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흐르는 별 아래에서(1)
* * *
서늘한 공기가 뺨을 간질인다. 허나 겨울과는 달랐다.
건조하지 않은 바람, 뺨을 부드럽게 감싸 포근히 안아주는 이 바람은 오직 봄에만 느낄 수 있는 바람이었다.
눈 사이에 파묻혔던 토양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오랜 잠을 자던 동물들이 제 몸을 일으켜 흙 위로 머리는 드는 계절.
벌거벗은 나무가 옷을 꺼내입고, 새들이 깃털을 쪼아대며 새로이 단장하는 계절.
겨울에 떠나갔던 새가 다시금 돌아오는 모습을 볼 때면, 드디어 계절이 바뀌었음을 체감하곤 했다.
봄이 왔다. 그 말인즉슨, 내가 이 곳에 온지 1년이 되어간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나무에 푸른 녹음이 울창하게 피었던 모습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나무 끝자락에서 피어나는 노오란 꽃을 보니 괜스레 가슴이 울렁거렸다.
1년이라,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었다.
아직 내가 유리스의 기사라는 것조차 그리 실감이 되지 않기도 했으니까.
허나 꽤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당장 이 주변에 보이는 풍경도,
얼어붙었던 강이 녹아 흘러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하는 녹색의 생명들도.
내 마음가짐 또한 꽤나 달리지 않았던가.
허나 그 무수한 변화 속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하나를 찾자면, 그건 바로 로페나였다.
와그작
볼 가득히 쿠키를 집어넣은 채 헤실헤실 웃고 있는 녀석.
맨날 저렇게 먹으면서도 체형을 유지하는 것이 신기하긴 했지만,
더욱 신기한 건 전속 시녀인 주제에 이렇게 여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점이었다.
허나 아이린도 로페나에게 별 말이 없으니, 괜히 내가 무어라 할 필요도 없겠지.
쿠키를 마치 다람쥐처럼 먹는 로페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그 자그마한 얼굴이 붉어졌을 때 즈음 자연스럽게 우유가 담긴 컵을 밀어주었다.
“흐읏, 아으. 고마워요.”
“좀 천천히 먹어. 안 뺏어먹으니까.”
“버릇이 돼버려서, 저도 모르게 막 욱여넣게 되는 거 있죠.”
그런 버릇은 필요 없는데, 켁켁 거리며 가슴을 두드리는 로페나를 지그시 바라보기도 잠시
로페나의 목에 걸린 작은 목걸이를 보곤 옅게 미소 지었다.
저번 생일 때 사주었던 건데, 그래도 아직 끼고 있었구나.
평소에 목이 휑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먹을 것을 사줘도 좋아하겠지만...먹을 것은 그 때 잠깐 좋은 거니까.
어차피 봉급은 차고 넘쳤고, 여차하면 아이린에게 지원 또한 받을 수 있는 터라 간단하게 목걸이 하나를 선물해주었다.
반응이야, 뭐. 지금도 저렇게 끼고 있는 걸 보아하니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절로 흐뭇한 미소가 새어나와 피식 웃자, 로페나가 그걸 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왜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아니, 목걸이 잘 차고 있어서.”
“기사님이 주신 거니까요. 항상 안 잃어버리게 이렇게 차고 있다구요.”
그렇게 말한 로페나는 이내 목걸이를 자랑하듯 가슴을 활짝 폈다.
목에 걸린 은색의 목걸이가 찰랑이자, 녀석은 손으로 목걸이를 매만지며 씨익 웃었다.
“잘 때도 차고 있어요. 혹시나 잃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그래, 네가 좋으면 다행이지.”
사실 선물을 준비할 때만 하더라도 고민이 많았는데, 이리 좋아해주니 내 마음이 편할 따름이었다.
생일이 아니더라도 진즉에 하나 선물해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고보니 생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아이린 생일이 아마 이번 달이었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 무얼 준비해야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애초에 아이린이 무얼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지 않던가.
평소에 무언가를 보며 티를 내는 편이 아닌 그녀였으니, 무언가를 선물하려해도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로페나에게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왠지 괜스레 내 마음을 티내는 것 같아 꺼려지기도 했고.
크리스 경은 애초에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으니까.
당사자에게 물어본다는 선택지는, 당연하게도 떠올리자마자 기각 당했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 아마 나무 끝에 매달린 저 꽃이 완전히 필 때면 아이린의 생일이지 않을까.
무언가 나들이라도 가면 좋으련만,
흑마법사가 나타난 이후로는 외출을 자주 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아이린은 항상 집무실에만 있을 따름이었다.
마음을 자각했지만, 그것은 나 스스로의 마음뿐이었다.
이 마음속에 있는 것이, 늘 아이린을 볼 때면 가슴을 간질이는 감정이 연심임을 깨달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그걸 티내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흑마법사, 원작이 시작되면 벌어지는 사건들.
게다가 그녀의 약혼자까지. 이 마음이 닿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지금 당장은 고개를 단호히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입 안이 썼다. 허나 그렇다고 곧바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저 옅게 한숨을 내뱉으며 로페나가 먹던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 안 뺏어먹는다면서요!”
“하나만.”
“안 돼요!”
얼마 남지 않은 여유였건만, 이 여유가 이토록 따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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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멍하니, 그렇게 허공을 응시한다. 언제나 봄이 온 뒤로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이기 마련이었다.
그건 올해도 빗겨나가지 않아서, 이따금 책상에 가득히 쌓인 서류더미를 볼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지곤 했다.
도대체 가신들은 무얼 한단 말인가? 때로는 불평도 하고 싶었지만,
그 가신들조차 이보다 더 많은 것들을 처리하고 있음을 알기에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여유는 흔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 허나창밖으로 보이는 봄의 잔향은 딱딱하게 굳은 몸을 풀어주는 데에 제격이었다.
봄이라, 그 생각에 헛웃음을 흘린다.
도대체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흐른 것일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영원히 멈춰있는 것처럼 흐르지 않던 것이 시간이었는데.
눈이 가득히 쌓였던 겨울이 지나 이렇게 봄이 왔음을 깨닫자 괜스레 기분이 가라앉는 듯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격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공작령에서 처음 나타났던 흑마법사, 허나 이제는 종종 나타나 황실 기사단이 처리하고 있지 않던가.
...무언가가 걸렸다. 아델 로만, 트롤과 만난 뒤 아직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면 늘 꺼림칙한 기분이 들 따름이었다.
과연 트롤에게 한 번 직격 당했다한들 그렇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라 할 수 있는가?
단 한 번, 여러 번도 아니고 단 한 번 맞아 기절한 것이 아델 로만이었다.
익스퍼트의 기사가 지닌 몸이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었음을 잘 알려져 있지 않던가.
허나 몇 달이 지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로만가 또한 의아함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것뿐 만이 아니야.’
킬로그와 메디브. 두 가문은 조금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무얼 준비하는지는 몰라도, 흑마법사가 이렇게 나타난 지금 어찌하여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상황을 늘 최악이라 가정한다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유리스를 제외한 나머지 5대 가문 전부가 흑마법사와 결탁한 것이라면, 과연 유리스는 어떻게 대응해야 한단 말인가?
흑마법사를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흑마법사와 마법전에서 압도할 수 있는 마법사, 그리고 기사. 그게 아니라면 개개인의 무력이 출중한 기사단.
허나 황실이 아닌 이상 그 모든 것을 지니고 있는 가문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
물론 흑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는 기사는 있었지만.
...그건 별로 고려하고 싶지 않았다. 옅게 한숨을 내뱉는다.
아직도 베르뎅 산에서 보았던 광경을 잊지 못했는데, 어찌 그를 쉽사리 보내줄 수 있을까.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에반이 나가는 일은 없을 터였다.
“고민이 많아 보이십니다.”
“...그냥,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으니까요.”
작게 중얼거리자, 크리스 경은 이내 피식 웃으며 창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또한 봄이란 계절에 무언가를 느끼는 것일까. 갈색의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일었을 때,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최근에 아가씨도 그렇고, 에반도 그렇고 꽤나 지쳐 보이더군요. 가끔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럴 여유가 있으면 진즉에 그리 했겠죠. 허나 시간이 없네요. 에반도 저도, 각자 무언가를 할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크리스 경이 말하는 이유를 짐작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으나,
여유를 가지기란 그 어떤 것보다도 어려운 것이었다.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일까.
물끄러미 서류더미를 바라보기도 잠시, 이내 귓가에 다시금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당장은 무리지만, 아가씨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잖습니까. 그 때 조금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얼마 남지 않긴 했죠.”
일주일 정도 남았던가. 문득 달력을 바라보자 한 구석에 동그랗게 표시가 돼있는 날이 눈에 띄었다.
로페나가 표시한 것처럼, 빨간 꽃이 그려진 날짜.
'아가씨 생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깟 생일이 무어라고 이렇게 오두방정을 떨며 표시까지 해두었는지.
크리스 경이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잊었을지도 몰랐다.
그저 자신이 태어난 날, 다른 귀족들이 쓸모없는 선물을 보내 그걸 처리하느라 시간을 쏟는 날이 아니던가.
허나 요즘에는 생일이라는 그 단어가 유독 새롭게 다가오는 듯 했다.
에반의 생일을 겪어서 일까.아니면, 그날 자신이 들었던 말 때문일까.
허나 분명한 것은 생일이란 것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감상이 조금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기대, 그런 것은 하지 않았다. 괜한 감정을 품었다간 되려 커다란 실망을 안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허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릴 때면. 저도 모르게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쩌면 그저 착각일지도 몰랐다. 봄은 그의 녹안과 잘 어울리는 계절이었으니까,
그 추운 겨울에서도 홀로 따스함을 지니고 있던 것이 에반이지 않았던가.
상념을 털어낸다. 허나 그럼에도 떠오르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어지럽혀서, 이내 눈살을 찌푸린 채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일날 생각해보죠. 아직, 생일은 한참이나 남았으니까요.”
“조금은 쉬엄쉬엄 하시는 게 좋습니다. 에반이 늘 걱정하고 있으니까요. 저번에도 일 하시다가 쓰러지시지 않으셨습니까.”
“...에반이 또 쓸데없는 소리를.”
별로 남들에게 알리고 싶진 않았는데. 크리스 경이 자신을 이리 신경 쓰는 이유가 그런 것이었나.
허나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몸을 덮었던 담요의 감촉이 생각나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바람은 이토록 서늘한데 얼굴은 뜨겁다니.
이 상황이 우습게만 느껴져 헛웃음을 흘리자, 크리스 경이 따라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요즘 들어 자주 웃으시는 것 같습니다.”
“......글쎄요.”
“에반하고 있을 때면 더욱 그러하지 않습니까. 근데, 어째 로페나랑은 요새 별 대화가 없으시더군요.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가. 그렇게 생각하자 떠오르는 기억에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사실 별 일이라 할 것도 없었다. 그저, 로페나가 생일 때 자신의 목걸이를 자랑했던 것뿐이 아니던가.
기사님이 선물해주셨어요. 어때요?
아주 해맑게. 평소에는 볼 수 없던 미소를 지으며 제 목걸이를 자랑하던 그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별 일도 아니었다. 그저 칭찬 한 마디 해주면 되는 것이 전부인데,
어찌하여 기분이 나빠진 것인지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자신이 왜 그랬을까. 스산해진 눈빛에 주눅이 든 로페나의 얼굴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사과하긴 했지만, 어색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는 힘들었다.
에반이 선물해주었다는 그 말에 갑작스레 기분이 가라앉은 탓이었다.
이유는 몰랐지만, 단지 그 한 마디에 감정이 치솟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로페나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따로 주긴 했으나...가끔 로페나가 저를 볼 때 몸을 움찔 거리는 것이 영 거슬렸다.
"에반은 어디에 있죠?"
에반의 탓이었다. 그가 로페나에게 목걸이를 선물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 전에 에반에게 오는 편지가 수북히 쌓인 모습을 자신이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로페나에게 괜히 그런 반응을 하지 않았을 터였다.
퉁명스런 목소리로 묻자, 피식 웃은 크리스 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 곧 올겁니다. 곧 교대시간이 다가오니까요."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던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자, 어느덧 어렴풋이 지는 태양이 노을을 만들어내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참으로 빨랐다. 무엇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건만,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천천히 숨을 죄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제 생일 때 과연 편히 쉴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하리라. 생일이라 해봤자 다른 귀족들이 준 선물을 받는 것만 겨우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밖으로 나가, 흐드러지는 꽃을 구경하는 것도 물론 좋겠지만.
그런 일이 있을 확률은 아마 희박하겠지. 차갑게 가라앉은 기분 탓일까, 스산해진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적막이 흘렀다.
예전에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살았는데, 이젠 이런 분위기가 어색하게 느껴지다니.
아마도 에반을 만난 뒤에 겪은 변화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반 프리드.
그 이름을 잠시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귓가에 들려온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에반입니다."
"들어오세요."
이내 문이 열리고, 그 문 너머에 익숙한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전히 새하얀 얼굴, 따스한 녹안. 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을 볼 때면 괜스레 가슴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분명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에반을 생각하며 짜증을 냈건만, 어떠한 이유로 마음이 이리 쉬이 변하는 것인지.
허나 그걸로 되었다.
이렇게 그가 곁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단지 그의 가슴팍에 유리스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편해졌으니까.
자신을 바라보는 녹안을 지그시 응사하다가, 이내 옅게 미소지어 보였다.
크리스 경이 한 말이 귓가에 맴도는 것도 같았다.
요즘 들어 자주 웃는다고 하였던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에반과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져 입꼬리가 가벼워지곤 했으니까.
스산해졌던 분위기가 한층 옅어져, 다시금 봄의 온기가 방을 뒤덮기 시작했다.
더 이상 바람은 차갑지 않았다.
이따금 흘러들어오는 바람에 꽃잎이 섞여들어오는, 그런 분홍빛의 바람이 부는 지금은.
분명 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