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눈이 붉게 물들 무렵(5)
* * *
빛이 부서진다.
하늘 높이 떠오른 해가 내리쬔 빛이 눈에 부딪혀, 이내 찬란한 광휘와 함께 부서져 주변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붉은 색의 노을, 새하얀 눈을 붉게 물들이는 그 빛을 바라보다 이윽고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에 시선을 돌린다.
저마다 가문의 깃발을 든 채 걸어오는 기사들.
자신이 잡은 짐승의 목을 들어 올리는 이도 있었고,
자루에 가득 찬 동물의 사체를 보여주며 저가 속한 가문을 향해 향하는 이들이 가득했다.
“이제 기사님도 곧 오시겠네요. 언제쯤 오시려나.”
“...아마 곧 오겠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온다.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죽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저도 모르게 쓸데없는 감상에 빠져들곤 해서,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낸다.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남은 불안감은 곧 사라질 터였다. 곧 있으면 에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겠는가.
“얼마나 잡으셨을까요? 솔직히 기사님만큼 강한 사람이 여기에 없잖아요.”
“아마 아델 경도 에반에게는 못 미치겠지. 사실, 에반의 나이와는 달리 그 실력만큼은 익스퍼트에서도 수준급이니까.”
크리스 경의 말에 로페나가 두 눈을 반짝인다.
검을 모르는 로페나가 그 말을 얼마나 이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 또한 에반의 수준이 일반적인 궤를 벗어났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부담을 가지지 말라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제아무리 이 곳의 기사들이 용을 쓰든, 결국 에반만 열심히 한다면 우승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테니까.
“근데 어째 저 뒤쪽이 소란스러운 것 같지 않아요? 내려오는 기사들도 별로 안 보이구요.”
“...흠.”
눈이 가늘어진다. 크리스 경이 창문 너머를 바라보다,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무언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요.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이 가죠.”
“여기 계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별일 아닐 테니까요.”
“...같이 가죠.”
다시 입을 열자, 크리스 경은 이내 자신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떨려오는 이 가슴이, 직접 확인하지 않는 한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불안했다. 분명히 위험할 것 하나 없는 사냥제였건만, 원인모를 불안감이 자신을 덮쳐 숨을 죄여오는 듯 했다.
“별일 없을 거예요.”
로페나가 자신을 걱정하며 그렇게 덧붙였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눈으로 봐야 아마 이 불안감이 해소되겠지.
어찌하여 이토록 불안해지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호위 기사를 직접 본다면 가슴이 진정될 것이란 사실에 확신이 들었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저 멀리서 보이는 것은 온몸이 피로 물든 기사와 다른 기사가 말싸움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피, 그 붉은 색을 보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고작 짐승을 사냥하는데에 저렇게 많은 피를 흘릴 기사는 이 곳에 없었다.
입고 있던 갑주가 찢어져, 마치 압도적인 힘에 짓눌린 듯 갑옷 한 쪽이 우그러진 기사가 부러진 칼을 쥔 채 손을 떨고 있었다.
두 눈에 비치는 것은 명백한 공포였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자신을 향해 고함을 내뱉는 다른 기사를 그저 빤히 바라보는 모습을 보곤 크리스 경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로만이 직접 이 산을 확인하지 않았소, 그런 일이 생길리가 없단 말이오!”
“하지만, 제가 직접 봤습니다. 트롤입니다. 우리가 아는 트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제임스가 찢어지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사람이 손으로 찢어집니다. 어떻게 그걸 잡습니까! 당신이 그걸 직접 본다면 내게 이런 소리는 못했을 겁니다. 그 보라색! 당신은 모릅니다. 내가 무엇을 보고 왔는지, 당신은 모릅니다!”
“당신은 나약하오, 설령 트롤이 나타났다 한들 검을 들어 맞서 싸웠어야했소!”
“트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다. 하나는 분노로, 또 하나는 공포로 물들여진 시선.
잔뜩 화가 나있던 기사는 씩씩거리며 숨을 내뱉다가, 이내 크리스 경의 갑주에 새겨진 문양을 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트롤입니다. 트롤이 저 위에 있습니다!”
겁에 질린 기사가 산의 정상을 가리켰다.
바들거리며 떨리는 손가락을 바라보기도 잠시,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크리스 경이 이내 입술을 달싹이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일렁이는 것은 경악이라, 눈을 마주지차 그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사실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흑마법의 기운까지 함께 느껴진다는 것이겠죠. 기사단을 소집해야 합니다. 로만과 협력을”
“아델 경, 아델 경이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같이 있던 기사도 봤었는데, 아마 에반 경일 겁니다.둘이서 정상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으니 아마 두 분 모두 정상에 있을 겁니다.”
에반.
그 이름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산의 정상으로 향했다니, 방금 크리스 경이 산의 정상에서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 않았던가.
트롤, 그리고 흑마법. 겁에 질린 기사를 바라본다.
그렇다면 에반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눈동자가 번뜩였다.
꽤나 오랜만에 한기를 남은 두 눈이 기사의 폐부를 꿰뚫어, 이내 눈이 마주친 기사가 흠칫하며 저를 바라본다.
“에반 경은 어떻게 됐지. 설마, 그냥 두고 내려온 것인가.”
“...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대로 있다간 제가 죽을지도 몰라서”
“도망쳤다는 거군.”
가슴 한 구석에 일던 불안감은 이 때문이었던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문다. 입안에 비릿한 맛이 감돌아, 이내 숨을 토해내며 크리스 경을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기사단을 소집하세요. 베르뎅 산을 수색합니다. 로만과 협력해서, 해가 지기 전에 두 기사를 찾을 겁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곧바로 움직이며 기사단을 부르는 크리스 경을 바라보면서도, 점점 불안감이 커지는 가슴에 눈이 가늘어졌다.
어쩐지 숨을 쉬기가 힘들게 느껴져 이내 힘겹게 숨을 토해낸다. 무사할 터였다. 아니, 무사해야만 했다.
산 아래로 저물어가는 노을이 꼭 피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자 발걸음을 내딛었다. 베르뎅 산, 아마도 자신의 호위 기사가 있을 그 정상을 바라보면서.
#
“아직 찾지 못했는가!”
찬란한 태양빛이 사라지고, 다시금 어둠으로 물든 하늘에 별이 만연했다.
얇은 초승달이 비추는 빛이 미약하여 마법으로 산을 비췄으나,
빼곡히 솟아오른 나무에 사물을 분간하기조차 힘들었다.
허나 산을 수색하는 기사들의 표정은 비장했으니,
그들이 찾아야 하는 대상이 무척이나 중요한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리스 소가주의 호위 기사와, 로만의 후계자.
게다가 흑마법이 느껴짐을 깨달은 기사단장들이 다급히 이 일대를 수색하고 있었다.
이따금 마법진이 그려져 산을 비추었지만, 잡히는 마나의 기운은 아무것도 없었다.
트롤이 있다하였건만, 어째서 아무런 반응조차 잡히지 않는 것일까.
마치 그 트롤이 죽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시간이 지나도 찾을 수 없는 흔적에 기사들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산의 정상으로 향해야 했다. 허나 만약 트롤이 있다면, 증언처럼 흑마법이 관련되어 있다고 하면 과연 상대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미 트롤이 잡힌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만약 아델 경과 에반이 트롤을 처치한 거라면. 지금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습니다.”
크리스 경의 중얼거림에 시선을 돌리자, 이내 눈을 마주친 그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마나를 제대로 느낄 수 없음이 이토록 답답한 것이었던가.
허나 흑마법의 기운이 사라졌다는 것은 명백한 호재였기에, 기사단이 일제히 정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로 트롤을 베어낸 것일까. 허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트롤이 그저 사라진 것에 불과할 거란 생각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눈앞에 쓰러진 제 호위 기사의 모습이 아른 거려, 이내 눈을 질끈 감은 채 숨을 뱉어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괜찮을 것이었다. 에반은 이미 한 번 흑마법사를 상대해 보지 않았던가.
승산이 없었더라면 몸을 피했겠지.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너무도 길게 느껴지는 듯 했다.
발걸음을 내딛을수록 불안감이 더욱 커져, 턱밑까지 숨이 차올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터질듯이 뛰는 심장에 가슴을 움켜쥔다. 꽉 쥔 손이 하얗게 질려 이내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흘렀다.
악문 이 사이로 힘겹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어렸을 때의 기억.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지금에 와 다시금 떠오르는 것일까.
아이린.
자신을 부르는 그 따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듣고 싶지 않았다. 하여 귀를 틀어막지만,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내 눈까지 질끈 감는다.
제발. 이제는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아니던가.
그 목소리가 들려올 때면 다시 젖어드는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추위를 쉽게 받아들였다.
겨울의 혹한이 파고든다. 심장이 얼어붙어 갈라지는 고통이란, 그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보았던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에반은 강했다. 그런 트롤도, 설령 흑마법사가 있다한들 베어낼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아무런 일도 없을 터인데.
“...도착했습니다.”
한 기사가 그리 말했을 때, 코를 찔러오는 악취에 모든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일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왔다. 제 몸에 흐르는 피보다도 많은 피를 검에 묻혀왔기에, 이 향을 잘 알 수밖에 없었다.
"혈향..."
"시체가 있는 것 같군요."
그 것을 깨달았을 때, 저 앞에 보이는 풍경에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솟아오른 나무 사이로 달빛이 비춰, 오로지 그 부분만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목이 베어진 트롤의 거대한 몸집, 그 아래에 떨어져 있는 트롤의 목.
그리고.
그 곁에 쓰러진 한 명의 기사.
“...에반.”
별빛으로 물든 숲이 꼭 회색으로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밝은 빛 아래 저 홀로 쓰러진 기사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멍하니 손을 든 채로, 쓰러진 기사를 향해 그렇게 걸었다.
차가웠다. 창백한 얼굴에는 피가 한껏 묻어있어, 마치 잘 빚은 인형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감은 이내 흩어졌다. 아니, 그보다도 더한 감정이 쏟아져 가슴에 차올랐다.
등골이 시려웠다. 자신이 보는 것이 무엇일까. 어쩌면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환상일까?
허나 눈을 감았다가 떠도, 제 눈앞에 놓인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에반은 쓰러져 있었고, 검을 놓친 두 손은 힘없이 땅에 엎어져 있었다.
“에반 프리드.”
그 이름을 다시금 부른다. 허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허공에 닿아, 이내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다치지 말라고 했잖아요.”
손목에 걸어주었던 손수건은 보이지 않았다.
잔뜩 핏줄이 돋아난 손엔 상처가 가득하여, 칠갑된 피만 보더라도 얼마나 격한 싸움인지 알 수 있었다.
무심코 뻗은 손이 얼굴이 닿았을 때 느껴진 한기에 입꼬리가 비틀린다.
“...하.”
자신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제 호위 기사가 이렇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
가슴이 답답했다.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쏟아내고 싶은데,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쏟아지는 숨이 잘게 떨렸다. 가슴을 움켜쥔다.
손에 쥐인 드레스자락이 구겨져 잔뜩 주름졌음에도 계속하여 옷자락을 쥐었다.
무사히 돌아오라고 말했는데. 결국엔 또 다시 이렇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하여,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그것이 소중했음을 깨닫는다.
텅 빈 마음에 한기가 감도는 듯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제 호위 기사를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것은.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처럼, 그렇게 다시 후회할 뿐이었다.
후회, 그리고 또 다시 후회. 회한으로 물든 푸른 눈동자가 일렁였다. 별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구름에 가려진 달은 더 이상 주변을 비추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오로지 붉은 색이었다. 붉은 색, 눈이 쌓인 흙을 움켜쥔다.
손톱이 파고들어 상처가 났던 손이 따끔거렸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언가가 끊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는다. 피를 바라보았기 때문일까. 어둠 속에서 녹색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붉은 색을 보았기에 남은 잔상일 터. 옅은 숨을 내뱉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여전히 검은 색, 빨간 색.
그리고 녹색이었다.
“아가씨...?”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만 같았다.
다시는 들을 수 없을 목소리라 생각했는데. 다시금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주변의 색이 흩어졌다.
시체처럼 누워있던 에반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본다.
이 어둠 속에서도 그 녹색만큼은 뚜렷이 보여서, 입술을 달싹인 채 멍하니 에반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잠깐 잠들었는데, 시간이...꽤 지났나 보네요.”
“...에반?”
“표정이 안 좋으신데,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트롤은 제가 잡았는데. 아, 로만 경은 저 쪽에”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생각보다도 몸이 먼저 움직여, 어느 순간 자신이 에반을 끌어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허나 놓을 수 없었다. 아까와는 달리 따듯한 체온이, 가슴에서 느껴지는 심장의 박동이.
이토록 사람을 안심시켜서,
그래서 놓을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줘요.”
이따금 내뱉어지는 호위 기사의 숨결이 제게 닿을 때면, 괜스레 가슴이 간질거렸다.
따듯했다. 겨울바람이 잔뜩 닿아 그토록 차가워진 몸이었건만.
그의 숨결은 그것과는 정반대로 따듯해 저도 모르게 안도하게 되었다.
이 손을 놓으면 그가 거짓말처럼 스러지는 것이 아닐까. 만약 자신이 보는 이 광경이 환상이라면.
“...저 어디 안갑니다.”
귀에 닿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에반이 옅게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제가 걱정시켜드린 겁니까?”
“...걱정 안 했어요.”
그러자 에반이 눈을 가늘게 뜬다. 사실 걱정하긴 했지만, 어쩐지 그렇게 말하기가 힘들었다.
구태여 걱정했다고 할 필요가 있을까. 그 눈을 빤히 바라보자, 이내 가늘게 뜬 눈이 곱게 휘었다.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던 그 얼굴이었다.
어둠이 걷어지는, 늘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그 미소를 볼 때면.
왜 항상 얼굴에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일까. 저도 모르게 뺨을 매만지기도 잠시, 이윽고 에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믿음을 못 드렸나 보네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아가씨의 호위 기사라고요.”
“......”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곁에 있겠습니다.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차라리 저번처럼 웃는 게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어찌 웃을 수 있을까.
자신의 옆에 있던 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텅 비는 것만 같았던 그 순간을 떠올리자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 순간이 방금이 아니었던가. 허나 지금은 놀라우리만치 아무렇지도 않아서, 이내 실소를 머금었다.
신기했다. 그저 한 사람일 뿐인데.
남들과 다를 것 없이 그저 한 명의 기사일 뿐인데도 이토록 자신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
그렇게 있기를 한참, 이내 들려온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가 들렸다.
“근데...이제 슬슬 떨어져 주시면 안 됩니까?”
“아...”
그 말에 몸을 떨어트리자, 그제야 숨을 토해낸 에반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쩐지 얼굴이 붉게 물들어 보이는 것은 자신의 착각일까. 그제야 주변이 밝게 보임을 깨닫는다.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별은 처음에 보았던 것처럼 반짝였고, 초승달은 자신의 희미한 빛으로 숲을 비추고 있었다.
붉게 물든 눈.
허나 더 이상 불길해보이지 않았다.
가슴에 맴돌았던 불안감도 사라져, 그저 빨갛다는 감상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붉은 빛을 바라보면 눈에 남는 것은 녹색의 잔상이었다. 세상이 녹색으로 물든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자 보이는 것은 자신을 응시하는 녹안이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라는 존재를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허나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이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 마음을 자각하는 순간, 이전과 같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수 없을 거란 두려움이 앞섰다.
눈을 감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델 경을 수습해라. 공작저로 돌아간다.”
호위 기사를 찾았으니, 이 일을 끝맺어야 하지 않겠는가.
로만, 그리고 흑마법과 트롤. 그 셋이 엮인 이 일이 그저 예삿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조사해봐야 겠지. 이 사냥제를 주최한 로만 공작가를.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아델 로만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에반을 바라볼 때와는 달리, 꽤나 차가운 한기가 눈동자에 감돌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