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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34화 (34/181)

〈 34화 〉 눈이 오기 전에(5)

* * *

그 뒤로 공작과 나눈 얘기란흑마법사와 관련된 이야기뿐이었다.

이번 흑마법사의 등장으로 제국의 경계가 한 층 높아질 거란 사실,

그리고 앞으로도 흑마법사가 계속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것.

물론 그 부분은 이미 나또한 생각하고 있었고, 앞으로 몇 년 뒤면 절멸이 나타나니 당연히 준비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번 사냥제를 조심하게.

공작은 아마 5대 가문 중 하나가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얘기했다.

제국에 흑마법사가 나타난 것은, 절대로 그들이 세력을 숨기고 있었기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고.

아마도 어떤 가문이 그들의 존재를 묵인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을 거란 말은 꽤나 그럴 듯 했다.

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가게 했던 흑마법사.

그런 세력을 고작 30년이 흘렀다고 해서 찾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허나 원작에서도 절멸과 관련된 가문은 나오지 않았기에 그저 추측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공작이 내게 남겼던 말. ‘사냥제를 조심하라’라니,

이번 사냥제에서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던 걸까.

되물어도 봤지만, 공작은 그저 조심하라고 했을 뿐 이렇다 할 말을 해주지는 않았다.

내가 아는 건 아이린이 유리스의 가주가 된 이후의 일들, 사냥제가 되어야 겨우 그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지.

잠시 고개를 돌려 이미 닫힌 공작의 집무실 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어둡고, 칙칙한 색을 띄는 문.

검은색으로 칠해진 그 문 너머에 있는 공간마저도 어두웠기에,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스스로 그림자를 자처하는 이의 심정이란 어떠할까.

아버지가 아닌, 귀족을 택한 그에게 무어라 해야 할지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철혈이라는 이름이 무엇이길래 스스로를 그토록 옥죄이는 것인지,

자신의 유일한 혈육마저 저버려 스스로를 그늘 속에 가두면서도 지켜야할 이름인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허나 그의 마음만큼은 잘 알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 아이린의 파멸만큼은 아니란 것은, 진실로 와 닿았으니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복도를 지나,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창문을 지나쳐 다시금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다다른다.

지금까지의 어두움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듯 순식간에 환해지는 주변,

새하얀 햇빛이 새삼스레 눈부시게 느껴져서. 잠시 눈을 끔뻑인 채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빼곡히 솟아오른 자작나무, 오로지 북부에서만 자란다는 나무가 가리는 건 방금 나왔던 공작의 방으로 향하는 햇빛이었다.

...언젠가는, 저 빛이 공작에게 닿을 날이 올까.

요원하지만, 이루고 싶은 일이었다. 적어도 그가 죽기 이전에.

#

차가운 숨결이 닿는다.

하늘이 이따금 북풍을 몰고 올 때면, 가슴이 사무치는 한기에 모두 몸을 웅크리곤 했다.

두꺼운 옷도, 털이 가득한 망토도 가리지 못하는 추위에 그 새하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든다.

겨울이란 그랬다.

이렇게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추위였건만, 그 풍경이 가져다주는 고독은 그토록 아름다운 것이었다.

나뭇잎 하나 없는 헐벗은 나무가, 얼어붙어 까맣게 변해버린 땅이,

모두 시들어 녹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 보이는 땅에서 피어오른 작은 새싹이.

사람을 한없이 감정적으로 만드는 법이었다.

오직 겨울이기에 느낄 수 있는 것들.

차가운 몸을 녹이는 따듯한 차,몸을 뒤덮은 이불 속에서 먹는 과일의 향취,

이따금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눈은 4개로 쪼개진 1년 중 단 한 번의 계절에서만 볼 수 있지 않은가.

볼에 닿는 바람엔 물기가 섞여 있었다. 아직 채 얼지 못한 물기,

하늘로 향하는 바람을 잠시 느끼다가 이내 고개를 돌린다.

아이린에게 곧장 향하지 않고 이리 정원에 나온 이유는, 사실 이렇다 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나왔을 뿐이었다. 창밖을 보다가 보인 풍경에 저도 모르게 이끌려서.

어쩐지 내 몸이 절로 이 곳을 향해 나왔던 것 같다.

별 이유 없이, 그냥 이 낙엽이 밟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사박거리는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올 때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발에 밟힌 낙엽이 형태를 잃어 바스라지고, 떨어진 나뭇가지가 부러져 옆으로 굴러간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하늘은 눈을 부르고 있었다.

첫눈, 이 세계에 와서 보는 첫눈이라는 생각에 눈이 가늘어졌다.

전에는 첫눈이란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진 않았는데. 오늘따라 괜히 감정이 이리 깊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참 잘도 지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아이린을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호위 기사라는 직책에 당황하고,

앞으로 언제 내쳐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만 했는데.

이제 서임식이 코앞이라니. 그래도 내 눈치가 영 없는 편은 아니었나.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떠나가야 할지도 몰랐다.

이제는 익숙해진 이 중세의 삶에서 벗어나 삭막한 콘크리트로 가득 메워진 세계로 돌아갈 때면,

나는 과연 지금 그리고 있는 미래를 모두 이룬 뒤일까.

로페나, 크리스 경, 리제, 아이린. 몇 없는 인연이었지만.

이제는 쉽사리 버릴 수 없는 인연임을 안다.

두 세계에 속한 이방인. 그들을 두고 나는 이 세계에서 떠나갈 수 있을 것인가.

문득 불어오는 바람이 볼을 긁고 지나가, 내 시선이 그 바람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그 시선이 닿은 곳.

그 곳에 우두커니 서있는 여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어 보였다.

“아가씨.”

늘 입고 있는 검은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이린에게 말하자,

내 목소리를 들은 아이린이 이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원에 나와 있던 걸까.

내가 걷기 시작했던 곳과 정반대에서 걸었는지, 딱 정원의 중앙에서 만난 지금 상황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아버지를 만나고 온 건가요?”

“예, 이제 막 나왔습니다.”

아이린은 이내 나를 한 차례 바라보더니, 옅게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달싹였다.

여지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임에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호위 기사라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그 말에 순간 입을 작게 벌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게 이런 말이라곤 생각치도 못했는데.

내가 호위 기사를 맘에 들지 않는다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고민도 해봤으나 무언가 뚜렷하게 떠오르진 않았다.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내가 그대에게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대가 세운 공적이라면 당장 기사단장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내가 그대를 호위 기사로 남아 달라 한 것이 부담이 되지는 않았나...하고요.”

“부담스럽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부담스럽습니다.”

내가 그리 답하자, 아이린이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푸른 눈에 번진 불안이 커진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공작이 말한 것이 머릿속에 떠올라, 나는 어깨를 한차례 으쓱인 채 말을 이어갔다.

“제가 과연 아가씨 곁에 있어도 되는 사람인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미숙하고, 또 부족하니까요.”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 공작이 원하는 호위 기사는 그런 것이었다.

아이린의 닫힌 마음을 열고, 그녀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

처음 보았을 때의 아이린과 지금의 아이린을 과연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의문을 품었다. 공작이 내게 그리 부탁했지만, 과연 그의 말처럼 내가 아이린의 마음을 열 수 있을지.

처음 만난 그때처럼 그녀의 눈이 차갑지 않았고,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말처럼 그녀의 말은 따갑지 않았으나. 그저 그 뿐이었다.

아직 그녀는 잘 웃지 않았고, 여전히 공작저의 다른 이들을 바라볼 때면 표정이 어두워지곤 했다.

업무에 지쳐 새벽에 쓰러지듯 잠자는 것도 잦았다.

지금의 그녀가 달라졌다한들, 과연 행복하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어깨에 쌓이는 무게는 커져만 갔다.

처음엔 그저 비극을 막아보자는 가벼웠던 생각이 이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공작에게 그녀의 호위 기사로 남아 달라는 부탁을 받을 정도로 커져 버렸다.

이 책임을 저버리고 어딘가로 떠날 수도 있었다.

내 힘이라면 기사들의 추격을 따돌려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지.

허나 그럴 수 없음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처음이라면 그게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어찌 그냥 떠날 수 있겠는가.

내가 내뱉었던 말에 그녀가 대답하자, 나는 옅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나를 바라보는 그 푸른 눈을 마주할 때면.

공작과 닮았지만 아직까지 감정이란 것을 담고 있는 그 반짝이는 눈을 마주할 때면 이토록 마음이 흔들리는데.

잔잔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옴에, 나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날이 이토록 추운데도 망토하나 두르지 않은 모습이 눈에 거슬린다.

바람이 이렇게 찬데도, 어찌하여 그냥 이렇게 나온 건지.

두르고 있던 망토를 그녀의 몸에 두르자아이린이 움찔거리며 내 팔에 손을 올렸다.

“에반, 나는 괜찮­”

“제가 안 괜찮습니다.”

우물쭈물 거리며 내게 떨어지려 하는 아이린을 잠시 쳐다보며그녀의 몸에 망토를 둘러 여몄다.

비록 두껍지는 않으나 찬바람은 막아줄 수 있겠지.

어차피 마나를 사용하면 추위 정도는 느낄 새도 없었다.

그 망토를 매만지던 아이린은 이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 내가 하던 말을 이어 듣고 싶은 것일까.

허나,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담스럽고, 솔직히 말해 제가 호위 기사를 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저라는 사람이 과연 아가씨 옆에 서도 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건 여전합니다.”

“......”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살짝 숙이자, 아이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놀람, 당황으로 번져나간 눈의 동공 또한 커져서. 나는 옅게 미소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호위 기사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 물어보셨죠.”

“...네.”

“마음에 듭니다. 무척이나요.”

매력적인 자리라는 말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단순히 그녀의 호위 기사라는 이유만으로 내게 주어지는 혜택은 차고 넘쳤으니까.

비록 책임은 컸으나, 그 만큼 주어지는 것 또한 크다 할 수 있겠지.

“그런가요.”

아이린은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나를 따라 시선을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에 회백색 하늘이 담긴다.

당장이라도 눈이 내릴 듯, 하얗게 반짝여 빛이 부서지는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만 알 수 있는 건. 그녀의 눈에 담겨있던 불안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그녀에게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곁에 있을 때 그녀가 불안해하지 않는다면.

지금은 그 걸로 족할 수 있을 터였다.

늘 수평을 그리던 입꼬리가 움직여, 호선을 그린다.

“...다행이네요.”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 미소에, 그 미소가 가져다주는 부드러움에 놀란다.

늘 아름다운 선홍빛을 띄던 입술이 곱게 휘었을 때.

푸른 눈에 더 이상 한기가 담기지 않아 찬란히 빛났을 때.

그녀가 이토록 아름답게 웃을 수 있음에 놀라 아이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이 내린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색이 꽃이 내려, 삭막한 나무 위에 내려 앉아 화려하게 피기 시작했다.

하얗게 물드는 정원, 오직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이 순백의 녹음이었건만.

그럼에도 내 시선은 여전히 아이린에게 향해 있었다.

나방이 더 큰 불빛만을 쫓듯, 내 시선 또한 그렇게 그녀만을 쫓고 있었다.

한 순간에 사라진 그 미소가 조금이나마 더 이어지도록, 그런 작은 염원과 함께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그녀의 외모에 대해 생각할 때면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그런 것이 새롭게만 느껴지는 듯 했다.

그 푸른 눈이, 새하얀 피부가, 피처럼 새빨갛게 물든 입술이.

조각가가 세공한 것처럼 아름답게만 보여서.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소원, 들어주셨네요.”

그 말에 아이린이 나를 바라보았을 때, 어쩐지 그녀의 새하얀 볼이 붉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웃었음을 들켰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일까.허나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그저 새롭게 다가올 따름이었다.

그녀가 한 번 쯤 환히 웃어주기를 바랐는데, 그 것이 이렇게 이루어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금 붕 뜨는 것만 같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보인 하늘이 그저 흐리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눈이 내리니 퍽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가.

그렇게 하늘을 보기도 잠시, 바닥에 녹아드는 눈을 쳐다보던 아이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일이잖아요.”

그런가.

그 말을 듣자 무심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직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으니, 오늘은 아직 내 생일이었다.

그 것을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다는 사실에 왠지 가슴이 간질거리는 듯 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 내 생일이었는데, 그 사소한 소원조차 기억하며 들어주는 아이린의 모습이란.

살면서 보아왔던 그 어떠한 것보다도 강렬히 내 가슴 속에 새겨지는 듯 했다.

사람들이 첫눈이란 것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저 비가 오는 것처럼, 하늘에 있는 수분이 얼어붙어 내리는 것이 눈이 아니던가.

무엇 하나 특별할 게 없는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첫눈이 내리는 걸 보니 어쩐지 가슴이 찌르르, 하고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생일날. 처음으로 내 생일을 기억해주고 축하해주는 사람들을 만난 날.

아이린을 만난 지 딱 반년이 되는 날, 그리고 그녀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어준 날.

하나하나 따진다면 사소한 일일지 몰라도, 그 사소한 것들이 내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하게만 느껴졌다.

다시금 차분해진 아이린을 힐끔 바라보다가, 이윽고 눈이 내리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을 지그시 감는다.

첫눈이 올 때면, 사람들이 소원을 빈다고 했던 그 기억을 떠올리며.

내년에도, 그리고 내후년에도.

내가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기를. 그렇게 속으로 빌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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