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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45화 (45/181)

〈 45화 〉 서임식(5)

* * *

사람의 체온이란, 단지 닿은 것만으로도 마음을 간질이게 만들었다.

겨울.

온기를 어느 때보다도 더욱 소중하게 만드는 이 계절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체온을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얼굴에 점차 열이 번져 오르는 것만 같았다.

폐 속을 채우는 바람은 이토록 차가운데, 내뱉는 숨은 그 무엇보다도 뜨거웠다.

힘겹게 토해낸 숨이 하얗게 새어나와 흩어진다.

주변에 어지러이 깔린 사람들이 천지였건만, 지금 당장은 맞잡고 있는 손이 신경쓰여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에스코트, 그런 명분을 내세우긴 했지만 일반적인 에스코트 보다는 훨씬 많은 면적이 닿아있었다.

꼼지락 거리는 아이린의 손가락이 손바닥을 간질일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솔직히 말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허나 그렇다고 잡은 손을 놓는 일은 없었다.

서로의 손이 떨어지려 할 때마다 약속하기라도 한 듯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이 우스워서,

나는 아이린을 힐끔 바라보며 이내 피식 웃어보였다.

귀끝이 붉게 달아오른 모습이, 허나 그럼에도 여전히 무감한 표정을 지은 그 얼굴이 귀엽게만 보였다.

부우우­

나팔 소리가 들린다. 내 서임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

거대한 정원에 가득 놓인 원탁과 원탁 사이엔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귀족들이 가득했다.

5대 가문을 비롯하여 황태자까지, 허나 그들과 마주치는 것은 별로 원치 않았기에.

우리는 어느 순간 서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빙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사람의 인적이 드문 정원, 이제 저물어가는 겨울에 서서히 꿈틀거리는 토양은 조금씩 녹색이 비춰 보이는 듯 했다.

하얗게 쌓인 눈밭. 아무도 오지 않아 발자국 하나 없는 그 정원을 밟으며,

그렇게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다과회를 하지 않았습니까.”

아이린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던 것이 그 때였던가.

그 이전만 하더라도 마주치기가 싫어 일부러 크리스 경과 훈련까지 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그 시선에 스산함이 섞이지 않은 것이 익숙했다. 아무런 감정도 없던 얼굴에 이제 감정이 비친다.

늘 수평을 그리던 입꼬리가, 이제는 서서히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랬죠.”

로페나와 아이린 얘기를 하다가 들켜 낭패했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이렇게 돌이켜 보니 결국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추억이었다.

추억, 그 단어를 듣자 가슴이 괜스레 뭉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추억을 쌓을 만큼이나 이 곳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니. 처음에만 해도 앞이 막막했건만,

이제는 익숙해져 나름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처음에만 하더라도 솔직히 금방 잘릴 줄 알았습니다. 그 때의 아가씨는...지금하고 조금 달랐으니까요.”

그 말에 아이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인 듯,

고개를 저은 그녀가 나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다 사과했던 일 아닌가요. 또 그렇게 끌고 와서 망신을 줄 필요는 없잖아요.”

“망신을 준다기보다는, 그냥 그랬다는 거죠.”

중세라는 시대에 처음 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는 거라곤 내가 호위하는 대상이 아이린인 것과 미래의 사건들.

호위 기사에서 쫓겨나면 용병일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던 걸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는 것을 체감하곤 했다.

뽀드득­

하얀 눈을 밟는 순간마다, 그동안 이 곳에서 겪었던 기억들이 하나씩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처음 내 방에서 눈을 떴을 때, 스스로의 이름이 에반 프리드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

아이린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눈에 담긴 것이 혐오와 짜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수정궁으로 향할 때 보았던 그 별이 흐르던 광경을, 수정궁의 발코니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나는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늘 더울 거라 생각했던 여름이 이렇게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된 것처럼.

아이린 또한 천천히 변해갔다. 그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냥 조금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흘러 마주한 아이린은 그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예 다른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늘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걷어져, 이제는 나름 미소를 지을 줄도 알지 않은가.

미소, 그 단어를 떠올리자 괜스레 우스운 기억이 떠올라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이린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때나는 어깨를 한차례 으쓱이며 장난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억하십니까? 그 왜, 제 생일 때.”

“...생일?”

“제가 문을 딱 열고 들어갔는데, 아가씨가 거울 보면서 웃...아,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시선에 손사래를 치자, 아이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해하기 힘든 건 사실이었다.

설마 정말로...내가 웃어 달라 한 그 말에 거울을 보며 연습을 하고 있던 걸까.

허나 그런 것보다는, 당장 토라져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는 아이린 쪽이 먼저였다.

아예 고개를 돌려 내 쪽은 바라보지도 않는 주제에, 손은 여전히 잡고 있는 것이 우습긴 했지만.

그래도 토라진 모습을 계속 보고 싶진 않았다. 이제 곧 있으면 단상인데, 어색하게 헤어질 수는 없지 않은가.

“아가씨.”

조용히 아이린을 불렀지만, 아이린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어갈 따름이었다.

또다시 일직선을 그리고 있는 입꼬리를 보자 괜스레 기분이 가라앉아서,

나는 잡고 있던 손을 당겨 아이린을 내 쪽으로 끌어 당겼다.

안기지 않을 만큼, 서로의 간격에 자그마한 돌멩이가 겨우 들어갈 만큼 가까워지자그제야 눈을 크게 뜬 아이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에반, 도대체 지금 이게 뭐하는­”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손을 잡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아이린의 입꼬리에 손가락을 올린 채 살짝 잡아 당겼다.

우스꽝스런 얼굴, 한 쪽의 입꼬리만 어색하게 올라간 그 모습을 보자 또다시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일렁이는 푸른 눈을 바라보다, 이내 붉게 달아오른 뺨을 보곤 옅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웃는 쪽이 잘 어울리십니다.”

“......무, 무슨. 그런 말 한 적 없잖아요.”

“그럼 지금 하겠습니다. 웃는 쪽이 훨씬 잘 어울리십니다.”

토라진 것을 풀어주려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 쪽이 잘 어울리기도 했다.

이렇게 수평을 이룬 입꼬리보다는, 가볍게나마 웃는 쪽이 훨씬 낫지 않을까.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친 아이린은,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가 시선을 돌리며 자기 얼굴에 놓인 내 손가락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알았어요...그러니까, 이 손 좀 치워봐요.”

“이제 좀 기분이 풀리셨습니까?”

“애초에 토라진 적도 없어요. 내가 무슨 로페나도 아니고, 그런 거에 토라질 거라 생각했나요?”

“불러도 대답을 안 하시길래.”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나를 잠시 째려보던 아이린이 이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내 곁에서 떨어져 거리를 벌렸다.

방금 내 가슴팍에 닿았던 손이 신경 쓰였는지, 자신의 손을 쳐다본 아이린이 이내 고개를 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기분 풀렸으니까, 다시 가죠.”

“그걸 원하신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그렇게 걷기를 한참. 처음 나와 아이린을 감쌌던 어색한 공기는 어느새 흩어진지 오래였다.

찬바람에 얼굴이 닿아 흩어졌지만, 같이 있는 사람이 이끌어내는 온기에 금세 그 추위를 잊곤 했다.

허나이 순간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기에.저 멀리서 보이는 단상을 바라보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상에 올라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이린 혼자였다.

나는 아이린과 달리 반대쪽,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출발하여 걸어가야 했으니까.

아이린 또한 그걸 떠올렸는지,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아쉬워하는 걸까. 허나 그 무감한 표정에서 아쉬운 기색은 딱히 보이지 않아 나는 한차례 쓰게 웃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인 아이린은 다시 입을 다물곤 등을 돌렸다.

무어라도 말해주었으련만, 허나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아이린이 떠나는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미련이 조금 남는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텅 비어버린 손을 잠시 매만지다가, 등을 돌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같이 올 때만 하더라도 꽤나 짧은 길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혼자 걸으니 턱없이 긴 길이었다.

눈길을 걷는다. 아이린이 밟아 생겨난 그 작은 발자국을 거꾸로 밟아 나가면서,다시금 그 위에 커다란 발자국을 새긴다.

바람이 차가웠다.

#

서임식.

제국에서 가장 어린 기사의 서임식이며,

가장 훌륭한 재능을 지닌 기사이자 흑마법사를 처치한 영웅의 서임식을 바라보기 위해 수많은 귀족들이 몰려왔다.

메디브, 킬로그, 그리고 하탄과 로만.

제국을 수호하는 5대 가문과 그 외 수많은 유명인들이 왔지만 당연하게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황실을 상징하는 용의 깃발이었으니,

그 깃발 아래 서있는 황태자의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일었다.

“드디어 왔군.”

뿌우우­

그 어느 때보다도 커다란 나팔 소리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서임식의 주인공, 에반 프리드가 등장했음에 도열된 기사들이 박자에 맞춰 창을 바닥에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 쿵­

심장이 뛴다.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보내는 뜨거운 시선.

그리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기대와 압박감. 5대 가문과 황실이 보내는 주목이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허나 가슴을 당당히 편 채로, 연습했던 걸음걸이로 앞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여기서 흐트러지면, 이제는 유리스가 흐트러지는 것이 아닌가.

조금 부담스러웠지만,지금 이 순간 모든 집중을 몸가짐에 쏟아부었다.

허리춤에 들린 검, 유리스의 상징인 가시 방패 문양이 가운데에 새겨진 그 검을 매만지며.

천천히 호흡을 조절했다. 처음 에반 프리드로써 눈을 떴을 때가 생생했으나이제부터가 모든 것의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절멸이라는 이름, 그리고 흑마법사. 원작 여주가 등장하기까지 앞으로 4년이란 시간이 남았다.

무언가를 시도한다면, 그리고 미래를 바꾸려 한다면 그 4년 안에 무언가를 해야 했다.

유리스의 기사이자, 아이린의 호위 기사가 되는 오늘. 그 준비의 시작은 아마도 오늘부터 이루어지리라.

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시선을 느꼈다.

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지는 기척.

하여 웃었다. 오로지 단 한 사람만 눈치 챌 수 있도록, 저 멀리 있는 한 사람에게만 보이도록 옅게 웃어보였다.

‘아이린.’

붉은 색의 카펫이 끝나고, 이내 단상 앞 계단에 다다랐을 때.

유리스의 가주인 가롯 유리스가 앞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웠던 좌중에 일순간 고요가 퍼진다. 정적. 그렇게 주변이 고요로 물들어졌을 때 공작이 입을 열었다.

“에반 프리드.”

“...네.”

“프리드 백작가의 둘째 아들이며, 에반젤리움의 빛을 머금은 이 이자, 유리스의 가시에 피를 쏟은 기사여.”

그가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서임식에 앞서 유리스에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일종의 서약.

이 서약을 마치는 그 순간부터, 나는 유리스의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쿵­

다시금 기사들이 창을 땅에 내리꽂자, 공작이 입을 열어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대의 피는 지금까지 평범했으나, 앞으로는 강철처럼 굳세고 용맹한,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차갑고 또한 날카로운 철혈이 될 지어다. 이를 검에 대고 맹세할 수 있겠는가?”

“맹세할 수 있습니다.”

무릎을 굽혀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손을 뻗어 심장에 가져다 댄다.

박동하는 심장, 그리고 피어오르는 마나. 이윽고 몸에서 하얀색의 염화가 일었을 때,

공작이 손에 들린 검을 하늘에 뻗으며 크게 소리쳤다.

“보아라! 철혈은 이어진다. 오늘도 또다시 한 사람의 기사에게 철혈이 흐르기 시작했다. 축복하라! 에반젤리움에 심장을 바칠 방패가 오늘로 하여금 또다시 늘어났으니, 제국의 방패는 언제까지고 굳건할 지어다.”

쿵­

입고 있던 제복의 가슴팍에 있는 문장이 새하얗게 빛나게 시작했다.

서임식에 앞선 서약, 그 서약을 끝마친 지금 이 순간.

마법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몸에 새겨져 내 몸에 문양을 새긴다.

가시가 둘러진 방패, 이윽고 가슴의 살점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사라졌을 때 자연스럽게 내 몸에 문장이 새겨졌음을 알 수 있었다.

제복의 가슴팍에 달려있던 문장이 내뿜던 빛이 사그라들자,

저 멀리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끓었던 무릎을 들어올린다.

이제는 선명하게 보이는, 유리스의 문장을 바라본 그녀가 조용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주 잠깐의 순간. 허나 나는 그녀가 지은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아주 옅게, 내가 단상으로 올라오며 지었던 미소에 보답하듯 짧게 보여준 그 미소에 나는 다시금 미소지어보였다.

척­

계단을 밟으며, 그렇게 천천히 올라간다. 사람들의 시선이 오로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끌어올린 마나를, 그로 인하여 화려하게 피어오른 화염이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었다.

허나 오로지 내 시선은 단 한 사람을 향했다. 아이린 유리스, 그 이름을 떠올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계단을 전부 올랐을 때. 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과 마주한다.

겨울을 닮았다. 늘 그렇듯이 차갑고,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서늘한 시선이었지만.

그럼에도 따스한 무언가를 담고 있는 눈이었다. 웃을 때면 곱게 휘어졌고, 슬플 때면 일그러져 눈물을 흘리는 두 눈.

때로는 눈이 내리고, 살을 저미는 혹한을 품는 것이 겨울이었으나결국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따스함이 있지 않던가.

그 겨울을 닮은 눈을 바라보며 나는 무릎을 꿇었다.

툭, 아이린이 들고 있던 검이 어깨에 닿았다.

어깨에 닿은 검은 내가 앞으로 지녀야 할 책임을 의미했다.

머리에 닿았다.

머리에 닿은 검은 내가 앞으로 호위 하기 위해 늘 생각해야 할 모든 것을 의미 했다.

가슴에 닿았다.

앞으로의 맹세, 꺾이지 않는 마음을 의미했기에.

꿇었던 무릎을 펴면서, 그렇게 아이린 앞에 일어섰다.

화르륵, 다시금 마나를 끌어올린다. 몸에 피어오른 염화가 주변을 감싸, 이내 단상 위를 새하얗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맹세합니다."

이제부터 내가 유리스의 기사임을.

철혈이 흐르며, 에반젤리움을 수호하는 방패의 일원이 되었음을.

허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나는 조용히.

오로지 아이린만이 들을 수 있을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제가, 당신을 앞으로 영원히 지킬 것임을."

맹세합니다. 그렇게 덧붙임과 동시에 폭죽이 터졌다.

겨울과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꽃잎들, 마치 눈처럼 휘날리는 그 꽃잎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아이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새하얗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눈처럼 내리는 꽃잎을 보았음에도, 아이린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토록 화려하게 주변을 장식하는 꽃잎인데도,

그런 것보다도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아이린이었다.

...자각한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꽤나 힘든 일이었다.

언젠가부터 시야에 들어온 그녀에게 품는 감정이 단지 동정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연민, 동정, 그리고 연심.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이어질 수 있는 마음일까.

허나 당장은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저 이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올 때면.

그리고 그 봄이 몇 번이고 지나 다시금 그녀가 완전히 비극에서 벗어났을 때.

아마도 그 때가 되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텅 빈 손을 움켜쥔다. 아까의 그 온기를 기억하며, 그렇게 다시 미소짓는다.

지금은 이걸로 만족했다. 적어도,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음에 만족할 따름이었다.

저 푸른 눈에 깃든 반짝임이 흩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희미하게 지어진 미소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게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봄이 온다.

그리고 그 봄이 올 때, 나는 그녀의 곁에 있을 터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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