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오랜 날, 오랜 밤 (5)
* * *
최근 들어 아이린과 나를 보는 로페나의 시선이 미묘해졌다.
눈을 마주치면 고개를 푹 숙이고, 자기 혼자 말을 더듬다가 갑작스레 일이 생겼다며 사라지기 일쑤였다.
도대체 갑자기 저러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번 생각했지만,
로페나의 태도가 변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이린 또한 그에 대해 짐작하는 바가 없었고.
“로페나가 최근 들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게요. 저렇게 수줍음이 많은 아이가 아니었는데 말이죠.”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러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탄신연이 우선이었다. 성공적인 연주,
그리고 로만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까지. 연주 자체는 꽤 훌륭하게 다듬어졌다.
이제 남은 건 로만이 흑마법사와 연관되어 있단 정체를 밝히고, 깔끔하게 토벌해내는 것이리라.
그 끝에 모두가 다치지 않고 남아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이린도, 나도. 그 끝에는 웃으며 서로를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방금까지 피아노 건반을 누르던 손가락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쓰게 웃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모두 잘 될 터였다.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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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신연의 날이 다가왔다. 복잡해진 머릿속에 한숨도 자지 못한 탓일까.
웅웅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힘겹게 숨을 토해냈다. 오늘 잘 되어야 할 텐데.
연주에 대한 걱정은 당연했다. 허나 그것보다 먼저인 건 역시 로만이었다.
아티팩트를 자연스럽게 꺼내 사용하되, 들키지 않을 것.
그리고 그걸 황태자에게 건네어 황실의 지원을 약속 받을 것.
황태자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와 아이린이 탄신연에서 축하 무대를 한다는 걸 단순히 자기를 축하하기 위해서라고 받아들이진 않을 거라 믿는다.
그렇게 멍청한 사람도 아니었고, 한량 같은 겉모습과 달리 나름 냉철한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오늘 할 일은 간단했다. 손거울을 들어 로만 공작을 포착한다.
아티팩트에 담긴 증거를 황태자에게 넘긴다.
이 두 가지를 떠올리며,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잘 하자.”
오늘 일이 끝난다고 전부 끝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굉장히 중요한 날이었다.
오랜 날 기다리지 않았던가. 로만을 끝내고, 아이린에게 엮인 그 빌어먹을 약혼을 파기시킨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미래이지 않은가.
아직 미래를 생각하기엔 이것저것 참 많이도 남아있었지만...모르겠다.
일단 오늘에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복도에 나서자, 마침 앞을 지나가던 로페나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로페나가 마치 석상처럼 그 자리에 굳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흔들리는 동공을 숨기지 못하는 녀석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에.”
“...뭘 그렇게 놀라.”
요즘 따라 나와 아이린을 바라보는 시선도 묘하고, 유독 예민하게 반응해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무슨 문제가 있길래 그러는 것일까. 조용히 입을 열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 로페나가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오, 오늘은 늦게 일어나셨네요?”
“잠이 오질 않아서. 어차피 아침에 가는 거니까 훈련할 시간도 없고.”
횡설수설거리는 로페나를 보며 여러 생각을 떠올렸다. 최근 들어 저렇게 눈에 띄게 당황하는 이유.
얼굴을 붉히면서, 유독 나와 아이린을 볼 때면 심박수가 가파르게 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의외로 결론에는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로페나의 태도가 변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분명 내가 아이린에게 변태 소리를 들은 그 날일 테니까.
“들었구나?”
피식 웃으며 말하자, 화들짝 놀란 로페나가 그 자그마한 어깨를 들썩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떨리는 동공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저 그거 들었어요 하고.
그때의 일이라면 충분히 오해할 법도 했다. 아이린이 묘한 소리를 내는 것도 그렇고,
이어서 내게 한 말들도 상황을 잘 모른다면 누가 들어도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이상하게 생각할 만 하지.”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저 그때 정말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그때 문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착각인가 했는데, 정말 그 앞에 로페나가 있었던 것 같았다.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은데. 어쨌든 아이린과 그토록 가까워진 건 로페나의 도움이 꽤 크긴 했다.
조금 망설이고 있을 때에 살짝 등을 밀어주기도 했고,
아이린이 그날따라 이상하게 행동한 건...아무래도 로페나의 부추김이 분명 있었을 테니.
“전부 네 덕분이야. 그렇게 된 건.”
“손도 겨우 잡으셨던 거 아니에요? 그런데 갑자기 그, 그렇게 하면...”
“언제까지 손만 잡고 있을 순 없으니까.”
솔직히 4년인데, 입 맞추는 것은 슬슬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었다.
계절제에서 용기를 내 딱 성공했고. 그 뒤에는 아이린도 꽤나 적극적이 되었고,
가벼운 스킨십 정도는 이제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하니 괜스레 쑥쓰러워져 붉어진 뺨을 긁적이자,
어쩐지 작게 입을 벌린 채 입을 멍하니 벌린 로페나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여, 여기는 공작저인데요?”
“...장소가 무슨 상관이야. 아무도 안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장소는 상관없는...으.”
얼굴이 완벽하게 새빨갛게 달아오른 로페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겨우 입을 뻐끔거린 녀석은 이윽고 들고 있던 빨랫감과 함께 멀찍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왜 저렇게 반응하는 걸까.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다가, 슬슬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음.”
씻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젖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며 오늘 입을 옷을 보자, 어쩐지 예전 생각이 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형태는 조금 틀렸지만, 그리고 나비넥타이 또한 없지만.
검은색을 띄고 있는 정장을 볼 때면 꼭 연주복이 연상되기 마련이었다.
오늘 아이린도 바이올린 연주하기에 편한 옷을 입지 않을까.
...여자 연주복은 살이 꽤나 많이 드러나는 편이었다.
민소매인 경우가 많아서,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혹여 겉에 무언가를 두르게 할 수는 없을까?
여름인지라 춥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내게 뺏어오는 것. 거울을 보며, 평소에 잘 짓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전엔 이렇게 하면 늘 시선이 내게 쏠리곤 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될 지는...뭐, 아마도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외모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지금이 조금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지.
아이린은 내가 이러는 것에 대해 꽤 맘에 들지 않아 하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녀에게 다른 시선이 향하는 것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즘 들어 나도 이상해지긴 했어.’
처음 호위 기사가 되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려보면,
단순하게 아이린을 불쌍하게 여기던 것이 전부였다.
꼭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그런 그녀가 조금 힘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가 그러든 말든, 내 욕심을 조금 충족시키려 하지 않는가.
살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런 것에 나름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얼마남지 않은 평온이 아닌가. 적어도 연주를 끝마칠 때까진,
아니. 탄신연이 열리는 황궁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이 여유로움을 만끽해도 좋을 성 싶었다.
옷을 입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셔츠의 단추를 조이고, 그 위로 검정색의 자켓을 걸쳤다.
물론 은색의 수실로 꽤 멋들어진 문양이 그려져 있었지만,
평소 입었던 것에 비하면 조금 수수한 편이리라.
그렇게 옷을 차려입고 나가자, 그 앞에서 서있는 아이린과 눈이 마주쳤다.
공교롭게도, 참 우연히도. 살짝 벌어진 문 앞에 서있는 이 아가씨는 과연 언제부터 이곳에 있던 것일까.
옷 갈아입는 과정을 전부 보진 않았겠지? 옅게 미소 짓자,
그런 나를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본 아이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준비가 조금 늦어서, 혹시나 하고 와봤어요.”
“그러십니까.”
더 이상 물어보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제대로 된 연인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설령 아이린이 우리 사이를 연인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그 관계를 조금이나마 부정하고 싶었다. 적어도 이번 일이 끝난 뒤에,
내 마음을 입 밖으로 제대로 표현한 뒤에. 그녀가 받아들인다면 그때가 되어서야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뒤엔 그녀를 실컷 골려주어도 별 탈 없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비로소 아이린이 입고 있는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보라색과 검정색이 마치 흩뿌려진 물감처럼 섞인 디자인, 땅으로부터 피어난 하나의 제비꽃처럼,
그렇게 위로 피어오르는 색들의 조합이 눈을 즐겁게 했다.
허나 내가 걱정한 부분은 그대로라, 거의 드러난 그녀의 어깨를 보곤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생각했던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으리라.
“탄신연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아직 준비가 남은 건가요?”
“아니요, 이제 다 끝났습니다.”
거울을 보며 셔츠 주름을 정리하자,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아이린이 잠시 내 손목을 붙잡았다.
아직 무언가 남았던가? 잠시 멈칫한 내게 다가온 그녀는,
이윽고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옷도 제대로 못 입으면 어떡하나요. 칠칠맞게.”
“...그러게 말입니다.”
가까워진 거리가 마음에 들었지만, 지금은 여기까지만 하는 것이 나을 터였다.
이 이상 분위기가 달궈졌다간, 탄신연에 늦을 수도 있을 테니까.
아이린 또한 그런 걸 알고 있는지, 내 옷깃을 툭툭 두드리곤 이내 내게서 떨어졌다.
이윽고 로페나를 불러 아이린의 악기를 챙긴 우리는, 황궁으로 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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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탄신연, 평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연회장에 긴장감이 도사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만이 탄신연이 열린 의미일까.
아니, 그 자리에 있는 귀족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자리가 단순한 축하 연회가 아니라는 것을.
5대 가문의 수장들이 빠짐없이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리스의 가롯, 로만의 빌테인, 하탄의 슈리카, 메디브의 칼리고, 그리고 킬로그의 아인 까지.
저마다 휘황찬란한 가문을 자랑하는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탓에,
늘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야 할 연회장은 오늘따라 조금은 숙연한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로만.’
가롯 유리스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늘 그렇듯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로만가의 수장, 빌테인 로만이었다.
수염 하나 없는 깔끔한 외관, 날카로운 시선은 꼭 매를 연상시켜서,
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움찔거리는 귀족들이 간혹 있곤 했다.
귀족 가문의 수장 중 가장 강력한 기사단을 보유 중이며, 동시에 제국의 공격력을 책임지는 가문.
그런 로만이 적으로 돌아선다면, 도대체 제국은 어떤 손실을 감안해야 하는 것일까.
허나 로만이 흑마법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거의 확정된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눈이 가늘어진다. 그 얇은 시선 사이에서, 가롯의 눈동자는 오로지 빌테인을 향해 있었다.
이전에 겪었던 저주, 시기가 꽤나 공교롭지 않던가. 만약 그때 자신이 죽었더라면,
공작령을 수습하는 데에 꽤나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흑마법사 사태에 가장 많은 전력을 소모한 것이 유리스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죽었더라면? 저주로 인해 죽어 사기가 깎이는 것뿐만 아니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전력을 다듬고 안정을 찾는 것에만 꽤 시간이 걸렸으리라.
5대 가문 중 제국을 ‘수호’하는 것은 분명 유리스다.
제국의 방패. 북부를 지키는 관문이자, 제국의 황도를 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진입로.
하지만, 그건 겉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
막상 제국의 안위에 보탬이 되는 것은 은밀히 움직이고 있는 하탄과 킬로그가 아니던가.
정말 절멸이란 세력이 제국을 무너트리려 했다면, 유리스가 아닌 다른 가문을 공략해야 했다.
‘로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거겠지.’
절멸은 자신의 생각보다도 제국을 훨씬 크게 좀먹고 있었다.
로만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고? 설령 그들을 토벌한다고 한들, 절멸과 관련된 문제가 끝날 거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커진다. 어쩌면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도 더욱,
몇 십 년 전 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절멸 사태보다도 더욱...커질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 유리스의 가주가 되면서 했던 맹세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황제를 수호하고, 에반젤리움을 지키겠다는 맹세는 아직도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 자신의 혈육이 마음에 걸린다고 하면. 다른 귀족들이 자신을 비웃지 않을까.
나이가 먹을수록 강철 같은 의지엔 서서히 녹이 슬기 시작한다.
절대 꺾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몸속에 붉은 피 대신에 철혈이 흐른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라면 생각치도 못했을 텐데.
지금 가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참 우습게도 자신을 가장 싫어하는 제 딸이었다.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때는, 나중에 그녀가 자신을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았다.
물론 조금 과하게 행동했을 때 아차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자신처럼 굳게 마음을 먹으리라고 생각했다.
허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도대체 자신이 원망했던 아버지와 자신이 무엇이 다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손을 떠났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한 번 떠나간 마음을,
이제는 원망이 되어버린 그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이라 하면. 적어도 자신의 딸이,
그 딸이 마음에 둔 기사가 무탈하도록 돕는 것이 아닐까.
황제의 얼굴을 떠올린 가롯 유리스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제국을 향해 충성을 바친 것이 어언 40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그 충성을 한 번쯤은 보답 받을 때가 언젠가 했는데, 이제 곧 그 시간이 오는 듯 싶었다.
그 순간, 쏟아지는 박수 소리에 가롯의 상념이 깨져 나갔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꽤나 조용하던 연회장에 박수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오로지 하나를 의미하리라.
황태자는 이미 이곳에 있었으니, 오늘 탄신연을 축하하겠다며 악기를 들고 떠났던 자신의 딸.
그리고 그런 딸의 마음을 훔쳐간 기사.
자신의 딸이 나타난 순간에도 가롯은 무감한 표정을 유지했다.
자신은 그녀의 앞에서 웃을 자격이 없었다. 언제까지나,
자신의 딸이 저를 용서할 때까지는 그녀를 향해 미소지을 수 없었다.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허나 아이린과 함께 등장한 에반이 다른 영애들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탁자를 두른 천을 거칠게 쥘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킨 가롯이 눈을 치켜뜬 채 분을 삼켰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걸 빤히 알고도 저리 행동하다니.
이전에 자신을 장인어른이라며 부르라고 허락했던 것을 당장이라도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허나 아이린이 에반과 눈을 마주친 그 순간.
여태껏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부드러운 미소를 보는 걸 본 가롯은 결국 한숨을 터트렸다.
자신은 저 사이에 참견할 수 없지 않은가. 여기에 앉아 저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서로를 바라보며 눈으로 마음을 나누고, 그렇게 연주를 통해 대화하는 모습을.
물을 들이켰지만, 어쩐지 물이 술처럼 쓰게만 느껴졌다.
거칠게 쥐었던 식탁보를 놓으며, 가롯은 다시금 자신의 딸이 서있는 단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둘이 바라는 무언가가 잘 이루어지기를.
지금은 그저 기도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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