대한 의심과 경계.
하나가 아닌 수십여 개의 쏟아지는 그 시선들 속에서 눈살을 찌푸리자, 이윽고 귓가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선들을 치워라.”
순간 주변이 얼어붙는 다고 생각할 만큼이나 싸늘한 어조에, 그 말 속에 다분히 섞여있는 가시에 내게 향하던 시선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그녀의 손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탓일까, 꾹 다물린 입가가 잘게 떨렸다.
“에반.”
아이린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엔 더 이상 한기도, 가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내 표정이 어떻게 보인 것일까.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에 보이는 것은 나를 향한 희미한 걱정인 터라, 나는 아이린을 멍하니 바라본 채 입술을 달싹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탓에”
“손, 놓쳤어요.”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보인 추태를 조금도타박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그 무감한 얼굴로 바라보며 묵묵히 손을 내밀었을 뿐.
내 눈 앞에 있는 장갑이 끼워진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조심스레 그 가녀린 손을 쥐었다.
참으로 작은 손이었다. 가볍게 쥐자 이내 가려져 보이지 않을 만큼이나 작은 손.
허나 그 작은 손을 그저 쥐기만 했을 뿐인데, 몸을 가득 메운 긴장이 순식간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만 같아서.
마치 내 딱딱히 굳은 표정이 풀릴 때를 기다리는 듯 그 자리에 멈춰있는 그녀를 향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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