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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20화 (20/181)

〈 20화 〉 수정궁 아래에서(4)

* * *

“......”

제 손을 쥔, 그 커다란 손의 떨림이 전해져 옴을 느낀다.

이러한 자리가 처음인 것일까.

평소와는 달리 유난히도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제 호위 기사를 보는 자신의 심정이란, 의외로 미안함에 가까웠다.

어쩌면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일 수도 있었다. 구태여 데려오지 않았어도 될 자리였다.

그저 평소처럼 호위 기사와 공녀, 그 정도의 관계로 왔어도 될 무도회였건만.

제 충동에 의한 결정에 그가 휘말려 곤혹을 겪지는 않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연스레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허나, 오히려 잘 된 것일지도 몰랐다. 이 자리에 에반 프리드라는 자신의 호위 기사를 확실히 각인 시킨다면,

앞으로 다른 이들이 유리스의 호위 기사를 쉽사리 넘보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의 서랍장에 쌓인 편지는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 속의 있는 내용을 직접 읽어 보지는 않았으나, 그 내용 또한 쉽게 짐작할 수 있었고.

그 편지들은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으나, 단순히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편지가 더 이상 오지 못하게 할 이유는 충분하리라.

자신의 호위 기사인 에반 프리드를 이 무도회에 파트너로써 데려왔다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불순한 편지들이 공작저에 들어오는 일은 사라질 터였다.

아마 영리한 이들이라면 자신이 가시돋힌 말을 내뱉은 순간 깨닫지 않았을까.

자신이 호위 기사를 대하는 태도가, 이전에 있던 호위 기사들과는 꽤나 다르다는 것을.

허나 그 결정은 자신의 마음마저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째서 자신은 에반이라는 호위 기사를 그토록 특별히 대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에 잠시 눈살이 찌푸려졌다가문득, 저도 모르게 움직여진 시선이 제 호위 기사에게 닿았다.

몸을 덮은 암청색의 제복, 가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하얀 색 띠에 새겨진 금색의 꽃들,

그 위로 달빛이 떨어져 잘게 부서져 순간 빛이 일렁이는 듯 했다.

허나 제 시선을 앗아간 것은 그 옷이 아닌 그가 타고난 외모였다.

분명 계절은 나뭇잎이 붉게 물들어 이내 떨어지는 가을이었건만, 그가 가진 눈은 언제나 봄을 담아내고 있었다.

한 겨울에도 그 푸름을 잃지 않을 그 녹안,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 강렬하게 새겨져 자리를 잡은 그 녹안과 마주치자 저절로 입이 꾹, 하고 다물렸다.

아무리 보아도, 그는 기사의 얼굴을 가졌다고 보기 힘들었다.

언제나 검을 쥐고 있는 이들, 검과 그 육체에 평생을 바치는 기사의 얼굴이 어찌 저리 유려할 수 있단 말인가.

길게 뻗어진 속눈썹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그는 가련한 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자신이 살면서 본 그 어떤 이보다도 매력적인 외모일지도 몰랐다.

만약 그의 신분이 지금과 달리 훨씬 하찮다하더라도, 결국 그는 모든 이들의 이목을 끌을 것이었다.

자신의 호위 기사는, 그런 것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뒤로 넘겨진 금발을 매만지던 그가 자신을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의 녹안은 언제나 자신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을 동요하게 만든다.

가슴 한 켠이 이토록 답답해지는 것은, 때때로 숨이 가빠져 올 만큼이나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은 그 때문일까.

“이제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예전 같았으면 타박했을지도 몰랐다. 고작 이런 시선조차 받아내지 못하냐며, 언제나 그렇듯 한기를 담아 모질게 말을 내뱉었을 터인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추위에 시들은 갈대만큼이나 힘없는 대답이었다.

순간 마음이 복잡해져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행동의 이유를 찾고 싶을 따름이었다.

잠시 입술을 짓씹다가, 이내 입술을 작게 벌리며 힘겹게 숨을 토해냈다.

“가죠.”

착각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아주 잠깐의 감정일지도 모르리라.

얼굴에 서린 당혹감을 지워내고, 다시금 무표정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을 향해 높게 솟아오른 수정궁,별빛을 머금은 채 찬란히 빛나는 그 궁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부디 그 무도회 속에서, 가슴 속에 자리잡은 이 영문 모를 답답함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

아이린의 손은 작았다. 그 작은 손으로 검을 휘두른다는 사실이 꽤 신기하게 느껴질 만큼이나.

항상 펜을 쥔 채 서류를 처리하던 것도 이 손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 작은 손과 달리 그녀가 주는 안정감이란 너무도 커서, 어느새 내 몸을 휘감았던 긴장감이 전부 사라진지 오래였다.

만약 나 홀로 이 곳에 왔다면 아마 꼴 사나운 모습을 보일지도 몰랐다.

허나 옆에 있는 것이 아이린이었기에,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녀가 함께 한다면 혹여 무슨 일이 있다한들 잘 해결되리라. 그런 알 수 없는 안도감이 가슴속에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수정궁 안 쪽으로 들어서자궁전 내부를 환히 밝히는 수많은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그마저도 수정으로 만들어져 수많은 빛들이 그 안 쪽에서 부딪히는, 하여 어둠이 짙게 깔린 밖과는 달리 이 내부는 마치 태양이 뜬 듯 환히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빛들이 비춰지는 곳 아래, 이 곳을 향한 시선들이 다시금 내 몸을 쿡쿡 찔러왔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그저 호기심에 가까웠지만무언가 궁금하다면 차라리 다가와 말을 거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허나 이제는 그 시선들이 그리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아이린의 손을 잡고 있어서 일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설령 황태자를 만난다 한들 괜찮을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아이린의 발걸음에 맞춰 수정궁의 복도를 걸어갔다.

그렇게 걷기를 잠시, 묘한 침묵을 뚫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이린이었다.

“...혹여, 누군가 말을 건다면 적당히 받아주거나 무시하세요. 분명 쓸데없는 질문들이 대부분 일 테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예법에 주의하도록 하세요. 실수를 하면 그대뿐만 아니라 유리스가 피해를 입는 것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에요.”

“네.”

“그리고...”

잠시 걸음을 멈춘 유리스가 내게 다가오더니, 목에 걸린 자보를 잡아당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꼭 숨결이 닿을 만큼이나 가까운 거리에 움찔거리자, 그녀가 옅게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에요.”

“...네?”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니까요. 그냥, 조금 시선에 신경을 쓰도록 하세요. 되도록 무표정한 얼굴로 있는 게 좋을 거에요.”

...이쯤 되면, 리제도 그렇고 아이린도 그렇고 내게 왜 이런 말을 하는 지 알아차릴 만 했다.

내 얼굴은 솔직히 말해서 현대로 돌아가면 연예인을 해도 될 법한 외모였으니까.

아마 로페나가 보여줬던 그 반응이라면, 아마 내가 받을 편지가 더욱 늘어날 게 분명할 터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그런 나를 지그시 바라본 아이린이 시선을 떼며 다시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허나 그럼에도 쥐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아서, 나는 한 차례 피식 웃곤 아이린의 발걸음에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유독 고요한 이 복도에 구둣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어 저 멀리서 거대한 문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온갖 꽃들이 새겨져 있는 그 거대한 푸른색의 문을 바라보기도 잠시,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문이 저 스스로 움직이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 신기한 광경에 시선이 가는 것은 잠시였다.

이내 드러난 화려한 내부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고, 그 안 쪽에서 흘러나오는 무겁고도 화려한 분위기에 저절로 압도 되는 것만 같았다.

이 세상 모든 화려함을 한 곳에 모아둔다면 이런 것일까. 사치의 극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부의 한계를 보는 것만 같은 안쪽의 모습에 나는 입술을 작게 벌렸다.

“유리스의 차기 방패네요. 그런데 그 옆에 계신 분은­”

“아델 경이 아닌데요? 처음 보는 얼굴인 것 같은데, 설마 새로 들였다는 그 호위 기사 인 걸까요?”

“프리드 백작가의 그...”

저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란 하나같이 나를 지칭하는 말이라, 나는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예상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고, 감수해야만 했다.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서자, 로코코 양식 특유의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장식들이 눈에 띄었다.

바로크의 장엄함 대신 자리 잡은 유려함과 부드러움.

마치 바다의 물결이 이루어내는 자연스러운 부드러움을 그대로 가져온 듯 곱게 휘어진 문양이 새겨진 벽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아이린에게 시선을 돌리곤 입을 열었다.

“딱히 다가오는 사람은 없군요.”

“아까 경고를 했으니, 쉽사리 다가올 사람은 없겠죠. 곧 시끄러워 질 거예요. 적당히 준비해두도록 하세요.”

그 말에 고개를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혹여 눈여겨 볼만한 이가 있을지 찾아보았다.

소설 속에서 등장했던 귀족들 중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이들은 일러스트가 있었으니, 혹여 얼굴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허나 한참을 바라보아도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아서, 한 둥그런 탁자 위에 있는 잔을 집어 들었다.

안에서 찰랑이는 보라색의 음료는 분명 포도주이리라. 나이가 어린 탓에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이 꽤 아쉽게 느껴졌다.

쓰게 웃으며 잔을 내려놓자, 이내 아이린이 다가와 나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술을 마시는 건가요?”

“아뇨, 그냥. 잠깐 보기만 했습니다.”

정말 그냥 보기만 한 건데, 어쩐지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이내 아이린이 내게 다가오며 작게 입을 열었다.

"발코니에서 보죠. 여긴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발코니 말입니까?”

“여기 계속 있으면 불편하지 않나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를 배려해주는 그녀의 행동이었으니,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리라.

그녀의 말대로, 내게 향하는 이 시선들이 그리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이린이 있어서 망정이었지, 그녀가 없었더라면 아마 이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시달리는 것이 분명했을 터였다.

이윽고 그녀가 자리를 비우고, 나는 잠시 어디론가 향하는 척 테라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무도회가 열리는 연회장과는 달리 어두운 복도를 지나, 문이 열려 있는 발코니에 도달하자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까의 그 장소와는 달리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없다는 것이 이토록 편안한 것이었을까.

가슴을 죄이고 있던 답답함이 사라짐에 무거운 숨을 한 차례 토해내자,

흐릿한 안개가 끼어있는 듯 했던 시야가 순식간에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

“...하아.”

아이린은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지 않을까.

아마 유리스의 소가주인 만큼 이 곳에서 인사를 할 사람이 꽤 있는 것 같았으니, 이대로 여기서 홀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허나 다행이라면 이 발코니 아래에서 보이는 경치가 꽤 아름답다는 점이리라.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자, 주변을 감싸던 모든 소음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편안했다. 이 고요가, 이 정적이, 이 어둠이. 역시 그 소란스런 무도회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공작저에 있는 채로, 검을 휘두르고, 로페나와 간간히 떠들며 그런 일상을 보내는 것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과연 아이린은 자신을 무슨 이유로 이 곳에 같이 오자고 한 것일까.

여전히 의문으로 자리 잡은 그 생각에 옅게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이라도, 아이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아무것도 알 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서. 그저 거뭇한 하늘을 빤히 바라본 채 시간을 지새울 따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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