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연인인 듯, 연인 아닌 (1)
* * *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한 게,
그렇게 감정에 젖어 한참을 끌어안다가도 뒤늦게서야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점이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끌어안았던 사이였건만,
귀끝이 새빨개진 아이린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내게서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방금 한 말은.”
“저 보고 싶었다고 하신 것 말입니까?”
“이, 잊어요. 그냥 얼떨결에 한 말이니까요.”
무얼 그리 부끄러워 하는 건지, 방금까지 내 앞에서 그토록 서럽게 울지 않았던가.
눈물을 닦는 와중에도 마음이 편치 않아 걱정했는데.
이제는 조금 괜찮아 보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녀를 울린 것 같기도 하고, 그녀가 그리 우는 것은 아무래도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가슴팍을 밀치는 그 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상처가 벌어진 것인지, 아까보다 더 크게 번지는 피에 아이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피 나잖아요. 치료 안 하고 바로 온 거예요?”
“많이 나은 겁니다. 아예 뚫렸으니까, 지금은 뭐 그럭저럭”
“...뚫려요?”
순간 내게 향하는 아이린의 시선에 몸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순식간에 스산해진 분위기에 그녀의 눈치를 살피길 잠시, 이내 내 팔을 붙잡은 아이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따라와요. 아무 말 하지 말고.”
“이제 괜찮습니다. 애초에...알겠습니다.”
화가 난 듯, 나를 바라보는 아이린의 눈이 점차 가늘어졌다.
혹여 그녀가 또 다시 울지는 않을까.
괜스레 피어오르는 걱정에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쩌면 내가 말실수를 한 것이 아닐까. 아무 말 없이 나를 창문 안쪽으로 들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저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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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린다. 너무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나는 남자고...그녀는 여자인데. 내가 주춤거리자, 한숨을 내뱉은 아이린이 고개를 슬쩍 돌리며 입을 열었다.
“...눈 감아줄 테니까 벗어요. 붕대 감아야 할 거 아니에요.”
“제가 감을 수 있습니다.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애초에 이전에도 붕대는 홀로 감지 않았던가.
처음 다쳤던 날을 떠올리며 그리 말하자, 이윽고 한숨을 내쉰 그녀가 내 팔을 쿡 찌르며 나를 흘겨 보았다.
팔에서 전해져 오는 아릿한 고통에 이를 악문다. 아무래도, 뼈까지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은 것일까.
순간 팔을 움켜쥐자 그 모습을 본 아이린이 입꼬리를 비틀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래도 홀로 감을 것이냐며, 그리 묻는 것만 같은 그 표정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래도요?”
“...진심이십니까? 붕대 감아주신다는 거.”
“제가 거짓말을 하는 걸로 보이나요. 빨리 벗어요. 아직도 피 흐르잖아요.”
이런 상황에 놓이니, 그녀의 태도가 이전과는 꽤 달라졌다는 것이 비로소 실감 되는 듯 했다.
전에 붕대를 감고 있을 때는 어땠더라, 그 때는 나를 바라보던 시선도 지금과 꽤나 달랐던 것 같은데.
그 생각에 피식 웃으며 셔츠를 벗자, 단추를 집은 셔츠가 저 홀로 찢어져 허공에 힘없이 널부러졌다.
힘을 준 것도 아니고 단추를 잡았는데 이리 찢어지다니,
살짝 당황한 나머지 그 셔츠를 빤히 쳐다보기를 잠시.
이내 나를 쳐다보는 아이린의 시선을 슬쩍 마주친 채 입을 열었다.
“마법사가 만들어 준 건데, 생각보다 질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전에 입던 옷은 어디로 갔길래.”
“다 찢어졌습니다. 바지만 겨우 남아서, 같이 왔던 마법사분이 만들어 주셨는데...”
“여자에요?”
“...예.”
아이린이 보내는 시선이 한층 따가워진다.
누가 보면 나를 호색한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보는 여자마다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을 거라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내 모든 걸 걸고 그건 오해라 장담할 수 있었다. 물론 내게 오는 편지는...어쩔 수 없지만.
하여 그녀를 바라보며 옅게 웃자, 붕대를 꺼낸 그녀가 내 팔을 붕대로 세게 조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런 사람을...”
“네?”
“됐어요. 저 쪽에 있는 약 좀 가져와 봐요. 바르고 붕대 감아줄 테니까요.”
한 쪽에 있는 바구니를 가져다주자, 그 속에서 연고를 꺼낸 아이린이 조심스레 팔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차갑고도 끈적끈적한 감촉이 팔에 닿는 것이 영 미묘해 몸이 움찔거리자, 나를 슬쩍 바라본 아이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도대체 몸을 어떻게 쓴 거예요. 상처가...너무 많잖아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흑마법사가 많았으니까요.”
도망치려면 칠 수도 있었겠지만, 어찌하여 도망칠 수 있겠는가.
만약 내가 그때 그대로 빠져나왔더라면, 아마도 공작의 저주를 풀 수는 없었겠지.
문득 떠오른 공작에 대해 묻자, 아이린은 연고를 천천히 바르며 대꾸했다.
“아제스트 경의 말로는, 아마도 일주일이면 저주를 완전히 해금할 수 있을 거라 하더군요. 그대 덕분이에요. 그대가 아니었으면...아마도 제가 가주 노릇을 평생하고 있었겠죠.”
“손가락에 끼고 계신 거, 인장 아닙니까?”
가시방패가 그려진 인장, 손가락에 끼워진 것을 바라보자 아이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쓰러져 있는 동안에 공작저를 수습할 사람이 필요했으니까요. 아마도 당분간은 제가 가주 노릇을 해야겠죠.”
“어울리십니다.”
“전혀요.”
그렇게 말한 내가 한차례 웃자, 아이린이 한숨을 내뱉으며 내 팔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공작은 죽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어쩐지 안심이 되어서, 그제야 편히 웃을 수 있있다.
조금씩, 이렇게 하나씩 바꿔나가면 될 터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더 이상 비극과는 거리가 멀어진 아이린이 있지 않을까.
내가 했던 모든 일들이 틀리지 않았다고 인정받는 것만 같아서, 비로소 몰려오는 피로감에 잠시 눈을 감았다.
“아까 뚫렸다는 말. 정말이에요?”
한동안 붕대를 감느라 조용했던 아이린이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이제야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어라 답해야 할까. 솔직히 말한다면, 그녀가 무슨 반응을 보일까.
허나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완전히 치료되지 않았던가.
“흑마법사가 만든 창에 찔렸습니다. 물론 지금은 다 나았지만요.”
“그런 말,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말아요.”
붕대를 감추던 걸 멈춘 그녀가 나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조용히, 그렇게 잔잔하게 퍼지는 적막 속에서.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두 눈에 일렁이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라,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그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댄다.
부드럽게 뺨을 쓸어내리면서, 이제는 괜찮다며 한 차례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제 다 낫지 않았습니까?”
“...내가 안 괜찮으니까 하는 말이잖아요.”
툭, 뺨에 닿은 손을 치워낸 아이린이 피가 흘러나오는 내 가슴팍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는 그 피가 멎어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데도,
마치 상처가 가득한 곳을 바라보듯 아이린의 눈살이 한껏 찌푸려졌다.
그렇게 한참의 정적이 흐르고, 지그시 눈을 감은 아이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뒤돌아요. 붕대 마저 감아야 하니까.”
다행히도 등에 있는 상처가 얼마 없는 것일까. 금세 연고를 바른 아이린이 천천히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지직, 붕대 뜯는 소리가 들려오고. 등에 맞닿은 붕대의 차가운 감촉과 동시에 따스한 체온이 닿았다.
팔에 감을 때와는 달리 손이 완전히 맞닿아서 일까.
붕대를 감는 과정에서 닿는 그녀의 가슴팍에 가는 숨을 겨우 내뱉었다.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닿아 간질인다.
늘 그 머리카락에서 전해져오는 향긋한 향에 머릿속이 마비되어, 이내 흐릿한 시야에서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니면 붕대를 감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인지.
붕대를 감싸기 위해 그녀가 내 몸 앞으로 손을 뻗었을 때, 목덜미에 닿은 아이린의 숨결에 몸이 살짝 떨렸다.
마치 뒤에서 내 몸을 껴안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자 괜스레 민망함이 몰려왔다.
그저 붕대를 감는 것일 뿐인데, 나 혼자 이런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얼굴에 열이 번져 올랐다.
아이린의 표정을 볼 수 없는 탓에 그런 기분이 더욱 드는 듯 했다.
그저 앞만 바라본 채, 그녀의 몸이 맞닿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시간이 참 느리게도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붕대를 감기 시작한지 한참이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몸 전체를 감지 못한 붕대를 그저 빤히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아무런 대화도, 그렇다고 이렇다 할 대화의 주제도 떠올리지 못한 채.
몸을 점점 덮어가는 붕대를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살아있기에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는 거겠지.
만약 내가 거기서 죽었더라면, 이런 광경을 보지도 못한 채 후회하며 쓰러졌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죽었다면, 아이린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상상하기엔 조금 꺼림칙한 터라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털어냈다.
툭.
그리고, 붕대를 감던 아이린의 손이 멈춘다.
드디어 붕대를 다 감은 것일까, 그 생각에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등에 닿는 조금 무거운 감촉에 마치 얼어붙듯 몸이 굳었다.
“가만히 있어요. 이대로...조금만.”
붕대가 있어 제대로 느낄 수는 없지만, 간질거리는 이 감촉은 분명 머리카락이 아닐까.
순간 숨이 멎는 듯 했으나,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의 긴장을 푼 채 조용히 앞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 그렇기에 가만히 있었다. 등에 닿는 야트막한 숨결에 심장이 뛰었다.
머리를 등에 댄 그녀라면 느끼고 있지 않을까.
이 심장 소리가 혹여 적나라하게 들릴까 숨고 싶었지만,
어깨의 손을 올린 아이린 탓에 옴짝달싹 못한 채. 그렇게 가만히 그녀의 숨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죽은 줄 알았어요.”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울먹거리진 않았으나, 조금 불안한 듯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이 점점 커지는 듯 했다.
“살아있습니다.”
“알아요, 그런데도 그게 믿기지가 않아서 그래요. 3일이나 연락이 없었잖아요. 다른 때 같았으면 하루도 안돼서 돌아왔던 사람이, 3일 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그렇게. 기다리게 만들었잖아요.”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점점 커져, 이내 귓가에 들려올 만큼이나 크게 번져 나갔다.
조용한,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이나 고요한 이 방에서 듣기에 충분한 소리가 아닐까.
그 소리에 안심한 것인지, 어깨를 부여잡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져 이내 침대에 닿았다.
...내가 있던 3일이란 공백이, 그녀에게 혹여 불안을 안겨준 것은 아닐지.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이대로 등을 돌려 눈을 마주쳐 주어야 할까, 아니면 무어라 말을 덧붙여야 할까.
허나 말주변이 그리 좋지는 않아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주 단순한 것뿐이었다.
조심스럽게 뻗은 손이 아이린의 손가락에 닿는다.
그 따스한 체온을 느낌과 동시에 움찔거리는 것이 우스워서, 한차례 피식 웃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돌아올 거라고.”
내가 떠날 때 그녀가 아무 말 하지 않았던 이유가, 사실은 나를 믿고 있어서임을 잘 알고 있었다.
위험한 곳에 보내는 이에게 침묵했던 이유. 그렇기에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처음엔 조금 섭섭했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오히려 그 믿음에 감사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돌아왔습니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이렇게 돌아올 겁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살고 싶다는 마음을 떠나서, 이제는 내게도 소중한 것이 생겼기에 더욱 그랬다.
이렇게 맞잡은 손이, 전해지는 체온이 좋아서.
이런 사소한 동작이,단순히 붕대를 감아주며 닿는 머리카락이 기꺼워서. 그렇기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꼼지락 거리던 손가락이 조금씩, 아이린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무도회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는 이 손을 놓치지 않을 거란 것을 그렇게 표현한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이어서는 꼬옥.
부둥켜안은 손가락을 잡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등에서 머리를 뗀 아이린이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살짝 발그레 달아오른 볼이, 뒤늦게 빨갛게 달아오른 귀 끝에 웃음을 터트린다.
서둘러 손을 빼내려는 아이린의 손을 꼭 붙잡으며, 다시 아이린을 바라보며 옅게 웃어보였다.
“싫으십니까? 손잡고 있는 거.”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로페나가 곧 돌아올 거예요.”
“지금은 자고 있을 텐데요. 애초에 늦은 새벽이 아닙니까.”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가 퍽 귀여울 따름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잘못한 강아지마냥 내 시선을 피해 요리조리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잡고 있던 손을 더욱 세게 잡아 당겼다.
내 몸이 돌아가고, 이내 내 등과 가까이 있던 아이린의 얼굴이 숨결이 닿을 만큼이나 가까운 거리에 놓였다.
아주 조금, 여기서 조금 더 움직이면.
아마도 닿지 않을까.
허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이대로 그런 일을 하기엔, 아무래도 시기가 조금 일렀으니까.
다만 아이린의 얼굴이 완전히 붉게 달아오른 것에 만족하며, 이마를 툭 건드린 채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이윽고 힘없이 침대에 고꾸라진 아이린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따금 입을 뻐금거리며,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허공에 손을 휘젓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바보같이.”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여 보이자,
내게 붕대를 집어던진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얼 그리 기대하셨습니까. 제가 아가씨께 뭐라도 할 줄 아셨습니까?”
“그 이상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제발.”
침대에 몸을 웅크린 채 한숨을 푹 내쉬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조용히 귓가에 중얼거렸다. 나지막하게,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다음에도, 이렇게 참지는 못할 겁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오늘은, 정말 최대한 참은 것이었으니까.
순간 움찔거린 아이린이 나를 힐끔 쳐다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눈가가 곱게 휘었다.
역시, 아이린이 이런 반응을 보일 때가 가장 즐겁지 않은가.
붉게 물들다 못해 터질 듯 빨개진 귓가를 슬쩍 보곤, 이내 피식 웃으며 벽에 몸을 기댔다.
열려있는 창문 새로 바람이 천천히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끝나가는 봄, 다가오는 여름의 온기를 담은 바람은 습하기 그지 없었다.
알록달록하게 물든 세상이 다시 녹음을 되찾는 계절,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이린 쪽을 쳐다보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마주치는 시선에 한참을 가만히 서있었다.
"여름에."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다듬으며 그렇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남은 한달, 만약 공작이 몸을 회복한다면 아티팩트가 완성될 때까지 며칠이란 시간이 남을 터였다.
그 시간을 그저 한가로이 보낼 생각은 없었으니, 아이린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축제가 하나 있습니다. 저는 한 번 가보고 싶은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말이죠."
건국제가 열리던 그 때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축제를 같이 즐기자는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아이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답을 종용하듯,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같이 안 가실 거면, 어쩔 수 없이 로페나랑"
"가요."
퉁명스레 들려온 대답에 고개를 돌리자, 눈을 가늘게 뜬 아이린이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갈게요. 저도 그 때엔 시간이 여유로우니까."
역시, 수줍음이 많으신 아가씨란 생각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