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48화 (48/181)

〈 48화 〉 흐르는 별 아래에서(3)

* * *

식당을 나섰음에도 밖은 여전히 환했다.

애초에 정오를 조금 지났을 때 나오지 않았으니, 아직까지 밝은 하늘을 바라보던 아이린이 작게 입을 벌렸다.

“...공작령엔 제가 알던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네요.”

“서류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가령 이 식당이 그랬고, 이외에도 그녀가 모르는 것들이 이 거리에 수두룩했다.

축제가 열리거나 기념일이었다면 그런 것들을 조금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오히려 이 한산한 거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사람들의 발 소리, 고요 속에서 건물들을 스쳐지나가는 바람 소리.

정각을 알리는 시계탑의 종소리까지.

사람이 북적일 때면 자신의 목소리조차 그 소음 속에 파묻혀 듣지 못하곤 했지만,

이렇게 조용할 때에만 듣고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 오히려 지금 나온 것이 좋지 않겠는가.

허나 이대로 걸을 수만은 없어서, 나는 아이린을 바라보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처에 호수가 하나 있는데, 구경 한 번 해보시렵니까?”

“호수?”

“꽤나 유명하지만, 이 식당처럼 아는 사람들만 가는 곳이죠. 아마 실망하진 않을 겁니다. 지금 즈음이면 물도 전부 녹았을 테니까요.”

호수가 하나 있었다. 평범한 호수가 아닌, 오직 이 북부에서만 볼 수 있는 호수.

예전에 용 하나가 깃들어 아직까지 호수 밑바닥에 잠들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오는 곳이었다.

한 번 본 사람들은 마치 홀린 듯 다시 찾아가게 된다며 세이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이따금 허황된 소문 또한 들려오곤 했다. 용이 만들어낸 마법이 아직까지 있어,

그곳에 있는 사람이 염원하던 풍경과 분위기를 만들어준다는 소문 이라든지.

아니면 평소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마법과도 같은 광경을 볼 수 있다든지.

허나 그런 허황된 소문과는 달리. 그 호수가 아름답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밥을 먹었으면 조금 걷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해 그리 말했는데,

아이린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죠.”

그 간단한 승낙에 미소가 지어진다. 이 시간을 조금 길게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로페나와 크리스 경 없이 이렇게 나올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호수, 구태여 그런 장소가 있다는 얘기를 꺼낸 것은 당연하지만 내 사심에서 튀어나온 말이나 다름없었다.

식당이 있던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아까보다는 사람이 조금 많아진 광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점심을 먹기 위해 슬슬 나온 사람들일까, 저 멀리서 뛰어가는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기도 잠시.

한쪽에 세워진 천막을 쳐다본 아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건 뭐죠?”

그 말에 시선을 돌리자, 이내 아이린이 가리킨 곳에 있는 보라색의 천막이 눈에 띄었다.

척보아도 점술과 관련된 곳이 아닐까. 이런 곳에 저런 게 있는 것이 퍽 신기하긴 했지만,

그래도 뭐...없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마법이 있는 세상이었다. 점술 정도야 있을 만도 했으니까.

보라색 천막 위에 달린 별자리의 모습은 분명 점성술사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증표였다.

점성술이라 하면, 보통 별을 보고 무언가를 점치는 이들의 것이 아니던가.

내가 그리 설명하자, 짧막한 설명을 들은 아이린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착각,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반짝였다. 이따금 아이린이 흥미를 보일 때면 변하는 눈동자.

푸른 눈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곤 피식 웃자, 이윽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에반은 저런 거에 관심 없나요? 점성술이라던지.”

“별을 좋아하긴 합니다. 그런데 점성술은...글쎄요.”

생각해보면 나쁠 것도 없었다. 호숫가를 돌고 난 뒤에는 무얼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저런 것을 한 번 즈음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허나 아이린은 내가 그런 것에 흥미가 없다 생각했는지, 이내 입을 꾹 다문 채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눈이 그토록 반짝였건만, 순식간에 변한 태도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금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한 번 정도는 괜찮겠죠.”

“한 번만 해볼 생각이에요.”

세상에 점술을 두 번 연달아 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허나 아이린의 시선은 이미 그 점집에 닿아있어서, 당장이라도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보였다.

점술이라, 사실 원래 세계에 살 때 점집에 꽤나 자주 갔던 것 같았다.

연애나 가정과 관련된 것보다는, 콩쿠르에서의 우승 확률을 물어볼 때였지만.

그나저나 무슨 애기를 듣게 되려나.

그렇게 조심스레 천막의 문을 젖히고 들어가자 누가 보더라도 점성술사라고 생각할 만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코에는 안경을 걸친, 새하얀 수염이 길게 늘어진 노인.

이윽고 노인의 보랏빛 눈이 우리를 응시했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나는 놀란 나머지 입을 작게 벌리고 말았다.

“손님이군. 그래서, 연인?”

#

제국의 대마법사라고 불리던 한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귀찮게 구는 제자들을 피해 여러 곳을 방랑하는 늙은 이에 불과했으나, 이따금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아제스트 머윈, 모두가 자신을 그렇게 찾았지만. 자신은 그런 명예보다도 자신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먼저 찾고 싶었다.

‘용의 흔적.’

제국이 건립될 때 사라진 용들, 허나 과연 그것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제국의 전력으로는 불어나는 흑마법사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제국의 전성기였던 그 때에도 겨우 물리쳤건만, 서서히 스러져가는 제국의 현 상황에서 흑마법사들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용이 가지고 있는 성질인 ‘정화’. 어둠을 몰아내는 그 순수한 마나의 힘이라면, 흑마법사를 능히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하여 예전에 용이 잠들었다는 호수를 찾기 위해 유리스까지 온 지금,

낮에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한때 배웠던 점술을 이용하여 작은 점집을 차렸다.

생각보다 여행 경비가 꽤나 부족한 탓에 급전을 챙기려 한 것인데...

사람의 발길이 뜸했던 천막의 문이 열린 순간, 손님을 맞이하려던 아제스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거물들이 왔군.’

유리스의 소가주 아이린 유리스와 그녀의 호위 기사인 에반 프리드.

비록 수도에서 떠난 지 꽤 시간이 흘렀으나, 현재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다 할 수 있는 두 사람을 어찌하여 모르겠는가.

신분에 비해 수수한 옷을 입은 걸 보아 몰래 나온 듯한데,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기류가 미묘했다.

‘...소가주의 성격이 그리 좋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표정이 꽤 밝아.’

유리스의 소가주를 본 기억이라곤 예전에 한 번 뿐이었지만, 그 때와는 분위기가 꽤 다르지 않은가.

그 때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날카로운 얼음을 보는 듯 했다면,

지금은 그 때의 날카로움이 모두 사라져 한창 때의 소녀로 보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호위 기사.

흑마법사와 관련된 사건 두 번을 모두 해결한 이, 아마도 황태자와 비슷한 무력을 지닌 기사.

천재, 여러가지 수식어가 떠올랐지만.

그보다도 관심이 가는 것은 에반 프리드라는 기사가 지닌 하얀색의 마나였다.

서임식을 할 때 공개되었다 알려진 그 순백의 마나는, 분명 일반적인 사람이 지닌 것과는 꽤나 달랐으니까.

생각해보면 프리드라는 가문 자체가 자신이 연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던가.

허나 상념은 이내 흩어졌다.

그런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두 남녀의 시선에 몸이 움찔거렸기 때문이었다.

한쪽은 흥미에 젖어 반짝이는 눈, 다른 한쪽은 그런 여인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눈.

아무리 봐도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지 않은가?

“손님이군. 그래서, 연인?”

하여 묻자, 당황한 에반이 입술을 작게 벌렸다. 아무래도 아직 연인까진 아닌가 보군.

약혼자를 두고도 따로 연애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니 혹시나 했는데.

잠시 생각을 정리한 아제스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럼 묻고 싶은 것이 따로 있나? 정 없으면 가장 인기 있는 것을 물어봐도 상관없는데.”

“가장 인기 있는 게 뭐죠?”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연애점이지.”

아이린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연애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었다.순간 에반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지만.

아이린은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다른 건 없나요? 연애점 말고.”

“재물운이나, 어디 시험을 치룬다든지, 아니면 앞으로 자신의 지위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정도는 가능하지.”

허나 유리스의 소가주가 재물따위에 관심이 있겠는가.

한차례 씨익 웃은 아제스트는 고민에 잠긴 아이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미 선택지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옆의 호위 기사도 그 쪽을 궁금해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렀을 때, 생각을 마친 아이린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연애점으로 하죠.”

재물운이나 시험 성적 따위를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미래에 대해 물어보고자 하는 마음이 컸는데, 점쟁이가 제시한 것 중 미래와 관련된 것은 연애운 뿐이지 않은가.

하여 골랐을 따름이었다. 눈앞에서 녹색 빛이 아른거렸지만,

애써 무시한 아이린은 이내 점쟁이가 수정구를 다루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별이라는 것을 꼭 밖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지.”

점성술이란 별을 토대로 하는 것이었지만, 꼭 밤에만 별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법이란 기적이 있는데 무엇하러 밤까지 기다린단 말인가.

점성술사들은 대부분 뛰어난 마법사였다. 하지만 자신은 대마법사, 그 점성술사들보다도 점을 잘 치룰 자신이 있었다.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자 천천히 별의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밤하늘을 그대로 따온 것처럼 변한 수정구에 에반이 감탄하기도 잠시, 별의 모습을 본 아제스트가 한 차례 쓰게 웃어보였다.

‘...이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수많은 연인들의 점을 보았으나, 이토록 애매한 점괘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더욱이 신기한 건 두 사람의 점을 따로 보았음에도 판에 찍어낸 듯 똑같이 나왔다는 점이 아닐까.

잠시 헛기침을 내뱉은 아제스트는, 이내 아이린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신기하군. 두 사람의 점을 따로 보았는데, 어째 똑같이 나왔어.”

“벌써 점괘가 나온 건가요? 생각보다 빠르네요.”

“내가 그리 실력이 없지는 않소. 그나저나, 둘이 같으니 동시에 말해도 되겠소?”

아이린은 잠시 에반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점괘가 같다는 것이 신기하긴 했으나 그저 점일 뿐이 아닌가.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숨을 고른 아제스트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연애에 관해서는, 미안하지만 꽤나 험난하다고 할 수 있겠군. 고난이 너무 많아. 많은 피를 흘릴 테고, 또 많은 적들이 도사릴 걸세. 혹시 가문의 원수와 사랑하는 것을 원하기라도 하는 건가?”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아이린이 원수는 아니지 않은가. 점쟁이가 한 말에 잠시 눈살을 찌푸린 에반의 머릿속은 꽤나 복잡했다.

많은 적들이 도사리는 거야 그렇다 치고, 많은 피를 흘린다니.

자신이 흘리는 것이라면 큰 상관이 없지만 아이린이 흘리는 건 문제가 있었다.

점괘가 같다, 라. 그 말을 곱씹기도 잠시, 이어지는 점쟁이의 말에 에반의 눈이 크게 뜨였다.

“허나, 만약에 그 결실이 맺어진다면. 물론 그 결과까지 다다르는 과정을 결코 순탄치 않을 걸세. 어디까지나 만약에를 가정한다면...꽤 보기 좋을 것 같군. 아마도 그 사람과 불화가 일어나는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거라 할 수 있을 거야.”

결실. 그 단어를 생각한 에반은 어깨를 으쓱인 채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힘들 거라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점괘를 듣게 될 줄이야.

‘맺어진다면 좋다.’ 라는 말은 딱히 위안이 되지 못했다.

조금 들떠 있던 기분이 착 가라앉아 에반의 표정이 덩달아 어두워지자,

껄껄 웃은 아제스트가 그런 에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나 어디까지나 점괘에 불과하네. 믿으면 믿는 거고, 안 믿으면 안 믿는 거지. 가장 중요한 건, 각오와 다짐이 아니겠는가?”

“...그렇겠죠.”

한 차례 쓰게 웃은 에반은 이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쩌면 괜히 점괘를 들은 것이 아닐까. 아이린이 부추겼을 때 차라리 단호하게 싫다고 말했다면...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저 방금 들은 점괘를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쓸 따름이었다.

“돈은 이 정도면 되나요?”

“그쪽의 아가씨는 별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연애에 별 관심이 없나?”

“...지금은 그렇죠. 나중이라면 몰라도.”

짤랑거리는 금화를 확인한 아제스트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가,

이내 씨익 웃으며 품속에 금화를 황급히 집어넣었다.

생각이 복잡한 것은 아이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점괘의 내용보다는, 점괘를 들으면서 계속하여 머릿속을 어지럽힌 한 사람의 얼굴 때문이었다.

왜 자꾸만, 자신의 호위 기사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일까.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내 뜬 아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흠.’

과연 저 둘이 어떤 인연을 맺게 될 것인가.

생각을 정리하는 듯 꽤나 복잡한 표정을 지은 에반을 바라본 아제스트는, 이윽고 한 차례 피식 웃어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쌍방인데 말이야.’

과연 두 사람이 그것을 깨닫는 데에 과연 얼마나 걸릴지.

이윽고 텅 비어버린 천막 내부를 바라본 아제스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천막에서 나온 뒤엔, 서로 말이라도 맞춘 것처럼 호숫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생각이 복잡했다. 방금의 점괘를 들은 탓인지, 묘한 어색함이 주변을 감싸 숨을 쉬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점이라는 거, 생각만큼 재밌지만은 않죠?”

“...그렇네요. 괜히 머리만 복잡해져서.”

에반의 말에 아이린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그저 흥미에 불과했건만, 막상 점괘를 들으니 괜스레 그 말이 진짜 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연애...솔직히 말해 자신과 거리가 먼 단어라 생각했다.

애초에 누군가를 사랑할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당장 흑마법사들이 나타나고 있었고, 5대 가문이 그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들마저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랑이라니, 허나 또 다시 떠오르는 녹안에 아이린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에반, 자신의 호위 기사. 그저 호위 기사일 뿐이었다.

...아니, 그저 호위 기사인 것은 아니었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주변 사람들 중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꼽으면 아마 에반이었을 테니까.

그래서였을지도 몰랐다. 아까 연애점에 대해서 들을 때, 자신의 머릿속에 그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던 것은.

게다가 신경 쓰이는 것 또한 있었다.

점괘를 들을 때 점점 어두워지는 에반의 표정은, 꼭 그가 지금 연모하고 있는 대상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지 않던가.

구태여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그것이 신경 쓰여 괜스레 숨이 턱턱 막히는 듯 했다.

‘물어보면...’

허나 그의 사생활일 그런 것을 묻자니, 양심에 찔려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힘겹게 내뱉기도 잠시,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는 특이한 향에 아이린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제가 말한 곳이 여깁니다.”

마침내 드러난 호숫가의 모습에 에반이 옅게 웃으며 답했다.

세이렌, 한 번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을 홀릴 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라 하더니, 정말로 그렇지 않은가.

어느덧 해가 저물기 시작해 옅게 깔리기 시작한 노을.

빨갛게 부서지는 찬란한 빛이 호수에 부딪혀 잔잔하게 퍼지자,

그 빛을 머금은 호수가 이내 붉은 빛을 띠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신기루가 흩어지듯, 세상 모든 화려함을 그대로 담은 호수의 물이 바람과 닿아 잔잔한 파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수십, 수백 개의 보석을 부숴 흩뿌린다면 그런 반짝임을 나타낼 수 있을까.

수천 송이의 붉은 수선화를 뿌린다 한들 저런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

캔버스에 물감을 흩뿌린 것처럼, 마치 그림 한 폭의 광경을 그대로 담아낸 것만 같은 광경에 아이린은 그저 멍하니 앞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아름다웠다.

마치 거울처럼, 호수 한 가운데에 해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사방에 그 찬란한 빛무리를 뿌리며, 투명한 호수를 붉게 물들이는 그 풍경에 시야가 빨간 빛으로 가득 차는 것만 같았다.

타오르는 불처럼 노랗고 붉은 빛이 호숫가를 잠식했지만, 그 불꽃은 오히려 차갑게만 느껴졌다.

위험하지 않은 불꽃, 그럼에도 세상 그 어떠한 화염보다 화려한 그 광경에 에반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푸른 눈, 그리고 녹색의 눈이 붉은 색으로 가득 찼을 때 무렵.

멍하니 호숫가를 바라보던 에반의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띵, 눈이 크게 뜨인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소리, 허나 적어도 이 호숫가에서 절대로 들릴 수 없는 소리.

따라란­

부드럽게 이 공간을 쓸어내리는 소리에 에반의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찬미하듯, 고요한 호숫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아이린의 고개 또한 이끌렸다.

“...이 소리는.”

“피아노 소리...입니다.”

피아노,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이 선율에 에반의 눈이 가늘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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