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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61화 (61/181)

〈 61화 〉 어둠을 가르고(5)

* * *

“이건...”

가롯 유리스의 저주를 확인하던 아제스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멀리, 아주 미세한 파동이 느껴짐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이 아니라면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미세한 파동.

마치 무언가에 막혀 기세가 꺾인 것처럼 보이는 그 힘은 강대하다 못해 몸이 저릿할 정도였다.

힘이 느껴지는 방향, 에반이 있는 곳이란 것을 깨달은 아제스트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깨달았나.’

에반 프리드라는 기사가 가진 마나는 용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프리드라는 가문자체가애초에 용과 꽤나 관련이 깊은 곳이지 않은가.

그 힘을 깨달은 에반이라는 기사는, 이제 이 대륙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기사라 생각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다만 걸리는 것은. 에반의 마나와 함께 느껴지는 이 어둠.

흑마법사가 지닌 마나와 달랐으나, 그보다도 광포하고 패도적인 기세에 아제스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 한이군.’

자신은 움직일 수 없었다. 가롯 유리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저주가 조금씩 옅어지고 있는 지금.

공작의 상태를 계속해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었으니까.

아마 이대로라면...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을 때 즈음 완전히 호전하지 않았을까.

“...무사하기를 바라지.”

이 몸이 저릿할 만큼의 힘에서 에반 프리드라는 기사가 무사할 수 있기를.

1년 전 입었던 은혜를 떠올린 아제스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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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감싸는 고양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힘.

자신의 몸을 감싼 불꽃을 보는 에반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달랐다.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본질과 마주한 그 순간 무언가 벽을 깨부순 느낌이 들었다.

잔불마저 태웠다고 생각한 마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풍부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화염, 몸을 감싸고 있는 화염의 질이 달랐다.

‘...훨씬 뜨거워.’

자신의 몸을 두르고 있음에도 그 열기가 전해질 만큼, 불꽃에 닿는 땅에서 불길이 치솟아오를 만큼.

몸을 감싸고 있는 순백의 염화에서 느껴지는 열이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몸에서 느껴지는 힘, 어쩌면 마스터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대한 힘이 온 몸에서 꿈틀 거렸다.

이 힘을 쏟아내고 싶다.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 몸에서 폭발적으로 차오르는 힘을 밖으로 쏘아 보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쿠르릉­

허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당장 저 하늘에 떠있는 본 드래곤, 말로릭을 바라본 에반이 한 차례 쓰게 웃어보였다.

저걸 어떻게 죽여야 할까. 아까처럼 승산이 없다, 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저 드래곤이 지닌 힘이 여태껏 만났던 그 어떤 적보다도 강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화르륵! 불꽃이 더욱 거세게 피어올라, 주변의 흑무를 단숨에 걷어내기 시작했다.

더 이상 흑무는 자신에게 방해가 될 수 없었다.

한 때 숲이었던 이 주변을 감싸는 흑무를 전부 걷어냈을 때, 그럼에도 여전히 느껴지는 위화감에 에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치 주변의 공간이 단절된 느낌이었다.

이 안에서 느껴지는 모든 마력, 파장, 그 모든 것이 이 숲이었던 공간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흑무인가.”

여전히 저 가장자리에서 꿈틀대는 흑무,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허나 오히려 그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괜히 다른 곳에서 지원을 왔다간 순식간에 쓸려나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적어도 황태자의 수준이 아니라면, 이미 동굴에서 죽었을 목숨이었다.

[너는 무엇이냐.]

공기를 찢어발기는 목소리. 듣기만 해도 몸이 저릿함에 에반은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의 앞에 있는 존재를 노려보았다.

말로릭이라 했던가. 이제는 그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바라보기만 하더라도 숨이 멎을 것 같았던 방금과는 달리, 그 눈에서 피어오르는 보랏빛 불꽃을 똑바로 마주볼 수 있었다.

에반은, 말로릭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 난 검을 힐끔 바라 볼 뿐.

부러지지 않는 검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리 쉽게 부서질 줄이야.

허나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마나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검, 혹시 저 검을 다시 이을 수 있지 않을까.

콰아아­

말로릭이 가까워질수록, 에반은 자신에게 향하는 적의가 점점 커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부러진 검의 손잡이를 잡아든 채, 에반은 조용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두근, 심장이 맥동한다. 늘 이 검을 쥘 때면, 묘한 감각이 몸을 휘감곤 했다.

그 때는 그저 마법검이 가진 특성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 검이 자신과 감응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빛이 스며든다.

부러진 검에서, 손잡이만 남아 더 이상 가망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검에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그 모습이 달랐다. 아가리를 벌린 용이 손잡이가 되었고,

그 위로 길쭉하게 뻗어난 검은 이전보다 새하얀 색을 띄고 있었다.

마치 타오르는 태양처럼, 더할 나위 없이 밝은 순백색을 띄는 검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역시.’

이 검은 피와 관련이 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지닌 용의 혈통과 관련이 있었다.

오로지 흑마법만을 적대하는 검, 타오르는 성염을 검에 둘렀다.

말을 길게 섞을 필요는 없었다. 베르만이 저것을 부른 이상, 오로지 이 공간에서 저 존재를 처리해야만 했다.

콰아앙­!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이 대지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균열이 인 바닥을 본 에반이 헛웃음을 흘렸다. 도대체, 얼마나 힘이 강해진 것일까.

이 힘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아까처럼 시간제한이 있으리라.

3분, 시간을 상정한 에반이 말로릭을 향해 진각을 밟았다.

말로릭 또한 에반이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을 것이란 걸 금세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죽인다. 호의를 주었건만, 그것을 적의로 보답하는 이에게 친절히 대할 생각은 존재치 않았다.

구우웅­자신의 몸에 있는 힘이 온전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말로릭의 날개가 옅게 떨렸다.

평소의 5할 정도는 될까, 의식이 완전하지 않았는지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힘에 말로릭이 노호성을 터트렸다.

[빌어먹을 놈들, 무엇 하나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어쩐지 조금 이른 소환이라 생각했다.

허나 그 이른 소환이 준비가 다 되어서가 아닌, 그저 급박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니.

이글거리는 흑염이 말로릭의 아가리에서 꿈틀거렸다.

흑마법사들의 흑염과는 다른, 용의 심장에서 들끓는 마나로 이루어진 흑염이었다.

위험했다. 그걸 판단한 에반이 공중에서 몸을 비틀었다.

화르륵! 몸을 두른 불꽃이 마치 날개처럼 펼쳐지자, 순간 평소와는 달리 더 먼 거리를 도약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저 불꽃에 닿지 않는 방법. 에반의 몸이 그 뼈에 닿자 말로릭이 미친 듯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허나 버틴다. 검을 몸체에 박아 넣은 에반이 이를 악물었다.

흑염이 닿은 염화가 순식간에 스러졌다. 닿으면 몸이 바스러질 만큼이나 뜨거운 열기,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지도 못한 채 천천히 날개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공격의 방향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근육도, 그렇다고 시선도 볼 수 없었기에 모든 공격들을 직접 보고 피해야만 했다.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

분명 쓰러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몸에 상처가 가득했지만,

몸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이 그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뚫린 배의 상처가 어느새 완전히 아물었다.

한 쪽 팔은 아직 삐걱거렸지만, 이전보다 상태가 훨씬 좋아진 것에 에반은 감사했다.

콰아앙, 뼈 갑옷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도였다.

마나 자체의 질은 올라갔지만, 마스터에 닿지 않아 위력 자체는 아직 뼈를 한 번에 부수기에 모자랐다.

덮쳐오는 거뭇한 실, 당장이라도 자신을 태우려는 흑염, 그리고 바닥에서 솟아 오르는 뼈 가시들.

사선을 오가는 그 상황 속에서 에반은 눈을 감았다.

이전, 황태자와의 대련을 떠올리며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 공격들을 느끼기 시작했다.

예민해진 감각, 용의 마나는 조화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자연과 감응한다. 자연과 동화된다. 불어오는 바람이, 자신에게 향하는 공격을 속삭이고 있었다.

최소한의 움직임, 허나 그 움직임으로 최대의 효율을 얻을 수 있도록.

어쩌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몸을 비틀며, 힘을 준 어깨를 당겨 계속해서 날갯죽지를 베어나간다.

가가가각! 여전히 단단한 뼈였다.

불꽃이 닿는 부분이 조금 녹는 듯하면서도 여전히 건재한 그 날개를 본 에반이 이를 악물었다.

흔들리는 몸체에서는 균형을 잡는 것만으로도 꽤나 많은 힘이 소모되었다.

두근, 뛰는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도록. 마나를 일으켜 심장의 맥동을 촉진 시켰다.

더 빠른 혈류, 더욱 팽창된 근육. 근육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불꽃에 더해져 더욱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한다.

파아앙­!

어느 순간부터, 검이 휘둘러짐과 동시에 공기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한 걸음, 공격을 피하는 움직임보다 검을 휘둘러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흑염이 닿는 것보다도 불꽃이 그 흑염을 집어 삼키는 것이 더욱 빨랐다.

느려진다. 느려진 시야 속에서, 에반의 눈동자가 하나의 균열을 보았다.

언제 저 균열이 생겼지? 생각한다, 아니...생각이 흐려진다.

마치 몸이 뭉개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공간과 동화되어서, 점차 의식이 흐릿해진다. 허나 시야만은 또렷했다.

검이 흐르는 궤적, 마치 붓처럼. 검이 붉은 색의 피를 물감 삼아 허공을 휘젓는 선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아.’

무아(無?).

존재를 잊는다. 나 자신을 잊는다.

지금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 잊는다.

내가 휘두르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 잊는다.

이 시간을, 내가 행하고 있는 그 행위를,

주변을 덮고 있는 이 흑염을 잊은 채. 오로지 하나의 행위에 초점을 잡는다.

벤다.

적막함이 퍼지는 이 공간 속에서, 에반은 하나의 행위만을 기억했다.

저 날개를 베어낸다. 땅으로 떨어뜨린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타오르는 불꽃이 더욱 찬란한 광휘를 내뿜었다.

순백이 아닌, 찬연한 금색의 불꽃이 이글거리며 날개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말로릭마저 그 고통을 느낄 만큼 뜨거운 불길이었다.

불꽃과 닿는 흑염이 힘없이 스러졌다. 더 이상 열기를 버티지 못한다.

뚜두둑, 날개 하나가 부러졌을 때, 말로릭은 차오르는 분노를 모조리 마법으로 승화시켰다.

하늘을 뒤덮은 수백 개의 마법진,

불꽃, 번개, 땅, 얼음, 그 모든 원소들이 담긴 마법들이 자신의 몸을 향해 쏟아짐에도 말로릭은 멈추지 않았다.

제 몸에 붙은 이를 떼어내고 싶다는 그 일념!

이윽고 마법이 닿는다.

번개가 작렬하고, 염열이 이글거리며 뼈를 녹였다.

녹인 뼈를 얼어붙은 얼음위로 대지의 파편이 쏘아져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속에 에반은 존재하지 않았다.

콰아앙! 땅으로 착지한 에반이 머리를 털어내며 서서히 이지를 찾았다.

날개를 베어냈으니 소기의 목적은 이뤘다. 천천히 땅으로 추락하는 말로릭을 바라보며, 에반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스으으­

‘방금 그건...조금 더 연습해야겠어.’

무아에 빠진다. 오로지 한 행위에 집중할 수 있기에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방금도 조금만 늦었더라면, 저 마법 속에 갇혀 그대로 죽었으리라.

말로릭이라는 존재는 싸움에 미숙한 듯 보였다.

당황한 것일까, 아니면 소환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제 힘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후우,

숨을 뱉어내면서. 에반이 다시금 말로릭을 바라본 채 땅을 밟았다.

어쩌면 마지막 공격일지도 몰랐다. 불길이 사그라든다.

상처는 완전히 나았지만, 이제 당분간은 마나를 꺼낼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1분, 아니. 어쩌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모든 마나가 소진되지 않을까. 신중하게, 그리고 확신을 담아서.

쿠웅,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번에 실패한다면, 이 뒤에는 어떻게 될까.

두려움이 앞섰다.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이 여기서 쓰러진다면, 저 용이 향할 곳은 유리스 일 것이 뻔했으니까.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에 옷조각이 타올라 흩어지기 시작했다.

용케도 바지가 온전히 남은 모습에 에반이 웃음을 흘렸다.

두근.

심장이 터질듯이 뛰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찢어져 몸 내부에서 폭탄처럼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심장 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맹렬히 회전하는 심장의 마나가 근육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콰아앙! 땅에 닿은 말로릭이 몸을 움직이자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손이 휘둘러진 부분의 땅이 튀어나와 이내 주변을 덮치기 시작했다. 자욱해진 운무, 에반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그저 두렵기만 했던 눈, 이제는 서로의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

말로릭은 예상치 못한 이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두렵지 않았다. 확신이 있었다.

저 존재를 베어내고, 아이린에게 돌아갈 거란 확신이 있었다.

검에 담긴 것은, 오로지 자신을 향한 믿음이었다.

이 순간, 신뢰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과 손에 들린 검이었으니.

타오른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대지를 덮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 대지 위에 어둠은 존재하지 않았다.

뜨지 않은 태양보다도, 저 어둠으로 덮인 하늘에 있을 그 어떠한 빛보다도 찬연하게 빛나는 섬광이 에반에게 있었다.

이글거리는 검, 타오르는 몸, 그리고. 그 속에서 반짝이는 금색의 눈이 말로릭을 향했다.

말로릭은 이 순간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오로지 용만이 가지고 있는 심장은 사후(死?)에도 남아있었지만, 그 힘은 아직 온전치 않았다.

하루, 아니 반나절만 더 있었다면 완전한 힘을 낼 수 있었다.

허나 그럴 수 없었기에, 말로릭은 제 심장을 불태우고자 마음먹었다.

구오오­

입에서 검은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을 때, 에반은 그 불길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브레스, 오로지 용만이 할 수 있는 대마법.

저 입에서 새어나오는 불꽃은 이 근방을 전부 뒤덮을 터였다. 하여 피하지 않는다. 뽑은 검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이 순간, 에반은생각했다.

지켜야 할 이름들.

가슴에 담아, 언젠가 행복을 그리게 할 거라 다짐했던 그 모든 사람들을.

한 때 후회했던 과거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이번에는 지키겠다고 각오했던 그 때의 기억을.

달빛이 만연하게 퍼졌던 그 강가에서 연주했던 음악을, 흘려보냈던 옛 인연들을.

담는다.

이윽고 어둠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심장을 부수며, 그렇게 사방을 덮은 어둠은 그야말로 칠흑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에반은 그 속에서 절망을 보았다.

아무도 지키지 못했던 과거를, 어둠으로 점철되어 스스로를 속박했던 그 날을.

온 몸을 핥는 불꽃에서 공포를 느꼈다. 혹여 자신이 이 존재를 이겨내지 못했을 때, 그 뒤로 펼쳐질 일들을 보았다.

당장 쥐고 있는 검을 놓으라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스러지라며 속삭이는 그 어둠.

에반은 귀를 닫았다. 눈을 감았다. 감각을 차단하여, 숨을 쉬는 것조차 그만두었다.

어둠이었다. 한 치 앞조차 보이지 않는 이 칠흑과도 같은 어둠에 어쩌면 굴복할 수도 있었다.

허나,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화르륵,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서렸다.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어둠을 집어삼키며 피어오르는 성화가 에반의 어둠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후회, 많이 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을 그리며 슬픔에 잠긴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 아이린을 지키고자 검을 들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숨을 죄여오는 마력, 당장이라도 자신을 태울 듯 피어오르는 염열,

사방을 덮어 자신의 주변 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포착할 수 없는 짙은 어둠.

그 때와는 비교하는 것이 우스울 만큼이나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결국 마음가짐은 똑같았다.

지키고 싶다면, 진정으로.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지키고 싶다면.

결국 할 수 있는 행동이란 단 하나뿐이 아니던가. 중얼거린다.

서임식에서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을 떠올리며. 한계에 다다를 때마다 속으로 읊었던 짧은 말 한마디를.

“기사여.”

검을 들어라.

들린 검에서 불꽃이 이글거렸다.

하얗게 뻗어 나온 검신에 마나가 더해진다.

길게, 길쭉하게. 이 어둠을 단번에 갈라 저 용이란 존재에게 닿을 수 있을 때까지.

몸을 감싸던 불꽃이 사라진다. 이 순간, 오로지 검이란 존재에게 모든 마나를 이끌어낸다.

피어오른다. 찬란한 금색의 불꽃이, 어둠이란 존재가 무색할 만큼이나 반짝이는 빛이 일렁인다.

들린 검은 무거웠기에, 이를 악문다.

팽팽하게 당겨진 어깨가 휘둘러지고, 빛을 머금은 검이 앞으로 나아갔다.

길쭉한 검기, 별이 흐르듯 찬란한 궤적이 허공에 그려진다.

[나는! 이렇게 스러질 수는 없다. 나는­ 나는­!]

이렇게 스러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위대한 용의 일족, 한 때 죽었으나 이렇게 다시 살아났다.

근데 이리 허무하게 죽어야 한다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허나, 터져 나간 심장은 다시 반응하지 않았다. 무리하여 마나를 끌어올린 탓에,

이제는 생명을 이어나갈 생기마저 사라진 뒤였기 때문이었다.

머리에 그 빛이 닿는 순간, 말로릭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 찬란한 금안을 쳐다보며...조용히 탄식했다.

스릉­

어둠을 가른다. 단번에 퍼진 새하얀 섬광이 주변의 어둠을 걷어냈다.

뼈에 닿았지만, 그 뼈마저 부서진다. 거대한 괴성이 들려왔다.

용이 내지르는 마지막 단말마, 길지 않았다.

흑과 백, 두 가지 색으로 나뉜 세상에서 남은 것은 백색뿐이었다. 그림자가 스러진다. 어둠이 찢어진다.

...이윽고, 빛이 보였다.

감은 눈꺼풀에서 마침내 새하얀 빛이 보였을 때. 에반은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자신이 내뿜는 불꽃이 아닌, 하늘에서 새어나오는 빛에 가는 숨이 새어나왔다.

반으로 갈라진 용.거뭇한 심장마저 반으로 갈라져,

더 이상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음에 비로소 긴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하아...”

조금씩 구름이 걷힌다.

새까만 하늘은 어느새 사라지고, 잔뜩 낀 구름 사이로 햇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밝은 빛기둥이 땅에 내려앉고, 너무도 자연스러운 그 빛에 에반은 옅게 웃어보였다.

이제는 전부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어서, 서서히 푸른빛을 드러내는 하늘을 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지만, 이내 머릿속을 뒤덮은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아이린.’

긴장이 풀려 휘청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해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널부러진 몸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떠오르는 그 얼굴에 에반이 조용히 웃었다.

보고싶었다.

심장이 저릴 만큼이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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