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수정궁 아래에서(5)
* * *
에반을 보낸 뒤, 자신 또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저 얼굴을 비추기 위해서 왔을 뿐이었다.
황태자라는 이름이 걸린 그 곳에 자신이 없다면, 그 충성을 의심 받을 테니까.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 소란스런 연회에서 무언가를 즐길 자신또한 없었다.
다만 자신이 데려온 호위 기사만큼은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허릿깨에 둘러진 부드러운 숄을 잠시 매만지다 이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발코니에서 보자 하였으니, 아마 그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샹들리에가 주변을 환히 밝히는 복도를 지나, 이제는 어두운 복도에 들어선다.
자그마한 빛조차 없는 어두운 복도였지만, 썩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러운 곡선과 왈츠의 음율, 사람들의 시선과 그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이 복도가,
지금 이 순간 그 어떠한 장소보다도 편하게만 느껴졌다.
촛불 빛 하나 아른 거리지 않는 고요한 복도를 그렇게 홀로 걷기 시작한다.
어릴 적에도 이런 버릇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홀로 어두운 길을 걸을 때면, 어느샌가 시녀들이 달려와 타박하곤 했다.
위험하게 어두운 곳에 있으면 어떡하냐면서, 억지로 밝은 곳으로 저를 끌어당긴다.
허나 그 곳이 진정으로 밝은 것이었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하나같이 어둠이 담겨져 있었다.
자신을 갉아먹고, 파헤치고, 뒤집는 어둠.
이런 것이 싫다며 어린 마음에 떼를 쓰고 소리칠 때면, 제 아버지는 조금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다락방에 자신을 가두었고.
그렇게 다락방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을 때쯤엔 더 이상 떼를 쓰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그 어둠이 제게 안정을 준다는 사실이 퍽 우습지 않은가.
그토록 가기 싫었던 곳이었건만, 이제는 그 어둠을 찾아 이렇게 홀로 나오다니.
복도에 한 가운데에 서 그렇게 발걸음을 옮긴다.
아무것도 없는 복도에 발을 디딛을 때면, 그 발걸음 소리가 울려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또각 또각
그 일정한 소리에 마음이 평온을 되찾아갔다.
수정궁이 담아내는 희미한 별빛을 잠시 쳐다보다, 이내 복도 한 가운데에 뚫린 창문을 바라본다.
어두운 복도에서 유일하게 빛을 받아들이는 곳, 조심스레 그 사이에 걸어 들어가자 이내 달빛이 제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탁한 어둠, 그리고 그 사이에 촘촘히 새겨진 별과 달들.
이렇게 거뭇한 어둠 사이에서도 달은 찬란히 빛나고 있단 것이 퍽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주변에 있는 모든 빛을 집어 삼키고 있는 것이 밤인데도,
오로지 저 달과 별들은 건드리지 못하는 지 어둠은 그 것들을 피해 점차 세상을 향해 내려앉고 있었다.
자신도 저렇게 빛날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그 생각에 다시금 제 눈앞에 녹색의 빛이 아른거렸다.
축제가 열렸던 그 날 밤에서 보았던, 그 눈이 부실만큼이나 화려한 녹색의 불빛.
“...아.”
그제야 깨닫는다. 자신이 보았던 것은 그저 환영에 그친다는 것을.
제 눈에 아른거렸던 그 불빛은, 자신의 주위에 있던 한 사람을 떠올린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에반 프리드. 그 이름을 작게 중얼거린다.
숄을 움켜쥐면서, 그렇게 가라앉은 숨을 내뱉는다.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가슴이 답답해져오고, 그 답답함에 무심코 눈살을 찌푸린다.
손이 아파오는 것만 같았다. 장미를 쥐고 있던 것을 이제야 깨달아서, 다시 놓으려 해도 놓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너무도 깊게 박혀있었다.
그 가시가 갈고리처럼 제 살에 파고들어, 놓으려 해도 놓아지지 않는 그 것이 이토록 아릴 줄 어찌 알았을까.
당장이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손은 멀쩡했다. 빛을 받아, 창백하리만치 하얬을 뿐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놓을 수 없었다. 그 것을 알고 있기에, 그저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에게 미안해서, 자신의 이기심에 걸려버린 그에게 너무도 미안해서.
그가 떠나지 않는다면, 이제 자신은 놓지 않을 터였다. 제 가슴 속에 스며든 그 온기를 이제 놓을 수가 없었다.
그 따듯함이 사라져버리면 이젠 영원토록 겨울이 찾아올 것만 같아서. 그 것이 두려워 놓을 수 없었다.
어쩌면 원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미소 짓는 주변의 사람들이 사실 그 속에 차가운 조소를 숨기고 있음을 알았기에,
자신의 가족들이 제게 바라는 것이 완벽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실수하더라도 웃어주는 이를, 그저 제게 따듯하게 웃어주는 이를.
자신은 찾고 있을 지도 몰랐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빛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촛불 하나 없는 어두운 복도, 분명히 처음 거닐었을 때만 하더라도 없던 빛은 저를 유혹하듯 그 꼬리를 살랑였다.
수정궁의, 별의, 달의 푸른빛이 일렁이는 그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저 앞에 있는 빛은 어찌하여 보이는 것일까.
허나 의문은 곧 사라진다.
갑작스레 나타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자신의 호위 기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윽고 제 눈앞을 안개처럼 가리던 어둠이 거두어지는 듯 했다.
자신이 이제껏 서있던 그 어두운 복도가 거짓이라도 되는 것처럼.
찬란한 광휘가 주변을 감싸 푸른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짙게 깔린 밤의 장막 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과 어울리지 않는 녹안이 그 어둠 속에서 일렁일 때면,
밤과 어울리지 않는 그 금발이 바람에 휘날릴 때면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한차례 무거운 숨을 토해내고, 그렇게 앞에 서있는 이를 바라본다.
“에반.”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내뱉어진 목소리는 따스했다.
언제나 제 품 속에 있던 한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와 있으면 어쩐지 그 한기가 녹아들어서, 그 누구와 있을 때보다 편안히 있을 수 있었다.
제 아무리 피곤할지라도 다른 사람 앞에서 잠들지 않던 자신이, 호위 기사의 앞에서 잠들지 않았던가.
제 몸을 감쌌던 그 담요의 따스함이 제게 옮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 생각에 옅게 미소 짓는다.
여느 때처럼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진심으로 내뱉은 웃음에 입꼬리가 어색하게 떨렸다.
“오래 기다렸나요."
"아뇨, 생각보다 일찍 오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에반 프리드라는 사람이 자신의 호위 기사임을.
이전의 호위 기사들과는 달리, 앞으로도 자신의 호위 기사를 맡을 이라는 것을.
그토록 밀어내려 했건만,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공작저에서 보았던 사람들과는 달랐다.
진심으로 웃었고,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했으며, 제게 무언가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유리스에 짙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그는 홀로 희미하게나마 빛나는 별이었다.
그제야 사라지는 가슴 속의 답답함에, 한차례 숨을 토해내곤 다시 하늘을 바라본다.
곱게 휜 달이 제게 꼭 웃어주는 것만 같아서, 그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제는 확실히 정해진 마음이, 자신을 족쇄처럼 옥죄고 있던 답답함을 순식간에 풀어버린 듯 했다.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 이토록 후련한 일이었던가.
감긴 눈을 떴을 때, 저를 옥죄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탓에 몸이 한결 가벼웠다.
불어오는 바람은 가을이 담겨져 시원했고, 바람을 타고 전해져오는 것은 코끝이 찡해질 만큼이나 진한 풀내음이었다.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차가운 발코니를 잡자, 세찬 바람이 제 뺨을 두드려대었다.
허나 그마저도 좋았다. 가슴을 옥죄이던 답답함이 사라졌으니, 그 무엇이던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에반이 자신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했었다. 허나 에반은 그 것에 자신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리라.
“아뇨, 아무 일 없었어요.”
“...그렇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에반의 표정은 자신이 아는 것보다 조금 어두워 보였다.
이 어둠이 만들어낸 물감이 그 마저 물들인 탓일까.
허나 정확한 까닭은 알 수 없어서, 그렇게 그를 바라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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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을 감싸던 한기가 한 층 옅어졌다는 것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어두운 복도를 걸어 들어온 그녀의 표정은, 이전보다 훨씬 밝아보였으니까.
달빛이 유독 환히 비쳐서도 아닌, 꼭 속에 있던 고민을 하나 해결한 듯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허나 답은 알 수 없었으니, 그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나는 이토록 답답하기만 한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이 곳에 데려온 건지.
허나 아이린을 타박할 수는 없는 터라 그저 발코니에 손을 얹은 채 한숨을 옅게 내뱉었다.
그러기를 한참, 어느 샌가 내 옆에 조용히 다가온 아이린이 발코니를 잡곤 나와 같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대를 왜 여기에 데려왔는지 궁금한가요."
갑작스레 입을 연 그녀에 놀라기도 잠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거뭇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이린또한 여전히 그 시선을 하늘에 둔 채 말을 이어갔다.
“로만과 유리스의 정략혼은 자주 있는 일이었어요. 물론 당사자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 제국을 지탱하는 기둥들 간의 사이를 돈독히 하자며 이루어지는 일이었죠.”
그런 것은 나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뿐 만 아니라, 고위 귀족간의 정략혼은 종종 있던 일이었으니까.
서로의 세력을 온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 견제보다는 협력을 택한 귀족 간에서 희생하는 것은 언제나 젊은 남녀였다.
“어릴 때 만나서, 별 관심도 없는 서류에 지장을 찍었죠. 남들처럼 반지를 나누며 서약하지도 않았어요. 단지 필요에 의한, 그런 절차에 불과했으니까요.”
하늘을 바라보던 푸른 눈이 일렁이더니, 이내 가늘게 접힌 그 눈이 발코니의 아래를 향했다.
땅 위에 세워진 수많은 마차들, 그 것을 바라본 그녀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릴 적부터 아델과 나는 수많은 행사에 함께 했어요. 그것이 싫든 좋든, 그저 어른들이 함께 하라 했으니 함께 했죠.”
“그러면, 여느 때처럼 그렇게 함께 하시는 게 편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뇨, 불편해요.”
단호하게 대답한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떼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약간 눈살을 찌푸린 것처럼 보였다. 정말로, 그리고 진심으로 그 약혼자라는 이가 불편하듯이.
“...시간이 흐르면 조금 나아지리라 생각했어요. 항상 그렇게 같이 다니다 보면 마음이 조금 편해지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그대를 이 무도회에 데려온 것은,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내 이기적인 마음 탓이에요.”
이기적인 마음이라니, 내가 의문 섞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아이린은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신기하죠. 어릴 때부터 만났던 이와 있는 것보다도, 아주 잠깐. 이제 몇 개월 함께 했던 호위 기사와 있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이. 그대를 데려온 것도 그런 이유에요. 다른 이와 함께 있는 것보다도, 그대와 함께 있는 순간이 더 편했으니까.”
“......”
"처음에는 그리 맘에 들어하는 건 아니었어요. 여태껏 만난 이들처럼 당신도 똑같으리라, 그렇게 생각했죠.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호위라는 임무만을 수행하는 인형같은 기사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니까 조금 달리 보이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의 표정은, 굉장히 후련해보였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그 어두운 그늘이 전부 걷어져서, 그 어느 때보다도 달빛이 환하게 내려 부서지고 있었다.
아이린이 마음 속에서 품고 있었던 이야기란 이런 것일까.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는 내 눈꼬리가, 놀람으로 인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저도 제가 왜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대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네요."
"...아가씨."
눈을 지그시 감은 그녀는, 이내 옅게 한숨을 내뱉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입꼬리를 비튼 그녀가 머리를 한차례 저어보였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대를 내칠까 생각했어요.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이제는 그러지도 못하겠네요."
"......"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에반."
순간, 나는 벙찐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보다는, 오히려 그 의미를 너무도 잘 이해했기에 당황한 탓이었다.
그녀는 내게 선을 긋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다가가려 하면, 그녀는 그 것을 밀어내려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것이 아니었던 것일까. 그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일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그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심장에 박히는 것만 같았다.
그 비수는 빠지지 않으리라. 제 아무리 힘을 주어 빼내려 해도, 제멋대로 박힌 그 비수는 내 스스로 빼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윽고 아이린은, 나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지었다.
이전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순수한 웃음.
그녀가 품고 있던 어둠이 순식간에 걷어져서, 이윽고 휘영청 비춰지는 달빛이 그녀를 머금은 것만 같았다.
별이 반짝였다. 그녀가 입고 있는 군청색의 드레스가 꼭 밤하늘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한기를 담고 있던 그 푸른 눈이 일렁였다.
겨울이란 추위 속에 얼어붙었던 얼음이 어느새 녹은 것인지, 어울리지 않는 따스함이 담긴 눈이 이내 곱게 휘기 시작했다.
오로지 가을의 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풍경.
높게 솟아오른 어둠, 그리고 달빛을 받아 찬란히 빛나는 수정궁.
허나 그 무엇보다도 반짝이는 것은 옅게 미소지은 그녀였기에.
나는 그저 두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아이린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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