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오랜 날, 오랜 밤 (4)
* * *
딩
건반 울리는 소리는 내게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오른쪽으로 향할수록, 왼쪽을 향할수록 변해가는 소리에 잠시 정신을 묻어두다가,
이윽고 천천히 눈을 감은 채 기억 속에서 악보 하나를 꺼내들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가 어우러지는 곡은 꽤나 많았고, 그 중에서 유독 좋아하는 곡이 하나 있었다.
아이린은 내 생각보다 바이올린을 꽤나 잘 다루었다.
어쩌면 내가 있던 시대에서 태어났다면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 소리를 들었을 만큼이나.
그런 그녀가 자신만의 테크닉을 살릴 수 있고, 또 내 반주와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곡.
생상스,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연주 시간도 9분 정도로 그리 길지 않은 편이었고,
아이린의 실력이라면...약간의 연습만 하더라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곡이다.
굉장히 낭만적인 곡이라 할 수 있었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전주로 시작해 스페인의 정열과 이탈리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아놓은 곡이었으니까.
만약에 이 연주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관계의 진전을 한 번 더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상념을 지운다. 오랜만에 연주하는 피아노였기에, 천천히 손을 풀면서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 곡은 원래 바이올린이 돋보이는 연주곡이다.
애초에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해 만들어진 곡이었고, 그렇기에 피아노는 자연스레 묻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런 걸 가만 둘 수 있을까.
아이린에게 관심이 쏠리는 걸 그리 원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말대로 함께 무대에 서기야 하겠으나, 아무래도...나도 질투라는 것을 하나 보다.
연주가 격렬해진다. 초반 서정적인 전주? 집어치운다.
십여 년간 쌓아왔던 노련함은 얌전한 전주에 포르티시모를 더한다. 세게, 더욱 세게.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지나치게 세게 연주하지 말라는 말이 악보에 있었다.
어쩌면 피아노가 너무 돋보여 바이올린이 묻힐 수도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곡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위험,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많은 피아니스트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있을 수 있던 이유가 있었다.
가능하니까. 설령 곡이 변화하더라도, 나는 충분히 살릴 수 있었으니까.
곡의 분위기가 변화한다. 스페인 특유의 정열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는 론도가 반복된다.
이 부분은...구태여 변화를 줄 필요가 없을 듯 했다.
전주에서 바이올린의 존재감을 집어삼킨 여운이 지속될 테니까.
이어서 카프리치오소.
이 곡에서 클라이막스라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자유롭고, 들뜬 기분으로 환상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부분.
이 부분에서 나는 바이올린을 잡아먹을 생각이었다.
누구도 바이올린에게 시선을 둘 수 없을 만큼,
아이린이 그런 점을 마음에 들지 않아할 수도 있겠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곡이 점차 경쾌해지기 시작했다. 초반부의 우아함과 낭만적인 분위기는 결국 이 마지막 부분을 위해서였다.
잔잔하게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마지막에 곡에 집어 삼켜져 여운에 완전히 빠져들도록.
잘만 연주한다면 참으로 무서운 곡이라 할 수 있었다. 마치 늪처럼, 사람들을 끌어들여 분위기 속에 완전히 잠식시킨다.
...누군가를 축하하기 위한 곡이라기엔 꽤 현란한 곡이었다. 허나 꼭 축하만이 목적은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손거울 쓰기에 꽤 괜찮은 상황이 만들어 질지도 몰랐다.
바이올린을 연주한 뒤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기에 손거울은 적당한 도구이지 않은가.
로만가도 이번에 참석하는 것을 확인했고, 황태자의 탄신연인 만큼 어중간한 사람이 참석하지는 않을 터였다.
딩
그렇게 악보의 마지막 음을 두드리며, 나는 저 멀리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 듣고 계신 거 압니다.”
숨어있을 거면 조금 더 제대로 숨어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피아노 건반을 뚜껑으로 덮으며 말하자, 문이 빼꼼 열리며 아이린의 얼굴이 그 사이로 살짝 내밀어졌다.
“...다 알고 있었나요?”
“피아노를 치기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호위 기사로써 그런 태도는 좋지 않아요. 조금 더 예절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겠네요.”
침착한 태도로, 살짝 차갑게 눈을 뜬 아이린이 대꾸했다.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 말이었다.
그때도 내게 예절에 대해 공부하라며 책을 한 권 주지 않았던가. 책장 한 구석에 그 책은 아직도 꽂혀 있으리라.
그런 생각에 피식 웃자, 나를 바라본 아이린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번에 연주할 곡이 그건가요?”
“괜찮지 않습니까? 물론 바이올린은 조금 다르겠지만요.”
“...음.”
살짝 고민하던 그녀는, 이윽고 내 옆으로 다가와 피아노 위에 놓인 악보를 살폈다.
생각해보면 이런 악보를 어디서 구했느냐 물을 수도 있을 텐데.
그녀 나름대로 알아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나중에 누가 이 곡의 출처를 묻는다면, 이름 모를 음유시인이라 둘러댈 생각이었다.
내가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조금 양심에 찔리는 행동이니까.
“나쁘지 않네요.”
굉장히 좋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그녀는, 악보를 천천히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연습이 많이 필요하긴 할 것 같지만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애초에 아이린이 돋보이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와 나 사이의 차이가 벌어질수록 괜찮을 터였다.
그녀 생각이 어떤지는 몰라도, 양보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녀가 악보를 살피는 사이에,
기다란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한 구석에 두었던 바이올린을 가져와 아이린에게 건넸다.
“꽤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바이올린 켜시는 것 말입니다.”
“몇 달 만이긴 하죠.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능숙하게 바이올린을 잡은 아이린은, 이윽고 천천히 바이올린의 현을 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활이 움직이는 순간, 나는 귓가에 울리는 선율에 헛웃음을 흘렸다.
분명 방금 악보를 보여준 것 같은데, 어설프게나마 생상스의 곡을 연주하는 모습은...솔직히 반칙이지 않은가.
새하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검은 드레스와 어우러졌다.
그리고 들린, 윤택한 광을 내는 바이올린을 든 채 지그시 감긴 두 눈이 보였다.
바이올린은 우아한 악기였다. 괜히 '악기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었겠는가.
그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채롭고도 화려한 선율,
그런 악기를 잘 다루는 모습이란, 시야에 닿는 순간 시선을 빼앗길 만큼이나 강렬한 유혹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타고난 빼어난 연주 실력과 감각.
악보를 견식하자마자 연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얌전하고 절제된 서주라 한들, 몇 달이나 연주하지 않았던 사람이 악보를 보자마자 그 곡을 연주할 수 있다니.
만약 내가 에반 프리드가 아닌 피아니스트로써 그녀와 마주해도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허나 전부 쓸데없는 망상이었기에, 나는 조용히 그녀의 연주를 들으며 고칠 점을 찾기 시작했다.
고칠 점은 많았고, 이 밤 또한 길었다. 그러니, 내 눈을 힐끔 쳐다보는 아이린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도 이해가 갔다.
기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바이올린 연주가 끊기자, 헛기침을 내뱉은 아이린이 내게 묘한 시선을 보냈다.
마치 내가 이어 꺼낼 말을 두려워하듯, 나를 보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허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아무리 그녀가 돋보이는 것은 싫다한들,
적어도 그녀가 망신당하지 않을 수준은 만들어줘야 할 테니까.
“아가씨.”
“조금...실수가 있었어요. 그렇죠, 나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니까 천천히”
“로페나가 그것보다는 잘 할 겁니다.”
조금, 엄격해질 시간이었다.
#
연주란, 심적의 피로보다는 육체의 피로가 뒤따르는 작업이었다.
2~3번만 완곡하더라도 육체는 완벽히 지치기 마련,
체력이 꽤 좋은 편인 아이린이었으나 몇 번의 연주를 거친 뒤에는 완전히 녹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린이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것은 꽤 오랜만이지 않은가.
그런 그녀를 보며 옅게 미소지은 나는 이윽고 떠올린 생각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저런 모습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물론,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다.
예전처럼 격무에 시달리진 않지만, 그래도 소가주로써 여러 업무를 수행하는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미안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아이린은 내 말에도 대답대신 머리를 저어 보일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녀에게 너무 무리를 시킨 것일까.
축 늘어진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쉰 채 천천히 아이린의 뒤쪽으로 향했다.
바이올린은 어깨와 목에 무리가 많이 가는 편이었다. 어깨와 목 근육을 사용해서 악기를 지탱해야 하니까.
근육을 풀어주는 건 연주자에게 꽤나 중요한 부분이었고,
그렇기에 나는 전문 마사지사에게 항상 케어를 받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문 마사지사가 없지 않은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약간의 움직임이었지만, 그 한 동작 하나하나에 수많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이래도 괜찮은 걸까? 아이린이 무어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혹여 참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허공에서 잠시 손이 위태롭게 떨렸다.
책상에 늘어진 아이린의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려, 그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머리카락 아래로 조금씩 튀어나온 보드라운 잔털이 눈에 들어와, 이윽고 달뜬 숨을 내뱉었다.
그저 주물러 주려 할뿐이었다. 이상한 생각을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정말로 지친 것인지, 내가 뒤로 왔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금 즈음이면 무얼 하냐고 물을 법도 한데, 내가 실례하겠다는 말을 내뱉음에도 그녀는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잡념을 지운 채 그 새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읏.”
하필이면, 아이린은 목에 손이 닿자마자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순간 몸이 떨렸지만,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어 아이린을 안심시켰다.
“에반...?”
“괜찮습니다. 그저 목을 풀어드리려는 것뿐입니다.”
살짝 경직된 목덜미에 서서히 힘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말을 믿어주었다는 뜻이었고, 내가 이제는 아이린과 이 정도 접촉은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4년이 걸렸다. 4년, 조용히 숨을 들이쉰 채, 목덜미를 쥔 손에 조금씩 힘을 불어넣었다.
참 가느다란 목이었다. 내 두 손으로 덮자 완전히 목이 가려질 만큼이나.
부드럽고, 살짝 매만지자 곧바로 경추가 만져지는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간지러워요...”
힘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솔직히 쓸어내릴 필요는 없었는데...약간의 사심을 채웠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귀 뒤쪽을 살짝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그리고 아프지 않게 꾹 누르자.
“흐으읏.”
곧바로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음, 내가 여태껏 인내심을 길러온 결실을 여기서 찾은 것 같았다. 온 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시각? 차단했다. 여기서 눈을 뜬다면, 그나마 붙잡고 있는 일말의 인내심마저 놓칠 테니까.
손에 닿는 감각에 온전히 집중했다. 손가락의 끝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움찔거리는,
부드러운 살결 끝에 솟아오른 첨단을 가볍게 눌렀다.
붉게 물든 끝부분에 손가락이 닿자 순간 아이린의 어깨가 들썩였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새어나오는 소리를 힘겹게 막은 아이린이 파들거리며 헐떡거렸다.
물론, 내가 손가락으로 건드린 것은 경추였다.
“많이 뭉치신 것 같습니다.”
진즉에 이렇게 해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목덜미의 옆 부분을 지그시 누르자 아이린이 아픈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목은 이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손을 옮겨 아이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프지 않을 만큼, 적당히 근육을 풀 수 있을 만큼.
“에, 에반. 잠깐만요. 흐으, 아파요. 잠깐만”
아까와는 달리 어깨를 움켜쥔 아이린이 달뜬 숨을 내뱉었다.
귀끝이 잔뜩 붉어져, 이윽고 완전히 붉어진 얼굴을 쓸어내린 아이린이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만졌던 목덜미를 매만지며, 이윽고 붉게 물든 뺨에 흘러내린 땀을 닦은 채 입을 열었다.
“...좋아요?”
“네?”
“그렇게 막 내 몸을 마음대로 하니까, 좋냐고 물었어요.”
그 말에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하는데,
게슴츠레 떠진 눈이 꼭 내 가슴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아서.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살짝 내려간 드레스 탓에 어깨가 드러나 있는 걸 바라본 그녀는, 작게 웃음을 터트린 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변태.”
차갑게 내려앉은 그 시선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쓰게 웃는 것이 전부였다.
#
흐으읏...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별 생각 없이 아이린에게 향하던 로페나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들은 것일까. 순간 머릿속에 이어지던 생각이 툭 하고 끊어져서,
순식간에 새하얗게 물들어버린 사고에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아가씨...?”
분명 이 문 너머엔 아가씨가 계셨다. 그리고, 그런 아가씨의 호위 기사가 같이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와 호위 기사가 어떤 관계인지 떠올린 그 순간에, 로페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에, 에반 잠깐만요. 흐으, 아파요. 잠깐만
야릇한 숨소리가 뒤섞인 헐떡이는 목소리, 분명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의 목소리이지 않은가.
뺨이 붉게 물들였다. 단둘이 있는 상황에 저런 목소리가 들린다면,
그런 것은 하나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로페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결코 좋지 못한다는 것도.
자신의 아가씨가 늘 짓고 있는 무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아가씨가 무너져 내려 저런 소리를 내고 있다고 상상하니,
도무지 두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손만 잡는다고 고민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 저런 사이가 된 것일까.
스르륵, 벽에 기댄 로페나의 몸이 천천히 바닥을 향해 무너져 내렸다.
내일부턴 아가씨를 무슨 얼굴로 봐야 하는 것일까.
신음소리가 이윽고 멎었음에도, 로페나는 방문을 두드릴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저 그 문이 열릴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