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약혼 파기는 신중히(2)
* * *
공작저의 분위기는 늘 그렇지만 무거운 편이었다.
허나 지금의 분위기를 따지자면, 내가 아는 평소보다 훨씬 중압감이 느껴진다 해야 할까.
로만, 그녀가 그런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저 웃어넘길 이야기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유리스, 로만, 하탄, 킬로그, 메디브.
제국의 5대 가문이며, 에반젤리움을 수호하고 황실의 안녕을 지킨다는 기치를 내걸며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가문들이 아니던가.
허나 최근 들어 불온한 소문이 하나 감돌고 있었으니,
그것은 5대 가문이 흑마법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이었다.
하여 착수된 조사.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에 은밀히 시작된 그 조사의 첫 대상은, 의외로 로만이란 가문이었다.
검의 로만, 제국이 건립된 그때부터 황제를 수호했던 기사를 시조로 둔 가문.
유리스 다음으로 충성심이 굳건하며여태껏 그 어떠한 잡음도 나오지 않았던 그 가문이었기에,
조사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의견이 갈리곤 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며, 킬로그나 하탄이면 모를까 로만이 그러겠냐며.
허나 시간이 흐른 지금, 아이린이 로만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은 분명 흑마법사와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
아델 로만의 눈을 기억한다. 쟌지르의 눈동자와 똑 닮았던 그 보라색의 눈.
흑마법을 다루는 이들이 으레 가지고 있던 그 눈을 과연 처음부터 그들이 지니고 있었을까?
도무지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그리고 어쩐지 기분이 나빠지는 미소까지.
그것들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는 것도 잠시, 이내 방으로 들어선 아이린이 의자 한 쪽에 앉으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번에. 그대가 나한테 물어본 걸 기억하나요? 아델 로만이란 사람에 대해서 말이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가. 그나저나 아델 로만에 대해 물었던 것이라,
잠시 기억을 더듬던 나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눈 색깔 말씀입니까? 원래부터 보라색이었냐고요.”
“그래요. 저번에 내게 말했던 그 부분을 쭉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 이내 내게 조금 오래된 서적 하나를 슥 내밀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제국의 역사가 어느 정도 되는 지 알고 있나요?”
“글쎄요, 한 천 년은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제국의 시조인 알라르가 에반젤리움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운 것이 천 년 전, 지금 5대 가문이라 불리는 가문들의 시조를 이끌고 세운 나라가 현재의 제국이 되었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제국의 건국 신화는 이제 나또한 알고 있을 만큼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제국의 시황제인 알라르가 제국을 세운 과정을 써낸 동화책은 이 세계의 어린 아이들이라면 귀에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녀가 내게 내민 책이란 바로 건국 신화에 관련된 책이었다.
허나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건국 신화에 ‘초판’이라 적혀있다는 점이었다.
건국 신화의 초판이라니, 도대체 무엇이 다른 걸까.
그런 의문을 품고 아이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이내 아이린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국에 유통되는 동화책에는 생략된 이야기가 많아요. 초판에 들어있던 삽화에 대해서도 생략된 부분이 많았죠. 그래서 꽤 시간을 들여 구한 것이 이 초판인데, 흥미로운 부분이 있더군요.”
“흥미로운 부분이라 하면?”
“직접 읽어보는 편이 좋을 거에요.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그게 훨씬 빠를 테니까요.”
그 말에 천천히 책장을 넘기자, 과연 오랜 시간을 거쳐 온 책답게 종이가 한없이 맨들 거렸다.
조금만 힘을 쓰면 그대로 찢어질 것 같다 해야 할까.
이윽고 그 내용에 집중하자, 초반부에는 내가 원래 알고 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알라르와 그의 동료였던 세런 로만, 예거 메디브, 아이즈 킬로그, 듀란 유리스, 그리고 슈라 하탄의 이야기.
알라르는 별을 품고 태어난 아이였으며, 그런 그의 지혜와 용맹함에 이끌려 그를 찾아온 5명의 동료들.
세계를 유린하던 고룡을 잡아낸 신화적인 이야기의 초반부는 의외로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재의 용병단’. 그런 초라한 용병단이 결국 대륙 전체를 휘어잡는 제국의 시조가 되다니,
꽤나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던가. 초판이라 그런지 동화처럼 두리뭉실한 서술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 마을을 집어 삼켰다는 늑대의 목을 벴다든지,
산을 휘감은 뱀을 잡았다든지 그런 허황된 이야기도 있었으나 초판인 만큼 아무래도 사실에 가까우리라.
그런 그들이 제국을 세우게 된 계기란, 갑작스레 세상에 나타난 한 마리의 고룡 때문이었다.
인류사의 고대처럼 국가보다는 여러 개의 부족으로 나뉘었던 대륙,
그 대륙의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고룡과 맞서 싸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룡 ‘마베트’, 그저 존재 자체로 세상에 파멸과 몰락을 부르던 그 존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오직 알라르 뿐이었기에.
알라르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성역 에반젤리움에서 전해지던 성검을 든 그가 마베트를 베려할 때 도왔던 동료가 바로 5대 가문의 시조였고,
결국 마베트를 물리쳐 봉인시킨 알라르는 에반젤리움을 수도 삼아 제국을 세웠다.
“별로 특별할 게 없는데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묘사가 자세하긴 했으나 딱 그 정도.
무언가 읽으며 와 닿는 점이 전혀 없었으니까. 내가 그리 답하자, 아이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금 더 자세히 읽어보세요. 삽화라든지,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나요?”
“...삽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삽화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여태 읽으며 이상한 점을 그다지 찾지는 못했는데.
너무 글에 집중한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삽화를 천천히 살펴보자, 이내 한 삽화에서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알라르가 검을 들고 용과 맞서는 장면,
모든 삽화 중에서 유일하게 채색된 삽화는 조금 흐려지긴 했으나 아직까지도 그 색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유리스 특유의 푸른 눈을 담고 있는 듀란 유리스의 눈을 보며 웃기도 잠시,
이내 세런 로만의 눈을 보았을 때 그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눈 색이 붉군요.”
색이 옅어졌지만, 그럼에도 세런 로만의 눈동자는 확실히 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알라르가 지닌 것과 같은 붉은 색. 그에 의문을 품자, 이내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세런 로만은 알라르와 단순히 동료 사이가 아니었으니까요. 알라르의 원래 성씨는 로만이었어요.”
“친척이었던 겁니까?”
“괜히 검의 로만이라 불리는 게 아니죠. 알라르가 들었던 성검, 그것에서 따와 검의 칭호를 부여 받은 것이 로만가의 시작이었어요.”
검, 방패, 눈, 마법, 그림자.
하기야 공작가가 뭐 다 그렇다지만, 정말로 로만이 황실의 혈통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의 붉은 눈은 아직도 계승되고 있었으니, 로만의 보라색 눈동자가 확연히 티가 나지 않겠는가.
“시간이 흘러 피가 옅어진 게 아닐까요?”
“...그렇게 세간에는 알려져 있죠. 황제의 혈통을 타고 나지 못했기에, 그들의 피가 조금씩 옅어져 현재의 로만으로 변했다고요.”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아이린의 그런 말은 분명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허나 숨겨진 것이 무어란 말인가? 하여 묻자, 쓰게 웃은 아이린이 이내 입을 열었다.
“아델 경을 처음 보았을 때 기억하는 눈은 보라색이 맞아요.로만 공작 또한 눈이 보라색이고, 분명 대대로 보라색 눈동자가 전해져 왔죠. 하지만, 로만가의 눈이 보라색이 된 것은 어느 시점부터라 할 수 있어요.”
“어느 시점이라면.”
“300년 전, 정확히는 제국에 흑마법사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나타났던 시기죠.”
아이린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흑마법사란 이름은 제국의 공적,
특히나 흑마법사에게 많이 데였던 유리스로서 어찌 흑마법사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
흑마법사가 출현한 것은 절멸이 활동하던 몇 십 년 전이라 알려져 있지만,
실상 제대로 등장한 것은 300년 전이었다. 허나 워낙 미미한 세력이라 그 뒤로 쭉 잊힌 채였는데,
훗날 등장하여 제국을 제대로 뒤집은 탓에 그대로 공적(??)이 되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300년 전이라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기 충분한 시기가 아니던가.
설령 눈동자 색이 바뀌었다 한들, 갑작스레 바뀌는 것이 아닌 서서히 바뀌는 것이라면 눈치 채기 쉽지 않을 터였다.
“확실한 겁니까?”
“조금 더 조사해봐야 하겠지만, 이런저런 정황들이 로만과 흑마법사의 연관을 말해주고 있어요. 최근에 노예상 하나가 사라진 걸 기억 하나요?”
“알고 있습니다. 로만가가 조사하지 않았습니까?”
“원인 불명, 이라는 판정이 나오긴 했지만. 그게 과연 원인 불명일까요. 흑마법 중에는 분명, 제물을 바쳐 무언가를 소환하는 게 있죠. 그런 걸 덮으려 그렇게 한 걸지도 몰라요.”
허나 어디까지나 정황 증거에 불과했다.
솔직히 눈동자 색과 정황만으로 그들을 흑마법사로 단정 짓기엔, 로만이라는 이름이 가진 위세가 너무도 거대하지 않은가.
확실한 증좌가 필요했다. 누구도 납득할 만한, 그리고 공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증좌.
그런 생각에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자, 차를 한차례 홀짝인 아이린이 손가락을 들어 찻잔을 가리킨 채 입을 열었다.
“이 찻잔을 어디서 만든 줄 알고 있나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자, 이내 피식 웃은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수도 근처에 있는 카심 백작령에서 제작된 찻잔이죠. 손재주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가문이지만...그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있어요.”
“중요한 거라면?”
“흑마법사를 아주 증오한다는 점이죠. 그런 그들과 협력한다면, 흑마법을 밝혀낼 수 있을 도구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녀가 내민 또 다른 종이엔카심이라 적혀있었기에,
나는 헛웃음을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도회 파트너, 한 번 더 해줘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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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솔직히 말하자면, 갑작스런 상황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애초에 무도회를 가는 절차가 복잡한 것도 있고, 아이린이 그 파트너라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흑마법사와 관련한 협력을 구하러 가는 일이니 아델 로만과 함께 갈 수 없는 건 그렇다 쳐도, 그녀와 파트너라니.
마음을 자각하지 못했던 수정궁 때와는 달리 지금은 그 느낌이란 것이 확연히 달랐다.
손을 잡고, 체온을 느끼고. 그 모든 것들이 가슴을 간지럽게 할 따름이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달라진 아이린의 태도가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는 게 아닌 터라,
그녀가 파트너 삼는 그 행위에 대해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린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 오랜 시간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한 태도가 확연히 변한 것은 몇 년 전부터였으니까.
내게 오는 편지를 신경쓰고, 로페나에게 선물한 것을 신경쓰고.
다른 영애와 만났다는 소문에 내게 신경질을 부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모를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어찌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며 밤을 지새웠지만, 결국 일상에서 변하는 것이란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 해결할 게 너무도 많았고, 나또한 모든 상황이 종결되기 전까지는 마음을 고백하지 않겠다 다짐했었으니까.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만약 이번 로만 일이 잘 해결된다면 생각이 바뀔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이 그 때가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무도회, 그런 장소를 그리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곳에 향할 때마다 쏟아지는 시선이 처음에는 버틸 만 했지만, 이제 와서는 그 시선들이 조금 질척거리기 시작했으니까.
아이린이 편지를 불태우며 보내는 경고란 것이 얼마나 효과 있을 지도 모르겠으나,
이번 무도회에서는 조금 편히 있을 수 있으면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건 어때?”
무도회에 가기 위한 첫 준비는 당연하게도 의상일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옷보다는 조금 수수한 방향, 어디까지나 아이린의 에스코트를 위한 옷을 고르고 싶었건만.
리제가 들고 오는 옷마다 하나같이 화려한 터라 눈살이 찌푸려졌다.
“조금 칙칙한 걸 부탁드렸는데, 어째 하나같이 화려하네요.”
“네가 너무 화려한 거야. 내가 가져온 것들이 얼마나 수수한지 너는 모를 걸.”
“...음. 그럼 어쩔 수 없긴 한데요.”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이란, 언제 보아도 그럴 듯하게 보였다.
대충 셔츠만 걸쳤음에도 부각되는 몸의 근육, 언뜻 보면 서늘해 보이는 눈매는 살짝 미소 짓자 거짓말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변했다.
거울을 보며 살짝 웃으니 옆에서 리제가 숨을 삼켜, 그런 반응이 부담스러워 이내 가늘게 눈을 떴다.
“뭘 그렇게 놀라요. 매일같이 보면서.”
“매일 봐도 조금 그래. 아가씨가 신기한 거지. 너 같은 기사가 옆에 붙어있는데도 아무런 생각 안하는 거 보면.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셔.”
‘아무 생각도 없는 건...아닌 것 같은데.’
허나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리라.
그 말에 피식 웃자, 뺨을 쓰다듬은 리제가 내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살짝 붉어진 뺨, 이래서야 공작저 내에서 웃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표정을 굳히자 그제야 숨을 내뱉은 리제가 황급히 떨어지며 입을 열었다.
“어, 음. 이제 다 했어.”
“...고마워요.”
이제는 공작저에서도 편히 웃을 수 없다니. 어쩐지 입 안이 썼다.
그렇게 옷을 입고 문밖으로 나가자, 저 멀리서 말이 푸르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마차가 준비된 건가. 하기야, 지금 출발 하지 않으면 그곳까지 도달하기에 많은 시간이 걸릴 터였다.
“로페나, 크리스 경 말 잘 듣고 있어. 또 몰래 쿠키 훔쳐 먹다 걸리지 말고.”
“아니, 제가 무슨 애에요? 그런 소리하지 말고 그냥 다치지나 마세요. 항상 어디 가셨다가 다쳐서 오잖아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나를 걱정하는 그 모습이 귀여워 볼을 툭툭 두드리자,
눈살을 찌푸린 녀석이 이내 나를 빤히 바라보며 싱긋 웃어보였다.
“잘 다녀와요.”
“그래, 너도 잘 있어.”
크리스 경은...아무래도 인사까지 하고 갈 순 없을 것 같았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나.
품속에 있는 검을 확인하며 천천히 걸어가자, 이내 마차 옆에 서있는 아이린의 모습이 들어와 옅게 미소 지었다.
언제 보아도 그 아름다움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듯, 푸른 정원 위에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새겨진다.
검은색 빅토리아풍의 드레스, 미세하게 보이는 프릴은 그녀가 늘 담고 있는 차가움을 조금이나 옅게 만들어,
그녀가 지닌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항상 보는 얼굴인데도 이토록 새로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그렇게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다른 이에게는 그토록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그녀가 미소지을 때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짜릿한 감각에 전율을 느낀다. 허나 티내지 않는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 뿐. 이제는 자연스럽게 잡은 손에서 체온이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그런 체온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자, 이내 시선이 맞닿은 아이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래 걸렸네요.”
“아가씨 준비가 빠른 겁니다. 미리 준비라도 하고 계셨던 겁니까?”
“흠, 글쎄요.”
눈을 가늘게 뜬 아이린이 나를 훑어본다. 장난스럽게, 그렇게 웃은 그녀는 이내 내 가슴팍을 쿡 찌르며 대답했다.
“비밀이에요.”
“하.”
옅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홉뜨자, 마차를 향해 발을 올린 아이린이 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무도회에 가는 건 정말 일을 위해서 하는 거니까. 괜히 한 눈 팔지나 말아요. 가서 또 영애들에게 웃음이나 흘리면서 수작 부리지 말고.”
내가 무슨 난봉꾼으로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그래도 나름 그녀의 호위 기사를 하는 내내 순정을 지켜왔다 생각했건만,
그런 그녀에게 짜증을 내는 대신. 나는 한차례 피식 웃으며 그런 그녀에게 대꾸했다.
“그런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제 눈에 담긴 것은 늘...”
그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영애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간드러지는 미소를 지은 채로.
“아가씨뿐이니까요.”
그 말을 들은 아이린의 표정이란, 평생을 두고두고 기억할 만큼이나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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