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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91화 (91/181)

〈 91화 〉 Crescendo (6)

* * *

“에반 경, 무사했군!”

공작저에서 내려오자, 주변에는 부서지고 깨진 가고일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흩날려 있었다.

어제의 격전을 그대로 보여주듯 완전히 초토화 된 공작령.

수많은 시체들과 피로 번진 땅을 잠시 바라보다, 이윽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황태자를 향해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공작저의 상층부에서 연이어 폭발이 일어나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괜찮아 보이는 것 같군. 그나저나, 안고 있는 건 역시...?”

“걷기 힘들다 하셔서, 부득이하게 이렇게 안고 있습니다.”

“부득이하게...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겠지. 둘 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네.”

“감사합니다.”

툭툭.

흔히 공주님 안기라 부르는 자세로 안겨있는 아이린이 내 가슴팍을 두드렸다.

황태자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등을 돌린 채 나를 쏘아보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옅게 웃으며 아이린을 고쳐들었다.

“에, 반!”

차마 큰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아이린을 잠시 바라보았다.

붉어진 얼굴이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것이 꽤 괜찮지 않은가.

적을 앞에 두고 갑작스레 입을 맞추는 것보다야 이런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아이린이 지금 걷기 힘들어하는 것은 분명했으니, 공작저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는 이러고 있을 생각이었다.

“빨리 놔줘요. 지금이라면 용서해줄 테니까.”

“용서 안 해주시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미워요.”

툭, 힘없이 가슴팍을 내려친 팔이 아래로 떨어진다.

밉다는 그 한 마디에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내 표정을 바라본 아이린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 안 미우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정말입니까.”

“내가 왜 에반을 미워해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정말로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아무렇지 않게 활짝 웃자 아이린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장난이었는데,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아가씨의 얼굴을 보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슴팍을 때리는 힘이 조금 더 세지긴 했지만 뭐 어떠랴.

지금 이렇게 편안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할 자신이 있었다.

“음, 그래. 이제는 숨길 생각도 안 하는군 그래.”

“네?”

“아니야, 그냥 한 번 해본 말이었네.”

황태자가 우리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끔은 입꼬리를 흐뭇한 듯 씰룩이기도 하는 것이 영 기분이 나빠 살짝 눈살을 찌푸리자,

헛기침을 내뱉은 그가 내게 다가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텔레포트 주문이 담겨있는 스크롤일세. 사용하면 곧바로 유리스로 갈 수 있겠지. 성공할 거라 생각해서 미리 아제스트 경에게 받아두었는데, 이렇게 줄 수 있어 다행이군.”

“미리 준비하신 겁니까?”

“믿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처음엔 셋이서 진입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중에 자네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결국 마지막에 빌테인을 처리한 것도 자네가 아닌가.”

“...과찬이십니다.”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 황태자는 이윽고 푹 한숨을 내쉰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붉은색의 눈동자에는 척 보아도 많은 상념이 깃들어 있어서, 나는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한동안 바쁘시겠습니다.”

“바쁘겠지. 테오라드 경이 곧바로 돌아간 이유도 할 일이 워낙 많기에 미리 처리하기 위해서네. 빌어먹을, 로만이 이렇게 될 줄 내가 알았겠나?”

“......”

허나 황태자의 사정은 사정인 거고,

공작저로 돌아가면 유리스 나름대로 이번 일에 대해서 할 일이 많았다.

일단 남은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다,

혹여 흑마법사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저주와 관련된 표식을 남기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황실이 이래저래 바쁠 것이란 걸 알아도...당분간은 공작저에 틀어박힌 채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한참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푸념을 쏟아내던 황태자는,

여전히 아이린을 안고 있는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가 봐도 좋네. 되도록이면 푹 쉬었으면 좋겠군.”

“배려 감사합니다.”

“배려라니, 당연한 거지. 아무튼 조만간 한 번 볼 일이 있을 걸세.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그때 얘기하도록 하고...”

“잠시만, 전하...!”

부욱,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찢어진 스크롤을 찢은 황태자가 환히 웃어 보였다.

조만간 만난다니, 그 말에 다급히 입을 열어 보았지만.

내가 입을 열었을 때는 이미 눈앞의 풍경이 변한 뒤였다.

익숙한 건물, 잘려진 나무 그루터기가 수두룩한 공간.

거기에 아직 채 지지 않은 꽃들이 만개하여, 주변을 알록달록한 색으로 채우는 녹음에 작게 입을 벌린다.

정원, 항상 보았기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리 보니 이토록 새롭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공작저 내부의 복도를 보여주는 창문 너머에 한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멍하니 우리를 바라보는, 로페나라는 이름을 지닌 시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가씨?”

순간 먼저 인사를 건넬까 하다가,

다급히 뒤돌아 이쪽을 향하는 로페나를 보곤 조용히 아이린을 땅에 내려주었다.

늘 그렇듯, 재회의 순간은 감격적인 법이지 않은가.

아이린에게 안기는 로페나를 보자 괜스레 코끝이 찡해지는 듯 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비비며, 같이 납치당하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쓸데없는 말까지 늘어놓는 로페나의 모습을 보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사람은 변하지만, 이 건물과 자연은 변하지 않는다.

계절이 흘러 피어나는 식물이 달라지더라도, 결국 때가 되면 같은 꽃이 피어나는 법이지 않은가.

늘 보는 정원, 늘 보던 얼굴, 그래서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무감각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돌아왔다는 감상을 느끼자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한 것도 같았다. 정원 한 구석에 저 홀로 높게 솟아오른 나무.

바람에 날린 나뭇잎이 천천히 코끝에 닿자, 나는 조용히 웃으며 눈을 감았다.

있을 때는 몰랐는데. 새삼스럽게도, 이 공작저가 참 그리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공작저에 있는 인원 중 혹여 실종되거나 다친 이가 있을까 찾았지만,

빌테인의 말대로 다치거나 사라진 사람은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아이린을 납치한 것일 뿐이었던 걸까.

아이린이 납치당한 것을 깨달은 순간 공작저에 있는 사람들이 꽤 죽었으리라 생각했건만,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이 현실에 이런저런 상념이 떠올랐다.

허나...지금은 구태여 머릿속을 복잡하게 할 이유는 없겠지.

내게도, 아이린에게도 휴식이 필요했고. 차마 상처가 다 낫지 않은 나는 한동안 내 방에서 푹 쉬기로 결정했다.

호위 기사 업무도 당분간은 크리스 경이 대신한다고 들었으니,

무슨 핑계로 아이린에게 가야 할지 고민해야 할 성 싶었다.

“...그나저나.”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마음이 편할 줄 알았는데, 막상 큰 산을 한 번 넘고 나니 공허함이 몸을 감싸는 것만 같았다.

침대에 누워있음에도 몸이 근질거리는 느낌이라, 조용히 몸을 일으켜 방안을 어슬렁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가슴 한 켠이 쑤시는 기분이었다. 아마 빌테인에게 한 번 찔려서 그런 것이리라.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니었기에, 조심스럽게 붕대가 감긴 가슴팍을 매만지며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마스터라는 경지에 다다라 신체적인 능력이 월등하게 상승했다고 들었다.

육체가 지닌 한계를 뛰어넘음은 물론,

근육과 뼈의 밀도 또한 상승하여 이제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타격조차 입지 않을 거라고.

허나 이번엔 꽤 많은 상처를 입은 데다 마나 또한 많이 사용한 탓에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다는 소리를 들은 뒤였다.

...그래도 잠깐 나갔다 오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아이린이나 로페나의 눈을 피한다면, 아마도 크리스 경은 나를 이해해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 뒤에 걸려 있던 셔츠를 조심스럽게 걸쳐 입고, 살짝 문을 열어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보이지 않는 복도, 그렇게 살금살금 발을 빼내며 아주 약간의 마나를 일으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마나로 소리를 덮고, 그렇게 마침내 문이 완전히 닫혔을 때.

주머니 속에 들린 금화를 확인하곤 창문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으로 나가면 분명 누가 내가 나가는 걸 볼 테니,

이렇게 나가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창문에 살짝 발을 올려, 아래를 확인한 뒤 몸을 내리려는 그 찰나에.

툭.

내 목을 찌르는 손가락에 순간 어깨가 들썩였다.

손톱이 닿은 것인지, 따끔한 목을 가리며 뒤를 돌아보자 무감한 표정을 지은 여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서리가 어린 듯 순간 새하얀 이채가 스쳐지나간 눈동자가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빤히 쳐다볼 뿐인데도,

어쩐지 어깨를 잡고 누르는 듯한 중압감에 창문에 올렸던 발을 조심스럽게 내리며 그 시선과 마주했다.

“...아가­”

“에반.”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평소에 들려주던 온화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무 말 없이 그저 쏘아보는 그 시선에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일 따름이었다.

잘못한 것은 없는데, 왠지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 잠시 외출을 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지난번에 찾아온 의사가 무어라 말했죠?”

“절대 안정을 취하라...했습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요. 다 좋은데, 제발 방에서 조금 쉬었으면 한다고요. 아직도 붕대에서 이렇게 피가 새어나오는데. 이걸 보는 내 마음이 어떨 것 같나요?”

작게 입술을 깨물며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나는 조용히 아이린의 어깨를 감쌌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에 섞인 것은 불안이라,

그녀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린이 고개를 푹 숙이고, 나는 그제야 그녀가 들고 있는 쟁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끓인 죽과 함께 담긴 거뭇한 물. 아마 나를 위해 아이린이 주문했다던 보약이 아니던가.

이렇게 걱정해주는데...그저 답답하다는 이유만으로 속을 썩일 이유는 없으리라.

고개를 푹 숙인 아이린의 턱을 손등으로 살살 쓸어내리면서, 이윽고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아이린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가씨의 말씀대로 방에 있겠습니다. 그러니, 그런 표정은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낫고, 아가씨에게 허락을 받고 나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약속하는 거죠?”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인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아이린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죽 먹는 것까지만 보고 갈게요. 할 얘기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아이린과 함께 방에 들어서자, 괜스레 이 방이 굉장히 좁게만 느껴졌다.

사실 쾌적한 방인데도, 누운 뒤에 꽤 많은 공간이 남는 방인데도 아이린이 이토록 가까이 있는 것만 같아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허여멀건 죽, 건더기 하나 없이 오로지 쌀로만 끓여진 죽처럼 보였지만.

이걸 가져온 아이린을 생각하며 천천히 수저를 떴다.

간 하나 되어있지 않은 탓에 맛은 그리 없었지만, 그래도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때요?”

“괜찮습니다. 잘 끓였군요.”

“...사실, 제가 직접 끓여 봤어요.”

살짝 볼을 붉힌 아이린이 그리 말함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이린이 직접 만들었다니, 가슴이...살짝 뭉클해지는 듯했다.

사실 누가 음식을 내게 만들어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던가.

아플 때면 병원에 입원하거나 혼자 앓았으니, 아이린이 직접 만든 죽을 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는 아이린이 나를 힐끔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괜찮다고 말한 것이 기쁜 듯, 잘게 떨리는 입꼬리를 보며 다시 수저를 들어 올렸다.

이것보다 맛이 없다한들 얼마든지 먹어줄 수 있었다.

설령 풀을 끓여 만들어도, 모래가 섞여 있어도 행복하게 먹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한 그릇을 모두 비우자, 나를 본 아이린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무릎에 손을 모았다.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무엇인지 금방 알 것도 같아 먼저 입을 열었다.

“맛있었습니다. 약은 조금 썼지만 말입니다.”

“그...랬나요.”

“요리에 소질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원래 요리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죽을 끓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리에 대해 조예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것이 꽤 힘든 것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평생 손에 물 묻힐 일 없던 아이린이 직접 죽을 끓인 것을,

로페나의 도움을 받았더라도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일이겠는가.

침대 한 쪽에 누워있던 아이린에게 살짝 다가가, 무릎 위에 손을 모은 아이린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래서, 제게 하실 말씀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예전 같았으면 손을 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끄러워 했겠지만,

이제 이런 접촉에는 꽤 익숙해진지 나를 힐끔 바라 본 아이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태자가 서신을 보냈어요. 아마도 곧 그대를 부를 것 같다고요. 이번 로만 토벌전의 증인이자, 새로이 마스터에 오른 기사로써 황제 폐하를 뵙게 될 지도 몰라요.”

“황제 폐하 말입니까.”

황제라. 생각해보면 황태자와의 접점은 많았어도 황제를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다.

원작에서도 그리 비중 있게 다뤄지진 않았고,

그저 스칼렛이 황태자와 만날 때 가끔 나타나 견제하는 역할이 전부가 아니던가.

에반젤리움의 주인, 제국을 통치하는 절대자. 허나 소설에서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은 이름 뿐인 황제.

나름 제국을 잘 통치하고 있고, 흑마법사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고는 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조금도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스칼렛을 견제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악녀였던 아이린이 첫 번째 악역이라면, 아이린 이후에 등장한 악역은 황제였다.

이렇다할 연고 없이 등장한 스칼렛과 황태자의 사이가 벌어지도록 이간질하고,

나중에는 스칼렛을 암살하려는 시도까지 한 것이 황제.

그래서 황태자와 황제간의 사이가 꽤나 나쁘다고 묘사되었지만,

막상 직접 만난 황태자는 황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적자, 다음 황위 계승이 확정적인 지금 상황에 자신의 아버지와 사이가 나쁠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의문이 들긴 했지만, 일단 지금으로썬 황제와 직접 만나봐야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있을 터였다.

생각을 정리하며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에반의 몸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곳으로 보내기 힘들겠죠.”

“금방 낫지 않겠습니까? 몸에 남은 것은 그리 깊은 상처들이 아니니까요.”

"잠이라도 푹 자면 낫겠지만, 요새 잠을 못 잔다고 들었어요.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무슨 고민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심란할 뿐이지 않은가.

"그냥 잠이 잘 오질 않습니다. 아마도 빌테인과 싸워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싸우면서 감정이 격해진 탓에, 그 달아오른 감정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 아닐까.

내 말을 들은 아이린은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앉아있던 몸을 천천히 침대를 향해 뉘이기 시작했다.

"...아가씨?"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는 것만 같았다.

아이린이 왜 여기에 눕는 것인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

이 상황 자체에 대해 이해하는 것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비로소 아이린이 내 침대에 누웠다는 것을 완전히 인지했을 때 내 몸은 튕겨나듯 침대에서 세워졌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요. 그냥 누운 것이 전부인데."

"누운 것이 전부가 아니니...그런 것이 아닙니까."

혼란스러운 정신을 애써 잡으려 하는 와중에,

이어지는 아이린의 행동에 나는 그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붉어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린 채,

남은 손으로 침대보를 툭툭 두드리는 아이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안 누울 거예요? 재워줄 수 있는데..."

침대 위로 흘러내린 새하얀 머리카락, 그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를 보면서.

나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닌지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하기 시작했다.

꿈이 아니라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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