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어둠을 가르고(6)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올 때만 하더라도 비가 추적이는 하늘이었건만.
눈을 뜨니 달빛이 내려앉는 탓에 그 시간을 짐작하기가 꽤나 힘들었다.
아무래도 하루는 지나지 않았을까.
흑마법사들을 상대한 시간이 워낙 길었으니, 어쩌면 저 해가 한 바퀴를 돌았을 거란 생각에 입맛이 썼다.
여전히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큰 상처들은 용혈 탓인지 아물긴 했지만,
말로릭과 싸우며 입은 상처 탓에 온 몸에서 아직까지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름 초인이라 불리는 몸 상태로도 이 정도였으니, 일반인이었다면 진즉 죽었을 상처이리라.
쿨럭,
목구멍에 고인 피를 한 차례 뱉어내며,
그렇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자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흑마법사? 아니, 이 기척은...아마도 황태자의 것이 아니던가.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저 멀리서 황태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함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에 널부러진 말로릭의 뼈, 그리고 흑마법사들의 시체들.
황태자가 보일 반응이 너무 뻔한 터라, 이윽고 그가 눈을 크게 떴을 때 그저 한 차례 웃을 따름이었다.
“...이게 다 뭔가?”
“보시는 대로죠.”
바닥에 떨어진 검의 손잡이를 털며 답하자,
황태자는 살짝 몽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작게 벌렸다.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그 거대한 뼈를 매만지던 황태자가 고개를 털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드래곤, 설마 내 생각이 맞는 건가. 자네가 이 본 드래곤을 잡았다고?”
“온전하지 않은 녀석이었습니다. 흑마법사들이 급하게 소환한 탓에, 전설 속에 나오는 녀석들 만큼 강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어쨌든 본 드래곤은 맞지 않나. 아제스트 경이 크게 놀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이건...놀랍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군.”
아제스트 경이라, 그 말에 황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이내 그가 다시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제스트 경이 내게 따로 부탁을 했었네. 유리스 공작령 북부,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자네가 싸우고 있을 거라고. 내게 스승이나 다름없는 분이니 이렇게 나왔는데, 보니까 검은 연기가 가득 하더군.”
흑무, 그것을 떠올린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뚫고 들어온 것일까, 허나 황태자는 그것까진 무리였다며 고개를 저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안개를 본 뒤 3일이란 시간이 흘렀네. 그리고 그 안개가 사라지고 나서야 들어올 수 있었지. 설마, 그 3일이란 시간동안 이 안에 있었던 건가?”
“...3일이나 흘렀을 줄은 몰랐습니다.”
3일이나 흘렀다니, 문득 떠오른 아이린의 얼굴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주는 어떻게 됐을까, 만약 이렇게 했는데도 저주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아이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지 알 길이 없어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서 빨리 돌아가야 했다. 3일이나 흘렀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흘러간 시간에 점점 조급한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허나, 이내 내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와 같이 온 마법사와 기사들, 그들이 내게 보내는 시선엔 하나같이 경악이 서려있었다.
특히나 거대한 용의 시체를 볼 때면 약속이라도 한 듯 탄성을 내뱉으니,
그것이 부담스러워 그들에게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일 따름이었다.
“...자네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벌써 제국이 망했을지도 모르겠어.”
“과찬이십니다.”
“자네 가슴팍에 있는 훈장의 꽃잎 개수가 또 늘겠군. 얼추 50구는 되어 보이는데, 이제는 꽃이 아니라 무엇으로 만들어줘야 할 지 고민 좀 해야겠네.”
그렇게 말하며 내 가슴팍을 툭, 두드린 황태자는 이내 마법사 하나를 부르며 조용히 나를 쳐다보았다.
“얘기 하고 싶은 건 많지만, 그대를 이렇게 계속 붙잡을 수는 없을 것 같군. 자네가 살아있다는 걸 알려야 하지 않겠나? 나는 아제스트 경의 부탁대로 이 곳을 수습해야 하고...소가주에게 어서 돌아가 봐야 할 테니까.”
이윽고 다가온 마법사가 천천히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텔레포트이리라, 그 모습을 바라보길 잠시. 나는 황태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조용히 감사를 표했다.
“배려 감사합니다, 전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배려라니, 우습지도 않아.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은...오히려 내가 하고 싶네.”
스윽, 황태자의 주먹이 제 심장을 향했다.누군가에게 경의를 표하는 제국의 인사법.
그리 자세를 취한 황태자는,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지. 제국의 1황자이자, 황태자이자, 태양아래 두 번째로 존엄한 이가 선언하겠네. 그 누구도 행할 수 없는 기적을 홀로 만들어낸, 이 제국의 영웅을 축복한다고 말이야.”
“...영웅이라뇨.”
“영웅 맞네, 누가 뭐라 하더라도 내가 그리 정했으니까.”
영웅이라니, 어쩐지 부끄러운 칭호에 조용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윽고 텔레포트에 의해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게 작게 고개를 숙이는 황태자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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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해진 하늘, 여명마저 사라져 오로지 달빛만이 어스름히 피어나는 어둠 속에서.
텔레포트를 통해 닿은 곳은 꽤나 익숙한 장소였다.
우연일까, 아니면 마법사가 의도한 것일까.
정원의 구석, 아이린의 집무실과 꽤나 가까운 곳이란 것을 깨닫자마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서늘한 바람이 옷 하나 없는 몸에 닿았다. 이대로 누군가를 만나기엔 조금 그렇지 않을까 싶었는데,
옆에 있던 마법사가 쭈뼛거리며 내 어깨를 쿡쿡 찔러댔다.
“...그, 저기. 옷을 만들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물론 셔츠 한 벌 정도가 끝이긴 한데요.”
금발을 치렁치렁하게 늘어트린 마법사가 양 볼을 붉힌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점점 내려가 내 상체를 향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옅게 웃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네, 마, 만들 수 있어요.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몸에 남은 상처를 아이린이 본다면, 분명 무어라 하겠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그렇게 옷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렸다.
마법으로 옷을 만든다, 라. 마법사의 설명으론 그리 자주는 쓰지 못한다며,
금방 찢어지는 편이라 한 번 입으면 버려야 할 것이라 말했다.
어차피 그저 상처를 가리기 위함이 아니던가. 피야 새어나오겠지만,
그래도 상처를 직접 보이는 편보다는 나을 거란 생각에 한참을 기다릴 따름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헛기침을 내뱉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이내 내게 셔츠를 건네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고맙습니다.”
“...그으, 네. 네.”
허나 더 이상 말할 무언가가 떠오르지는 않았는지, 자기 머리를 쥐어박은 그녀는 황급히 마법을 써서 그대로 사라졌다.
황당한 나머지 그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그 마법사를 생각에서 지운 채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가장 중요한 것,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그렇게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몸이 무거웠다. 물을 머금은 솜처럼, 발을 내딛을 때마다 느껴지는 무게감에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허나 그럼에도 눈에 아른 거리는 그 얼굴을 떠올리며 걷는다. 저 앞, 창문 새로 비치는 빛을 따라서.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여러 말이 떠올랐지만 그 중에 어떤 것이 가장 좋을지 정할 수가 없었다.
3일, 아이린은 그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조용해진 공작저를 보아 아마도 그녀가 혼란을 수습한 것이리라.
만약 그녀가 공작을 대신해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면, 또 이전처럼 수척해진 것이 아닐까 괜스레 걱정이 피어올랐다.
저벅
조용히, 적막한 정원을 누벼 창문에 다다른다.
어두운 저택에서 홀로 밝게 빛나는 방. 창문을 바라보자, 그 안에 있는 아이린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전에 보았을 때와 달리 수척해진 얼굴, 또 잠을 거르며 일을 한 것인지 눈 밑에 드리운 그늘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책상 한 구석에 가득 쌓인 서류, 그리고 손가락에 끼워진 인장.
그녀가 어찌하여 저렇게 있는 건지 쉬이 짐작할 수 있어서, 옅게 한숨을 내뱉은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당장이라도 창문을 두드려, 그녀에게 내가 돌아왔노라 말하고 싶었다.
그 손을 잡고, 이내 품에 껴안아 살아있다는 사실을 만끽하고 싶었다.
허나 참았다. 그녀가 나를 먼저 발견하기를 기다리며, 그렇게 한참동안 아이린을 지켜보았다.
가녀린 손이 떨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펜을 잡았던 건지, 붉게 물든 손가락의 옆면이 눈에 거슬렸다.
한숨을 옅게 내쉰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조용히 창문 앞에 섰다.
잠깐, 아주 잠깐. 그녀가 창문을 바라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 시간이 영원처럼 길어서, 터질 듯 뛰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 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다.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지는 듯 해서, 그저 살짝 웃어 보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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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이 떠난 지 3일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만 같은 탈력감이 돌았다.
어쩌면 다시는 그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영영, 시체조차 찾지 못한 채 기억 속에서만 그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로페나도, 크리스 경도 아직 희망을 잃기엔 이르다 얘기했지만.
계속해서 커져가는 불안감에 숨을 쉬는 것조차 쉬이 할 수 없었다.
후회, 에반을 그리 혼자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절망, 다시 그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뱉어내기도 힘들었다.
오로지 서류만을 들여다보며, 떠오르는 잡념을 지우려 애쓰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허나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떠오르는 얼굴에 눈을 감는다.
만약 정말로 죽었다면,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평생토록 자신의 행동을 원망할 터였다.
그 때 가지 말라며 붙잡았어야 했는데, 아무리 그를 믿어도, 그리 위험한 곳에 홀로 보내서는 안됐는데.
지익, 격해진 감정에 펜촉이 제멋대로 선을 그었다.
손가락이 저릿했다. 도대체 몇 시간을 이러고 있던 것일까. 식사조차 거른 탓에 정신이 몽롱했다.
당장이라도 누워 쉬고 싶었지만...어찌 편히 잘 수 있단 말인가.
젖혀진 고개, 뻐근한 목을 어루만지기를 잠시.
흐릿한 시야에 눈가를 매만지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어두워진 바깥을 보기 위해서, 그저 단지 그런 이유였을 뿐인데.
“......”
순간, 눈이 크게 뜨였다. 몽롱해진 자신의 정신이 헛것을 보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늘 위에 뜬 보름달이, 자신에게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반짝이는 녹안에, 달빛이 부서져 찬란하게 빛나는 그 금발을 지닌.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미소를 지은 그 얼굴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순간 많은 말들이 속에서 튀어나오려 했지만, 결국 뱉어낸 것은 옅은 침음뿐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렇게 천천히 창문으로 다가간다. 차마 닦지 못한 피가 얼굴에 묻은 에반의 모습에.
자신의 눈에 비치는 것이 부디 환상이 아니기를 바라며.
“...아가씨.”
“도대체.”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어쩌면 조금 지친 듯 옅게 떨리는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잔하게 퍼지는 숨소리가, 뛰는 심장 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에반은 살아있었다. 살아돌아와서, 자신에게 이렇게 돌아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드르륵,
거칠게 열린 창문, 곧바로 손을 뻗어 그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어이없을 만큼이나 따스한 그 감촉에 헛웃음을 흘린다.
“...또 다쳤네요.”
원래 입고 있던 옷이 어디 갔는지,
흰색의 셔츠 하나만 걸친 에반의 몸은 군데군데에서 붉은 색이 꽃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목덜미에 있는 상처, 그 밑으로 보이는 상처에 입술을 짓씹었다.
한 번도 이렇게 다쳐온 적이 없었는데, 한쪽 팔이 특히나 붉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쳐서 오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 번이라도 그 말을 지킨다면 좋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돌아올 때마다 다쳐서 오는 건지.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걸 알았지만, 괜스레 차오르는 짜증에 눈이 가늘어졌다.
“...죄송합니다.”
“사과 같은 건 필요 없어요.”
툭,
가슴팍을 손으로 두드린다. 가볍게 밀치듯 닿은 그 손에 에반의 몸이 뒤로 밀렸다.
자신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고는 있는 것일까.
3일이란 시간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상처를 입고 와서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일 수 있는 걸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요?”
툭,
아까보다는 더 세게. 그렇게 때린 탓에 에반이 눈살을 찌푸린다.
이 3일 동안수없이 고민했다.
아버지의 저주를 해금하는 것을 멈춘 채 곧바로 에반에게 가야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이라도 황실에 지원을 요청해서 에반을 구하러 가야하는 것이 아닐까.
허나 자신을 믿어달라는 그 말이, 믿고 있다 말했던 그 기억에 겨우 그 충동을 억눌렀다.
악물린 잇새에서 한숨이 새어나온다.
이렇게 화낼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럼에도 차오르는 감정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힘없이 가슴팍을 내치쳤다. 한 번, 두 번.
그러면서도 혹시 아프지는 않을까, 그렇게 에반을 걱정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느냐 물었어요.“
“모르겠습니다.”
“거짓말 하지 말아요. 알고 있잖아요. 내가, 내가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면서. 그렇게 말하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퍽.
둔탁한 충격음에 입을 다문다. 다물린 입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그렇게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속으로 품었다.
보고 싶었다는 한 마디가 그리 뱉기 힘든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말하고 싶었다. 달이 뜰 때면 떠오르는 얼굴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그대가 혹여 죽었을까봐. 자신을 원망한 채 그렇게 그대를 기다렸다고.
차라리 무어라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 시선이 원망스러웠다.
허나 그럼에도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좋아서, 떨리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다시는, 가지 마요.”
믿고 있어도, 아무리 에반이라는 사람을 신뢰하더라도. 이제는 그리 떠나보낼 수 없었다.
하루만 떨어져 있어도 그토록 불안한데, 이틀, 삼일이란 시간을 견디는 것이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이제는 그대라는 사람을 어찌 홀로 보낼 수 있을까. 가슴이 답답했다. 무거운 숨을 토해내며, 그렇게 대답을 기다린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동안 흐르는 적막 속에서.
고개를 숙인 자신에게 에반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이 얼굴에 닿아, 이내 위를 향해 들어 올려졌다.
얼굴이 엉망일 텐데, 그 생각에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에반의 손이 그 손을 치워내며 이내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
“우셨네요.”
“치워요 이 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허나 자신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그 커다란 손이 눈가를 부드럽게 훑기 시작했다.
잔뜩 흘려진 눈물이 닦이고, 이내 피식 웃은 에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 말에 입이 다물린다. 전조도 없이 툭, 하고 들려온 그 말에 얼굴이 붉어진다.
찬연한 달빛이 비춰진 에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와서, 이윽고 턱 하고 막힌 숨을 겨우 내뱉으며 천천히 그 눈을 마주했다.
그 말이 사실인 듯, 일렁이는 녹안이 참 아름답게도 반짝였다.
늘 자신을 바라보던 눈, 거짓하나 섞이지 않은 그 눈에 할 말을 잃는다.
“이렇게 말하면, 용서 해주실 겁니까?”
툭,
옅게 미소 짓는 그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가슴팍을 밀친다.
능글맞게 웃는 얼굴에 화를 내고 싶었건만, 입가에 지어지는 것은 미소뿐이라.
결국 그렇게 웃음을 터트린다. 화를 내려 했다. 왜 이제야 돌아온 거냐면서,
그를 원망해보려고, 자신이 말한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에 화내려 했는데.
...도무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툭,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다. 귓가에 들려오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가 살아있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머리를 통해 전해져 오는 체온이 귓가가 뜨거워지고,
그 심장 소리에 따라 내 심장 또한. 그렇게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용서...안 할 거예요.”
“그러십니까.”
그렇게 말하며 웃어주면 용서해줄 거라 생각한 걸까.
그럴 리가, 이제는 홀로 보내지 않을 터였다. 자신의 곁에서, 자신의 옆에서.
언제까지고 자신만을 지키도록. 옷자락을 붙잡으며 그렇게 천천히 그를 감싸 안는다.
닿았다. 맞닿은 가슴팍에서 뛰는 심장이 그렇게 닿는다.
숨결이 닿고, 그의 체온이 닿고, 그렇게 서로의 마음이 닿는다.
전해져 오는 심장 소리가 빨라질수록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는 듯 했다.
이 시간이 조금 더 오래갈 수는 없을까. 그 품에 파고들수록 곧 있으면 사라질 이 감촉이 아쉬워서.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더해졌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눈을 질끈 감은 채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허나 끝은 다가오기에.
조용히 입을 연다.
오로지 서로의 심장소리만이 들려오는 이 고요 속에서, 아주 약간의 마음을. 그 편린을 담아서.
“...나도 보고 싶었어요.”
어쩌면 그대보다도 더욱. 심장이 저릴 만큼, 이따금 숨이 차올라 눈물을 머금을 만큼.
그토록 그대가 보고 싶었다.
만월, 밤하늘이 무색할 만큼이나 찬란한 그 빛 아래에서.
그렇게 품고 있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