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60화 (60/181)

〈 60화 〉 어둠을 가르고(4)

* * *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허나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

괜찮다고 대답하긴 했으나, 잘게 떨리는 손은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괜찮지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시선은 여전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 채였다.

“...잘 해낼 거예요.”

의문이 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여태 흑마법사와 싸워온 에반이었고, 그 어떤 기사보다도 훌륭한 업적을 세운 것이 에반이었지만.

과연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올 것이란 보장은 할 수 없었다.

황실의 도움도 없이, 다른 기사단의 도움 없이 일개 개인이 그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많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황실에게 알린다면 못해도 몇 주 뒤에나 흑마법사를 토벌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을 터,

그렇기에 에반을 보냈지만. 차마 전하지 못한 걱정에 가슴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그처럼 강했더라면, 그를 홀로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침착할 수 있었더라면,

그를 홀로 보내는 것보다도 더욱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복잡한 머릿속, 뒤엉킨 실타래처럼 변해버린 생각의 너울 속에서 떠오른 것은.

그가 가기 전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불안하게 흔들렸던 그 눈동자가 거슬렸다.

그조차도 확신을 지니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떠났고,

자신은 에반을 붙잡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을 뿐.

...믿고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믿는다면 에반 한 사람 뿐이라며, 언제까지고 신뢰할 거라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를 믿고 있었다.

그가 이번 일도 잘 해낼 것이라며, 마음 한 구석으로는 그가 무사히 돌아올 것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허나, 어떻게 아무런 걱정조차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이 옷깃을 붙잡았다.

짓씹은 입술이 새하얗게 변하고, 이윽고 전해오는 비릿한 맛에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만약 그가 죽는다면, 자신은 이 선택을 평생 후회하지 않을까.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은 이내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향했다.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 자신이 기억하는 그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피골이 상접한 모습은 분명 그가 저주에 시달리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일주일, 그 이상 시간을 끌면 죽는다는 말을 들었다.

제국의 대마법사인 아제스트 머윈이 한 말이었으니,

적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묘한 감정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평소에 그를 원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힘없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니 그저 허탈할 따름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은 더 이상 없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쓰러져 있는, 한 명의 초라한 노인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를 살리기 위해 에반이 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욕망과 뒤섞여 떠오른 어리석은 생각에 입이 꾹 다물렸다.

유리스의 소가주인 자신이,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영지민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자신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쏟아지는 비, 우중충한 공작저의 분위기.

모두가 믿음을 잃어 방황하는 지금,

이 공작저를 다스릴 사람이 쓰러져 혼란이 가득한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로페나도, 크리스 경도, 리제도. 자신이 알던 이들의 눈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가주가 쓰러졌다. 그리고 그 소가주마저 이리 방황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호위 기사를 신경 쓰는 나머지, 해야 할 것조차 내팽개치고 멍하니 자리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자신을, 어떻게 유리스의 소가주라 할 수 있을까.

그 호칭이 싫은 것은 여전했다. 자신에게 완벽을 바라는 이들,

그런 것이 싫어 잠시 생각에서 지워둔 것이 그 소가주라는 이름이었다.

허나 지금은, 유리스의 가주가 쓰러져 모두가 혼란에 빠진 지금은.

그들을 이끌 사람이 필요했다. 혼란을 수습하고, 공작령에 드리우기 시작한 암운을 걷어낼 이가 필요했다.

할 수 있을까. 이전과는 다를 터였다.

단순히 서류만을 처리하는 것이 아닌, 모든 업무를 자신이 도맡아 가주로써의 책임을 지녀야 한다는 얘기였다.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이내 뜨며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야 한다. 누군가 한다면, 그 책임은 자신이 지녀야 했다.

자신은 에반처럼 싸울 수 없었다. 검을 들 수 있었지만 강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하는 것뿐이었다.

시야는 더 이상 흐릿하지 않았다. 결의를 품은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일 따름이었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크리스 경의 시선에 묘한 이채가 서렸다.

“크리스 경.”

“네, 아가씨.”

“지금까지 쌓여있던 모든 서류를 집무실로 가져다 두라고 요청하라. 멈춰있던 모든 업무를 재개한다. 목표는 모든 것을 평시 상태로 되돌리는 것, 그리고...”

공작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어야 할 인장은 책상에 있는 상태였다.

그 인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조심스레 들어 손가락에 끼우며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께서 깨어나시기 전까지, 공작령의 모든 권한은 내게 있다.”

가주 대행 선언, 그 말의 뜻을 이해한 것인지 크리스 경은 곧바로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빠져나갔다.

존대하지 않는다. 이 공작저에서 자신의 위에 있는 존재는 그 누구도 있지 않았기에,

평소와는 달리 어색한 말투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크리스 경이 움직임과 동시에 시녀들이 재빨리 자신의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츰, 그렇게 혼란스러웠던 분위기가 사라진다.

금방 모든 것이 돌아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금세 제 분위기를 되찾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이 땅을 적시는 비가 그칠 때 즈음이면, 모든 것이 제 자리를 되찾지 않을까.

저 멀리, 아마도 에반이 있을 곳에 시선이 향한다.

바라건대, 그대가 무탈할 수 있기를. 이번에는 아무 곳도 다치지 않고, 그렇게 성한 몸을 이끈 채 돌아올 수 있기를.

“...에반.”

늘 돌아올 때마다 상처를 몸에 이고 있던 에반의 모습이 떠올라 눈살을 찌푸렸다.

부디 이번에는 그가 다치지 않기를,

자신이 지금 바라는 것중 가장 커다란 염원을 떠올리며. 그렇게 허공을 향해 간절히 기도했다.

#

푸욱­

배를 찢고 들어오는 창날의 감촉에 눈이 가늘어졌다.

거칠어진 호흡, 목구멍에서 울컥거리며 차오르는 피를 뱉어낸다.

입에서 쏟아지는 검은 색의 피, 아무래도 몸 상태가 어지간히 망가진 듯 했다.

비틀거리며 창을 뽑아내길 잠시, 주변을 살피며 조금은 줄어든 적의 기척을 파악했다.

‘수가 너무 많아.’

수십 명의 흑마법사, 꽤 많은 수를 베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10명 정도가 남아있었다.

자신들을 소환학파라 칭하는 조무래기를 상대하는 것은 쉬웠다.

다만, 그들이 스승이라 부르는 이들이 문제였다.

수준이 낮지 않다. 동굴 안에서 싸웠던 흑마법사를 상회하는 그들은 결코 가벼이 싸울 수 없는 상대였다.

전력,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내며 싸웠음에도 이런 상태였다.

팔은 너덜거리고, 배는 여러 번 꿰뚫려 진즉에 피가 질질 새어나오고 있었다.

숨이 가빠져 옴을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몇 분, 아마 그 정도를 겨우 싸울 수 있을까.

성치 않은 몸 상태에 시야가 흐릿했다. 아이린, 그 이름을 떠올리자 입꼬리가 비틀렸다.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했건만, 결국 이번에도 이렇게 됐다.

이렇게 심하게 다친 적은 처음이 아니던가.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는 것이 비로소 체감이 되었다. 점점 마나의 양이 줄어들고 있었다.

몸을 휘감은 불꽃이 줄어들고, 심장의 박동이 차츰 멎어가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것은 짙은 혈향, 썩어가는 시체들이 전해져오는 죽음의 향.

흐릿해진 시야에 눈을 부릅뜬다. 아직 죽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여기에서 죽는다면, 그저 헛된 죽음일 뿐이었다.

“...대단하군. 50명이 넘어가는 인원이 모였는데, 어느새 10명만이 남다니.”

처음 흑무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흑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베르만, 자신을 그렇게 칭했던 것을 떠올린 에반이 이를 악물었다.

닿을 수 있을까? 흑무는 여전히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수많은 흑마법사들을 베었지만, 오히려 점점 그 크기가 더해지는 흑무는 아무리 보아도 위험해 보일 따름이었다.

잠시 공격이 끊겨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지만, 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호흡을 고른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그렇게 잔존하는 마나를 조금이나마 아끼고자 노력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앞으로 싸움에 활용할 수 있는 수가 얼마나 남았는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한계까지 마나를 끌어 쓰고 있었다.

여기서 더 마나를 쓴다면, 아마도 그 심장이 터져 찢어지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 수까지 고려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부릅뜬 눈에서 실핏줄이 잔뜩 터져 나갔다.

눈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손등으로 닦으며, 길게 숨을 내뱉는다.

베르만, 어째선지 그 이름이 익숙하게 들렸다.

난생 처음 들은 이름이 어째서 이토록 익숙한 것일까.

그를 쓰러트리면, 어쩌면 그 이름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수로? 한쪽 팔은 너덜거리고, 피가 새어나오는 복부 탓에 제대로 뛰는 것조차 힘들었다.

마나를 운용하여 겨우 움직였지만, 마나가 조금 더 줄어든다면 그것마저 힘들 터였다.

5분,

아마도 자신이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에게 그에게 닿을 수 있을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남은 힘으로 이 자리에서 벗어나라며, 여태껏 살아오면서 쌓아온 감이 소리치고 있었다.

허나 자신이 여기서 물러나면, 저 흑마법사들은 그대로 아이린에게 향할지도 몰랐다.

이를 악문다. 뛰는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

혈류가 빠르게 회전하여 근육이 팽창한다.

쿠궁, 밟고 있던 땅이 뒤흔들려 이내 그 파편들이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심장의 있는 마나, 그 얼마 남지 않은 편린을 억지로 끌어낸다.

한계가 있다면, 그 한계를 부숴야 했다.

잔불, 사용할 수 있는 그 모든 마나를 불사른다.

마나가 없다면 그 육체를 불살라, 육체가 없다면 그 영혼을 불살라.

화르륵, 백색의 염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찬연하게 타올랐다.

주변의 흑무마저 집어삼키는 불꽃, 천사의 몸을 두른 날개처럼 주변의 대기를 휘감는 염화가 육체에 힘을 더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 힘이라면,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순백의 검신이 어둠 속에서 더욱 찬란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짜냈기에 몸은 꽤나 가벼웠다.

피가 흐르는 손에서 검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그렇게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흑마법사들이 다가온다. 그들이 품고 있는 어둠이 아주 가깝게 다가옴을 느꼇을 때, 에반이 땅을 박차고 앞을 향해 나아갔다.

베르만의 옆에 서있던 흑마법사들이 에반에게서 느낀 것은,그야말로 소름끼칠 정도로 절제된 분노였다.

날카롭게 벼려진 살의였고, 그 어떠한 얼음보다도 냉혹한 적의였다.

단순히 그 기세를 느낄 뿐인데도 온몸이 저릿했다...

지금 느끼는 이 힘은, 분명 에반 프리드라는 기사가 지닌 저력이리라.

베르만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가진 힘은, 자신에게 닿지 않는다. 허나 오만은 금물이었기에.

마법진을 펼친다. 간단한 마법이라면 펼치지 않았겠지만,지금 준비하는 것은 마법진을 그려야 할 정도의 대마법.

어둠이 촉수처럼 뻗어나가 대기를 휘감는다.

공기를 찢어발기고, 더없이 커다란 살의가 붉게 형상화하여 주변을 덮치기 시작했다.

“오멘(OMEN).”

자신이 동굴 속에서 몇 년간 준비했던 대 소환 마법,

수천 명의 인간과, 수 만개의 눈알과, 그 것들이 뿌려낸 피가 이 마법진 속에 흐르고 있었다.

광소한다.

자신의 몸에서 수많은 마나가 빠져나가 뼈가 비틀리고 있음에도, 베르만은 웃었다.

이 힘이 기꺼워서, 앞으로 이 마법진에서 나온 존재가 세상을 절멸하는 것이 상상만 하더라도 즐거워서!

그 마법진에 힘이 빨리는 것은 베르만 뿐이 아니었다.

에반을 상대하기 위해 나선 흑마법사들을 제외한 모두가 그 마법진에게 마나를 빼앗기고 있음에도,

그들은 하나같이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들의 눈동자에서 하염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심장이 비틀리고, 폐가 쥐어 짜이고, 축적했던 모든 마나가 빠져나가 그 생기를 잃고 있음에도 기뻤다.

이 모든 것은, 절멸은 위함이라.

하여 베르만은 웃었다. 쩍 벌려진 입가에서 비치는 공허는 두려움을 자아낼 정도였다.

쿠구궁, 대지가 뒤흔들린다, 하늘이 찢어지고, 찢어진 하늘에서 거뭇한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저건.”

그 찢어진 틈을 바라본 에반의 눈이 가늘어졌다. 위험하다.

온 몸의 감각이 수차례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겪은 그 무엇보다도, 저 틈에서 나타날 ‘무언가’가 가장 위험했다.

촤르르르, 얼굴을 스쳐가는 창날. 얼굴을 돌려 피한다.

손목을 비틀려 검을 내지름과 동시에 다시금 목을 숙였다.

제대로 실리지 않는 힘은 마나로 보충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흑마법 때문에 회피와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했다.

콰직, 땅을 밟아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흑마법사의 눈을 가렸다.

휘이익, 뻗어진 창날이 완전히 궤적을 벗어나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을 확인한 에반이 허리에 힘을 주었다.

오른 다리로 땅을 다시금 박차며, 그렇게 한 손에 쥐인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카아앙­

“칫.”

뼈 갑옷, 거슬렸다. 부수려면 꽤나 많은 힘이 필요했다.

단번에 부수려면 아마도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야 하지 않을까.

더욱 거대한 마나의 양,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정순한 그 마나만이 저 갑옷을 단 번에 가를 수 있을 터였다.

허나 지금은 그럴 수 없기에, 오직 이 상황에 집중한다.

뼈 갑옷을 꺼냈다는 것은 흑마법사의 마지막 방어 수단을 꺼냈다는 것이었다.

저걸 부순다면, 흑마법사는 죽는다.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진탕이 된 내장에 아랫배가 아려왔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앞으로 3분? 최대한 빠르게, 어깨를 당긴다. 그대로 허리를 비틀며,

이내 담긴 힘을 그대로 팔에 담아 휘둘렀다. 콰아앙! 검에 담긴 불꽃이 허공을 가르며 뻗어나갔다.

그것에 닿은 창날의 어둠이 흩어지며, 이윽고 자신을 향해 날아온 창을 잡은 에반이 옅게 웃었다.

한 손에는 검, 한 손에는 창.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움직인다.

세포 하나하나, 그 모든 움직임을 하나로 동화 시킨다.

왼손의 움직임과 오른손의 움직임이 하나가 되어야 했다.

발을 딛음과 동시에 팔이 휘둘러진다. 시야가 적을 향함과 동시에 창을 내질렀다.

한 합, 한 호흡. 일련의 과정이 한 순간에 이어짐과 함께,

모든 움직임이 여태껏 한계라 생각했던 속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보이는 세상 속에서, 오로지 에반 만이 제 속도를 내고 있었다.

쏟아지는 어둠은 그를 피해갔다. 아니, 에반이 그에 전부 반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극도로 활성화 된 감각이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들린다. 바람의 움직임이 보인다.

그 어둠이 어디로 향하는지. 피부를 스쳐지나가는 살의를 느끼며 몸을 비틀었다.

자신을 향하는 죽음의 향이 에반의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재능이 있다면, 에반이 가진 재능이란 무(?) 그 자체였다.

철저하게 망가진 몸, 어둠이 파고들어 당장 쓰러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몸 상태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가볍게 움직일 수 있었다. 한계에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 한계를 부수고 나아간다.

창을 다루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허나, 어째선지 꽤나 잘 다룰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촤아악­ 뻗어나간 창두가 뼈 갑옷을 건드렸다.

검을 휘두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량의 흑마법사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다음 공격, 공격은 쉴 틈 없이 이어졌다.

파아앙!

공기가 터져나간다. 그만큼이나 빠른 속도였다.

짧게 잡은 창은 검보다도 더한 파괴력을 주고 있었다.

탄력과 반동, 창을 휘두를 때 전해지는 탄력에 에반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허나, 그 만큼의 위력이 있었다. 쪼개진다. 금이 간다.

아주 조금, 눈으로는 확인하기 힘들 만큼의 작은 균열을 에반은 놓치지 않았다.

땅에서 뻗어져 나오는 검은 가시를 부순다. 화르륵, 염화는 아직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어째선지...더 이상 힘들지 않았다.

마치 한참을 달리다보면 다다른다는 러너스 하이처럼,

머릿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 탓인지 더 이상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타오른다. 화염처럼, 에반의 손에서 회전하는 창이 흑염을 걷어내며 뼈 갑옷을 때리고 있었다.

조금, 앞으로 조금이면 된다.

그 미세한 선에 또 다른 선을 덧대는 것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팔을 찌르는 창날을 겨우 피해가며 팔을 내지른다.

무릎을 굽히며, 눈을 부릅뜨며, 호흡을 가다듬으며. 입에서 흐르는 피는 닦지 않았다.

차마 지혈되지 않은 배에서 계속해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조금 더, 조금 더. 자신을 채찍질 하며.

이 한계를 부수기 위해서, 저 틈에서 나올 무언가를 막기 위해서 나아간다.

그리고 닿는다. 콰아앙­!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굉음에 흑마법사가 경악했다.

단 번에 부서져 나간 뼈 갑옷, 그대로 뻗어나가는 창날이 그 심장을 꿰뚫었다.

한 번의 호흡. 가다듬지 않은 호흡이 폐를 타고 온 몸으로 퍼져나간다.

쉬지 않는다. 심장을 꿰뚫은 창날을 뽑아낸 채 그대로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남은 한 명의 흑마법사가 중얼거렸다. 저 힘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고작해야 이제 막 성인이 된 기사일 뿐이었다. 익스퍼트,

제 아무리 그 끝에 도달했다 한들 어찌 홀로 수십을 벤단 말인가.

화르륵, 아직까지도 허공에서 불타오르는 불꽃이 시야에 담겼다.

베르만 대스승이 이끄는 계획이 성공한다면, 저 기사를 막아낼 수 있을까.

의문이 서렸다. 망설임이 생겨났다. 그것은 곧, 그에게 틈이 생겼음을 의미했다.

콰직, 어느덧 뼈 갑옷을 부순 에반이 흑마법사의 심장을 검으로 꿰뚫었다.

커억, 입에서 검은 피가 울컥하고 쏟아져 나왔다.

자신이 왜 이렇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흑마법사들이 연이어 내뿜은 공격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 어둠 사이를 누비며 내지른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다.

한계에 치다른 듯, 거친 숨을 쏟아내는 에반의 눈은 여전히 반짝였다.

그의 검은 곧 자신들의 대스승에게 향하리라.

“빌어먹을...”

허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대로 잘려나간 머리가 허공에 내던져지고, 에반은 곧바로 마법진을 그리는 베르만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1분, 어쩌면 그것이 전부일지 몰랐다. 상념을 지운다.

땅을 박차며,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내며 그렇게 뛰어갔다.

자신을 막는 이들은 없었다. 흑무가 그들을 감싸고 있었지만,

순백의 검신이 흑무를 가르며 이내 그 속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욱 커진 틈에서 무언가가 꿈틀 거리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막연한 공포심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하나, 둘.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흑마법사들은 에반의 검에 스러지고 있었다.

셋, 넷.

다가간다. 가장 끝에 있는 베르만에게 다다르기 위해서,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흑무를 계속해서 베어나가며 그렇게 끊임없이 달리고 있었다.

다섯, 여섯.

벅차오르는 호흡을 다잡는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일곱,

마지막 흑마법사를 베어내며. 그렇게 베르만을 향해 검을 뻗었다.

티잉­! 당연하게도, 뼈 갑옷이 튀어나와 검격을 막아낸다.

화르륵, 불사른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내어.

오로지 그 뼈를 잘라내기 위한 성화(?火)가 검에서 타올랐다.

가가각! 부순다. 오로지 그 일념을 담은 검은 쉽사리 뼈 갑옷에 파고들었다.

베르만의 보랏빛 눈이 에반과 맞닿았다. 끝났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을 내지르는 에반에게, 베르만은 옅은 조소를 지어 보였다.

“늦었다. 이미, 말로릭께서 강림하셨다.”

말로릭? 자신이 늦었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뻗어나간 검은 이미 그의 목을 꿰뚫었다. 삐걱거리며 떨어지는 베르만의 목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피조차 묻어나오지 않은 검을 바라보기도 잠시,

이내 갑작스레 느껴진 위화감에 에반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점.

에반의 녹안이 한 점과 마주했을 때, 에반은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공포에 휩싸였다.

주륵, 온 몸을 적시는 식은땀에 검이 미끄러진다. 호흡이 가빠진다.

불길이 사그라든다. 마나는, 더 이상 에반의 응답에 답하지 않았다.

어떠한 존재와 맞닥트리고, 그 존재를 피하고자 몸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그것은...생물이라 할 수 없었다.

살아 숨 쉬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하나의 색, 그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꿈틀 거리는 어둠 속에서 보라색 황혼이 꿈틀 거렸다.

쿨럭, 입에서 피가 미친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승산?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는 베르만의 말이 에반의 귓가에 맴돌았다.

어쩌면, 정말 늦었을지도 모른다.

[...필멸자여.]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심장을 때렸다. 입에서 쉴 새 없이 피가 쏟아져 나옴에도,

에반의 시선은 여전히 그 점을 향하고 있었다. 찢어진 하늘,

오로지 새하얀 뼈로만 이루어진 몸체가 벌어진 틈에서 천천히 기어 나오고 있었다.

[가엾구나.]

말로릭은정말로 에반을 가엾다고 생각했다. 그의 강함을 알았다.

허나, 자신을 상대하기엔 한없이 부족했다. 곧이어 스스로 스러질 자,

그렇기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을 다시금 이 세상으로 부른 이들이 품은 염원, 절멸을 이루게 하기 위해 그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쿠르르­

비가 그친다. 허나 태양은 뜨지 않았다.

오로지 이 하늘을 전부 뒤덮는 어둠에 구름마저 가려져,

이내 그 존재가 내뿜는 기세가 에반의 몸을 덮쳤다.

버티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바람에 휩쓸린 허수아비처럼 튕겨나간 에반의 몸이 땅에 뒹굴었다.

검이 조각나 부서졌다. 너덜거리는 팔이 더욱 찢겨졌다.

구멍 난 배에서 피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아이린, 그 이름을 떠올린 에반이 쓰게 웃었다.

닿지 않는다. 자신의 검은. 저 존재에게 닿지 않는다.

쿠우웅!

마침내 그 존재가 대지에 닿았을 때, 남아있던 숲의 편린조차 어둠에 휩싸여 사라지기 시작했다.

뼈로 이루어진 기다란 몸체에, 홀로 뻗어 나온 날개가 하늘에서 활짝 펼쳐졌다.

본 드래곤, 전설 속에서나 나오던 그 존재가 세상에 강림하자 대기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움푹 파인 대지가 터져나간다.

두근.

그리고 박동하는 심장이, 서서히 멎어간다.

두근.

에반의 폐로 흘러들어오는 호흡이, 조금씩 미약해진다.

두근.

후회, 슬픔, 다시 볼 수 없다는 공포,

이 숨을 이 이상 이어갈 수 없다는 절망, 회한, 증오, 그리고. 헛된 희망.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우습게도 쟌지르의 말이었다.

자신의 혈통, 마나. 결국 저 용에게는 닿지 않았다. 허나 이윽고 떠오른 카심 백작의 말에,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는다.

­프리드 가문의 시조는, 용이었다.

아제스트 머윈은 말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피가, 어쩌면 용혈(血)일지도 모른다고.

아직 완벽히 그 힘을 내고 있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한계를 마주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마주한 것은 한계가 아닐지도 몰랐다.

두근.

잠시나마 멎었다고 생각한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대로 쓰러지기엔, 자신이 지킬 것이 너무도 많이 남아있었다.

세이렌에서 다짐한 것, 자신이 과거조차 흘려보내며 지키고자 다짐했던 그 이름.

가슴에 있는 브로치는 이미 부서졌지만, 그것이 남긴 촉감을 기억한다.

잡았던 손에서 느꼈던 체온을, 함께 있을 때 들었던 그 잔잔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화르륵,

조금도 남아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마나는, 그 심장에서 제 잔불을 불태우고 있었다.

아직, 희망은 있었다. 헛되지 않았다. 그 마나를 끌어올리며 생각한다.

자신에게 있는 본질. 마나가 가진 특성이 과연 정화 한 가지일까. 저 뼈로 이루어진 용이 가진 위압감, 그 힘.

피어오르는 불꽃은 이전과 달랐다.

여전히 찬란했고, 여전히 순백색을 띄었지만. 그 불꽃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결코 작지 않았다.

땅이 뒤흔들린다. 하늘과 공기를 뒤덮은 어둠 속에서 저 홀로 찬란히 불타오르는 불꽃이 이내 폭사하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마나를 끌어올리는 그 과정에서, 에반은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지배, 제 발밑에 놓인 모든 것들을 지배한다. 파괴, 자신이 보는 그 모든 것을 파괴한다.

조화, 허나 그것을 절제하며, 자연과 조화하여 그 힘을 다룰 수 있기에.

격렬히 치솟는 불길이 어둠을 가르고 하늘을 향해 뻗어나갔다.

에반을 둔 채 하늘을 향해 날아가려던 말로릭의 고개가 돌아갔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아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대한 힘.

마치, 자신의 존재와 같은 힘이 아니던가. 허나 뒤쪽에는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아니,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는 찬연한 빛이 있었다.

두 개의 빛,

어둠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금색의 눈동자에서, 말로릭은 용을 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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