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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35화 (35/181)

〈 35화 〉 눈이 붉게 물들 무렵(1)

* * *

첫눈이 내린 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첫눈이 무색할 만큼이나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눈의 무게를 차마 이겨내지 못하고 부러지는 나뭇가지들, 눈 속에 파묻혀 사라지는 낙엽들.

제국의 북부에 위치한 유리스는 눈과 친숙했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털옷을 꺼내 입었다.

뽀드득­

차와 사람들의 신발에 밟혀 늘 검정색을 띄던 눈을 봤던 것 같은데, 이 곳의 눈은 오로지 흰색만을 띄고 있었다.

이따금 흙과 낙엽이 섞여 더러운 눈도 있지만 그마저도 몇 없었으니,

밟으면 무릎까지 올라오는 새하얀 눈을 물끄러미 바라볼 따름이었다.

“올해는 눈이 적게 와서 다행이네요. 작년엔 그냥 기어가는 편이 빨랐는데.”

“...그런가?”

아무래도 올해 이전의 기억이 없는 나로썬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무릎까지 눈이 쌓였는데 이게 적은 거라니, 내가 원래 살던 세계로 치면 러시아를 생각하면 되는 걸까.

여기도 북부였으니 어쩌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퍽­

갑작스레 날아온 눈덩이가 얼굴에 부딪혀 떨어진다.

차가운 눈의 감촉이 얼굴에 흘러들어와 눈을 질끈 감기도 잠시,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고 눈을 가늘게 뜨자 장난스레 웃으며 킥킥 거리는 로페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도 못 피하세요? 히히.”

“...하.”

그러고 보니 로페나는 아직 15살이었나. 나는 이제 16살이었으니 로페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

아무래도 오빠로써의 위엄을 조금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로페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가볍게 뭉쳐 손에 쥐었다.

마나를 담아볼까.

“흠.”

아무래도 15살이면 장난기가 많을 나이긴 했다.

물론 이럴 때 너그럽게 넘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내 앞에서 실실 웃는 로페나의 얼굴이 왜 이렇게 얄밉게 보이는지.

손에 쥔 눈덩이를 힘껏 던지자 이내 로페나의 머리에 정확히 적중했다.

조금 세게 맞았는지, 눈덩이에 맞아 머리가 뒤로 넘어가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아, 아니. 왜 이렇게 세게 던져요!”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기사라는 걸 조금 자각해주면 안 돼요? 아파요, 아프다구요!”

“응, 몰라.”

눈에 맞아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은 로페나가 빼액 거리면 소리쳤지만,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다시 눈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눈싸움을 해본 게 언제였더라. 아마 초등학교 때 했던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로페나도 말로는 화났다면서 입꼬리는 올라간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눈에 덜 맞은 듯 했다.

아예 눈으로 몸을 적셔버릴까.

그렇게 눈을 던지기를 한참, 갑작스레 저 멀리서 느껴진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공작저의 입구 쪽, 하늘 높이 솟아오른 깃발은 분명 로만의 상징인 깃털 달린 검이었다.

“로만?”

내가 중얼거리자, 로페나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치며 입술을 작게 벌렸다.

무언가 까먹고 있던 거라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에 되묻자, 이윽고 로페나가 다시금 저택으로 움직이며 대답했다.

“아가씨한테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분명 사냥제 때문에 왔을 테니까요.”

“...아.”

생각해보니 내일이 사냥제였던가.

잠시 손에 쥔 눈뭉치를 바라보다가, 이내 내려놓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냥제라, 아무래도 아이린에게 가봐야 할 것 같았다.

#

“왔나요?”

아이린이 있는 곳으로 가자, 아이린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보곤 입을 열었다.

허나 그녀보다 먼저 들어오는 것은 그녀 옆에 놓인 깃발들이었으니,

그것들을 빤히 바라보자 잠시 차를 홀짝인 아이린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내일이 사냥제니, 그대가 가지고 갈 것들을 조금 준비해 봤어요. 유리스를 대표하여 나가는 기사가 그대니까. 아무래도 초라한 것들을 줄 수는 없지 않나요.”

“...조금 과하지 않습니까?”

깃발만 하더라도 무려 5개에 달하지 않은가.

유리스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부터 유리스의 기사단들이 지닌 문장들이 새겨진 깃발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한 검부터 제복, 특히나 보석들이 박힌 제복을 보자 괜히 부담이 커지는 듯 했다.

사냥제란 것이 내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행사였던가?

그저 귀족들의 유희에 불과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준비한 것을 보면 내가 알던 것보다도 더욱 중대한 행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하지 않아요. 그대가 가지고 갈 것들이니까요.”

“이런 것들을 들고 있으면 검은 어떤 손으로 들어야 할까요.”

“...아.”

무엇에 정신이 팔려 그런 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아이린은 작게 입을 벌리며 탄식을 내뱉었다.

꽤나 아쉬운 듯, 한 쪽에 놓인 깃발을 보던 아이린은 내게 시선을 돌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네요. 검을 들 수가 없군요.”

검이나 제복들도, 솔직히 말하자면 저런 것들을 입고 움직인다면 꽤나 불편할 터였다.

아이린이 꽤나 아쉬워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한 것들을 입고 움직일 수는 없겠지.

날 힐끔 쳐다보는 아이린을 향해 고개를 가로 저어보이자 아이린은 쓰게 웃더니 이내 로페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로페나, 사람들을 불러서 저것들을 치우도록 해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꽤 비싸 보이는데, 그래도 나중엔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검이나 제복은 서임식 때 입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고 보니 그대의 서임식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사냥제가 끝나면 바로니까요.”

눈이 소복히 쌓이고, 숨결이 찬바람에 닿아 부서지는 계절이었다.

원래라면 눈이 오기도 전에 치루었어야 할 서임식이 이렇게 미루어진 건 순전히 흑마법사 탓이 아니던가.

아이린또한 흑마법사를 떠올렸는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밖에 있는 로만의 깃발을 봤나요? 이번 사냥제는 이 근처에서 열릴 거예요. 베르뎅 산 전체가 이번 사냥제의 무대가 되겠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뎅 산에서 사냥제가 열린 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걱정이 되는 점이 있다면, 베르뎅 산에 종종 몬스터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와 내가 살던 현실 세계가 완전히 다른 점을 꼽자면 역시 마나가 있겠지만,

그것 말고도 몬스터라는 존재가 있다는 점이 있었다.

몬스터, 이 세계의 태초에서부터 존재하던 괴생명체.

인간과는 명확히 다르나 지능을 가지고 있었고,

나름의 사회를 지닌 채 살아가는 그 생명체는 자연스럽게 인간과 공존하고 있었다.

그 몬스터중 대부분이 인간과 친했지만, 적대적인 몇몇도 있었으니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트롤이었다.

삐죽 튀어나온 엄니, 활을 뒤집은 것처럼 굽은 등,

푸른색이나 초록빛의 피부를 지닌 트롤들이 간혹 베르뎅 산에 나타난다는 얘기가 있었건만.

이대로 사냥제를 진행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이번엔 로만이 직접 주관하여 열었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아이린이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베르뎅 산에 사는 트롤들은 조금 조용한 편이죠. 먼저 습격하지 않는 한 그 쪽에서 공격할 일도 없을 거에요. 그리고 사냥제가 진행되는 건 산의 깊은 곳이 아닌 그 기슭뿐이니, 사실 말이 사냥제지 유흥에 가깝죠.”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요. 아무리 그대라 해도 곰에게 맞으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기껏해야 곰이나 호랑이를 잡는데 무리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원래라면 그저 가볍게 나갈 생각 뿐이기도 했는데 말이야. 허나 공작과 만난 뒤로 생각에 조금 변화가 있었다.

그저 가볍게 나설 수가 없었다. 흑마법사에 대해 얘기하다 공작이 했던 말,

‘사냥제를 조심하라’라는 말이 아직까지 머릿속에 계속 머물러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흑마법사와 사냥제가 관련이 있을 거란 얘기겠지.

하지만 도대체 어떤 식으로 나타날 지 도무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공작이 언급한 것은 단지 가능성이었으니 흑마법사가 나타날 것이라 섣불리 재단할 수도 없지 않은가.

가능성, 공작이 예상한 것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이었을까.

이미 5대 가문 중 어딘가가 흑마법사와 결탁했다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

허나 그런 상념은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나는 허공에 두었던 시선을 떼어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네요.”

“...글쎄요.”

불만스러운 듯, 작게 눈살을 찌푸린 그녀의 눈에서 일순간 한기가 감돌았다.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번에 5대 가문 전부가 사냥제에 참가하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아마 사냥제에서 우승하는 가문이 한 동안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닐 것도요.”

열린 창문 사이에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따듯한 차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가 천천히 휘날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린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몰라도, 저는 우승을 그리 바라진 않아요. 유리스의 대표라는 자리가 주는 부담감이 당연히 크겠지만...그래도,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어차피 사냥제는 여러 번 열리니까요.”

“......”

순간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모습이 사냥제에 부담을 가진 모습으로 보였던 걸까.

하기야, 흑마법사를 생각하느라 나름 표정이 심각하게 보였을 법도 했다.

내가 웃는 것이 의아했는지 아이린의 눈이 가늘어지자, 나는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예전 같았으면 아이린이 무어라 했을까. 아마도 표정을 그렇게 할 거면 나가라고 했을지도 모르지.

실제로 한 번 그런 적도 있지 않았던가.

내가 장난스레 묻자, 나를 힐끔 바라 본 아이린은 내 말을 무시한 채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차에서 퍼지는 향이 이 공간을 가득 메우자, 어쩐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듯 했다.

흑마법사의 대한 생각으로 미약하게나마 피어오른 불안감도,

유리스의 대표로 나간다는 묘한 긴장감도 사라지니 몸이 나른해져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처럼, 사방이 고요에 잠긴다.

방을 감싼 고요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아이린이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뿐이었다.

그 청아한 소리가 귓가를 휘감기도 잠시, 정적을 뚫고 들려온 것은 아이린의 목소리였다.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특유의 서늘함이 담긴 목소리에 눈을 뜨자 아이린의 시선이 내게 닿아있음을 깨달았다.

“다친 건 다 나았나요?”

“...어깨라면 다 나았습니다.”

흑마법사와 싸운 지도 어느덧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붕대를 풀은 지도 꽤 지났건만, 나를 보자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이린은 전보다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다친 것을 자신 탓이라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지,

내가 붕대를 감은 걸 볼 때마다 어두워지는 얼굴을 보는 것도 꽤나 곤혹스러웠다.

그녀또한 검을 휘두르기에 알지 않겠는가.

마나를 다루는 시점에서이미 사람의 몸은 한 번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이 정도 상처야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저 한 번 크게 다쳤을 뿐, 애초에 목숨에도 지장이 없던 상처였으니까.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 나또한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왜일까.

저번에 보여주었던 웃음처럼 늘 환하게 웃고 있으면 좋으련만.

처음엔 그저 한 번 보았으면 했는데, 이제는 늘 그렇게 있기를 바라니 사람이란 참 간사한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안 다칩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기껏해야 곰을 잡는 것인데, 다치려 해도 다치기 쉽지 않을 겁니다.”

내 말을 들은 아이린은 그런 나를 잠시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가 나를 걱정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긴 했지만,

전에도 흑마법사와 싸울 때 다치지 말라 당부하던 것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녀의 숨겨진 심성일 수도 있었다.

구태여 숨길 필요는 없을 텐데. 공작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도는 기분이었다.

마음이란 것을 잃어버려 허무만을 담는 눈.

나중에 아이린 또한 공작과 같은 눈을 가지게 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과연 그녀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이 앞에 있는 것은 안개처럼 뿌연 미래뿐이었다.

제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는 나라 한들 사람의 마음을 쉽사리 바꿀 수 없는 것은 여전했다.

허나 그럼에도 부딪혀야 함을 알고 있었다. 도망치지 않을 거라며 다짐하지 않았던가.

이미 마음속 깊숙이 다짐한 것처럼, 적어도 이 세계에서 떠나기 전까지는 그녀의 곁에 있으리라 마음먹었으니까.

“에반.”

다시금 아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것을 깨닫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허나 당황스러운 나머지 시선은 제 갈 길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해서, 아이린은 그런 나를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부담가지지 말라니까요.”

부담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당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허나 그리 답할 수는 없어서 그저 멋쩍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아이린은, 이내 품속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내들며 입을 열었다.

“...어딘가에서 들었는데, 전쟁이 있을 때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기사에게 건네준다 하더군요.”

“아가씨?”

그 손수건이 뭐냐며, 어째서 그런 말을 하냐며 물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손목이 잡혀서, 그렇게 자석처럼 끌려가 손이 맞닿는다.

그 자그마한 손에 달린 얇은 손가락이 손목을 스칠 때마다 전기에 감전된 듯 짜릿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당황으로 물든 얼굴에서, 순간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그녀도 이런 것은 처음이었는지, 손목에 손수건을 걸어주는 모습이 영 어색해보였다.

찬바람이 닿아 한껏 차가운 살결이 닿는다.

남들보다도 꽤 작은 편인 그녀의 손이 눈에 들어올 때면, 괜스레 가슴이 간질거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그녀가 이렇게 손목에 손수건을 걸어준다는 그 사실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사에게 손수건을 주는 것,

그녀가 말한 것처럼 종종 그런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던가.

그 사실을 떠올리자 괜스레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손목에 손수건을 걸어주는 그녀의 얼굴을 보아하니 정정해줄 수도 없어서,

그저 입을 꾹 닫은 채 아이린이 손수건을 전부 걸 때까지 기다릴 따름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건만, 어째서 이 시간이 이토록 길게만 느껴지는 걸까.

체온이 맞닿아 있음이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흔들리게 하는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36.5도, 누구나 같은 체온이었지만 아이린의 살결은 그보다 조금 더 차가운 것 같아서,

피부에 닿은 감촉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손이 내 손목에서 떼어졌을 때, 나는 비로소 힘겹게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감촉에 얼굴이 달아올라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아이린이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무 불안해 보여서 주는 거에요. 다시 돌려 받아야하니 손수건, 더럽히지 마세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주신 겁니까?"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주는 것이 아니던가요?"

"...그렇죠.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정말로 원래의 의미를 모른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그저 나 혼자만의 착각, 그런 것으로 생각하면 되는 거겠지.

나중에 그녀가 이 의미를 깨닫곤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손목에 둘러진 새하얀 손수건을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였다.

뭐라 해야할까. 어쩐지 손목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불안해보이니 이렇게 신경써주는 마음이 기껍게 느껴지기도 했고.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자, 어스름히 져가는 해 반대편에서 둥그런 달이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붉게 물든 하늘, 그 아래에 새하얗게 쌓인 눈.

퍽 아름다운 겨울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렇게 사색에 잠긴다.

다시 해가 떠오를 때면, 사냥제의 시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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