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그대에게 (3)
* * *
로페나는 책상에 앉아 있는 자신의 아가씨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자신을 미묘한 표정으로 힐끔 쳐다보더니, 책상에 앉아서는 다시 평소의 무감한 얼굴을 되찾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완전 평소대로 되돌아 왔다기엔,
이따금 홀로 얼굴을 붉히는 것이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 따름이었다.
‘...역시.’
로페나는 오늘 새벽을 떠올리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방문을 두드려도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조용히 나왔는데,
자신이 어제 죽을 끓이는 것을 알려드리며 방에 들르라 하지 않았던가.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쉽다고, 분위기에 취해 거사를 치른 것이 분명했다.
‘어쩐지 기사님 향이 많이 나긴 했는데.’
아이린이 항상 사용하는 목욕수는 대부분 장미향을 담는 편이었다.
그래서 늘 고혹적인 장미향이 아이린에게서 느껴졌건만, 지금은 그 향이 옅어져 다른 향과 섞이지 않았던가.
그 향이 에반의 향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은 로페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제 어떠셨어요?”
“...괜찮았지.”
아이린은 조용히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린은 로페나가 무엇을 얘기하는지도 모른 채 대답했을 뿐이었다.
머릿속을 꽉 채운 생각이라 하면 어제와 오늘 아침의 기억뿐이었으니,
자신이 했던 잠꼬대에 또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에반의 앞에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애썼는데,
잠이 덜 깨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그녀에게 큰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다.
헤헤...에반...
에반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애써 웃어주긴 했지만, 에반도 꽤 많이 당황한 눈치였다.
꽈지직! 아이린의 손에 있던 애꿎은 서신 하나가 과격하게 찌그러졌다.
황태자가 보낸 것이었지만, 그런 것이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침에 했던 말이 떠오를 때마다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쭈뼛 서는 듯한 기분이었다.
에반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은 에반을 꽤나 차갑게 대한 편이었다.
그에게 모욕을 주려 애쓰고, 그가 포기할 때까지 냉대하지 않았던가.
허나 시간이 흘러 에반 프리드라는 기사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었음에도 그를 대하는 태도는 쉬이 바꿀 수 없었다.
이제 와 부드럽게 대하는 게 어색하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부드럽게 대하는 것 자체가 꽤나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그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건만.
아이린은 손에 쥐인 서신을 바라보며 애써 부끄러움을 억눌렀다.
잔뜩 구겨진 서신이었으나, 한 번 더 쥐었다간 형태조차 알아보지 못하리라.
차분히 서신을 내려놓은 아이린은 이내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가씨?”
아이린은 한 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로페나를 바라보았다.
로페나의 조언으로 시작된 일이긴 했으나, 지금은 로페나의 조언이 과연 조언이었는지에 의구심이 일 따름이었다.
그런 쪽에 탁월하다하기엔, 이렇다 할 진전 없이 끝나버리지 않았던가.
차라리 다음엔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생각을 정리한 아이린은 이윽고 로페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에반이, 네 말은 안 듣는 편이 좋다고 하더구나.”
“네?”
“네가 해준 조언은 고마웠지만, 다음부터는 내 생각대로 해볼 생각이야.”
로페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가 기사님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갑자기 아가씨의 태도가 변하다니. 로페나의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베갯머리의 송사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그 성별이 뒤바뀐 상황이 아니던가.
“아가씨, 기사님 말을 더 믿어주시는 거예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은 로페나가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아이린의 표정을 보자마자 낭패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아이린을 모셨던 로페나였으나, 아이린은...이미 에반을 더 믿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를 묻고 있니.”
아이린의 단호한 대답에 로페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허나 아이린은 그런 로페나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이윽고 아까 구겼던 서신을 펼쳐 그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다시 보낸 서신.지난번에 황제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아마 이번엔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일단락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리라.
황제를 직접 만난 것은 유리스에서 공작 한 사람뿐이었기에, 아이린 또한 황제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지 못했다.
그저 황태자의 아비이자 제국의 주인이란 것만 알 뿐.
일선에 나서는 것은 언제나 황태자였으며, 기껏해야 건국절을 축하하는 행사가 되어야 등장하는 이였으니 어찌 전부 알겠는가.
그런 황제가 에반을 직접 만나려 한다는 지난 서신에 의문을 품은 아이린이었으나,
일단 서신을 먼저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은 채 꾸깃거리는 종이를 천천히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무슨.”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 그대의 기사를 직접 만나려는 것 같군. 나도 이번에 이토록 적극적으로 나서시는 것이 의아하긴 하나, 부득이하게 따라주었으면 하네. 절멸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크네.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정보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결국 에반젤리움의 주인일 테니까. 이해해주었으면 하네. 기한은 나중에 따로 통보할 테니, 가급적이면 에반 경 홀로 보내줄 수 있겠나? 유리스에 광영이 일기를 바라지.]
전쟁 영웅조차 황태자와 만나게 하는 황제가, 에반을 직접 만나려 한다니.
생각에 잠긴 아이린이 천천히 서신을 살폈다. 로만 토벌이 시행될 때만큼 불안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이나 황태자가 모르는 무언가 있는 것이 있음이 분명하리라.
순간, 푸른 눈동자에서 강렬한 이채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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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를 사러 나왔으나, 도무지 어떤 것을 사야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이런 것에 관심을 크게 둔 적도 없고, 기껏해야 다이아몬드가 끼워진 반지를 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으니까.
한적한 오후의 거리를 걷는 에반의 표정에 일순간 먹구름이 드리웠다.
‘감이 안 잡히네.’
이런 걸 어떤 상황에 주어야 할지, 무어라 말하며 주어야 할지.
게다가 이런 선물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긴 법이니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 아니던가.
불어오는 바람에 서늘함이 섞여, 이제는 세상을 뒤덮었던 녹음이 서서히 물러감을 알리고 있었다.
겨울이 오면...지금과는 비할 바가 안 될 만큼 바빠질 터.
적어도 가을이 오기 전에 이런저런 것을 마무리하고 싶은 것이 에반의 생각이었다.
고백 또한 그 중 하나였고.
딸랑 귀금속점의 문을 열고 에반이 들어서자,
그 안에 있던 주인 제라드는 조용히 눈을 치켜떴다.
사실, 에반이 들어선 귀금속점은 그다지 손님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었다.
시가지의 중앙, 사람들이 많이 지나치는 곳에 있음에도 인기가 적은 가장 큰 이유는 귀금속점의 주인이었으니.
스스로 손님을 가려 받는 주인을 좋아할 손님이 어디 있겠는가.
“...무슨 용건으로 오셨소?”
험상궂은 제라드의 인상에 에반은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눈과 입을 길게 가로지은 흉터는 그가 귀금속점 주인인지,
아니면 용병단장인지 의심을 품게 만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진열된 악세서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에반은 뺨을 긁적이다가, 이윽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반지 한 쌍을 맞추려 합니다.”
“한 쌍이라, 결혼 반지를 말하는 겐가?”
이런 것까지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
허나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차마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에반은 힘겹게 입을 떼며 답했다.
“고백할 때 사용할 겁니다. 약혼...반지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결혼을 하게 된다면 아마 다시 맞추게 될 테니까.
아직 결혼까지는 장담할 수 없는 터라, 에반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제라드는 그런 에반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단순히 부를 낭비하고자 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그 순수한 의도 자체는 꽤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손가락 크기는?”
제라드가 표본을 내밀자, 반지를 여러 차례 매만지던 에반이 반지 두 짝을 골라 내밀었다.
아이린의 손가락 크기야, 최근 들어 매일 같이 만지던 것이 손이었고.
그렇기에 손가락 크기를 구분하는 것에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반지 두 짝을 어루만지며 형태를 짐작하는 제라드를 보던 에반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무엇을 구매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다들 다이아몬드가 박힌 것을 산다고는 하는데, 그런 것에 전부 의미가 있어 그러는 것이 아닙니까?”
“의미라.”
제라드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을 묻는 손님이 그리 많지는 않았는데,
흥미가 동한 제라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다이아몬드는 흔히들 영원을 의미한다고 말하지. 어떤 충격에도 흠집하나 생기지 않고, 평생토록 제 형태를 유지하니 그런 뜻이 붙지 않겠나. 불멸, 그렇기에 자신들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고 다이아몬드를 반지에 박아놓곤 하지.”
잠시 숨을 고른 제라드는, 이어 여러 보석들을 늘어놓은 채 말을 이어갔다.
“허나 다이아몬드라 한들 부서지지 않는 것이 아닐세. 세상 그 어떤 보석도 언젠가는 그 빛을 잃고 부서지기 마련이지. 그거 알고 있나? 다이아몬드는 불에 꽤 쉽게 타 사라지네. 제 아무리 영원이며, 불멸하다 칭송하는 보석도 결국 약점이 있는 법이지. 흠이 안날 뿐, 세게 두드리면 부서지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야.”
“그럼 다이아몬드도 별 의미가 없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런 말이 아닐세. 세상 모든 일이 그렇게 낭만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소리지.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지. 설령 그것이 사랑일지라도, 몇 년이 안가 불꽃처럼 사그라지곤 하네. 사람들은 고작 보석 따위에 그런 기대를 걸며 모든 것을 맡기려 해. 결국 사랑이 꺼지면 고작 금화 몇십 푼 정도 밖에 안 되는 잡동사니 취급을 받을 뿐인데 말이야.”
에반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썩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지 않은가.
반지를 맞추러 왔는데 사랑이 영원하지 않을 거란 소리를 듣다니.
허나 그런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아서, 작게 한숨을 내뱉은 채 제라드의 말이 끝날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허나 제라드는 제 손님이 그런 기색을 띄었음을 놓치지 않았고, 이어 킬킬거리며 웃곤 입을 열었다.
“기분이 나빠졌나 보군 그래. 하기야, 반지를 맞추러 온 사람에게 할 소리는 아니긴 하지.”
“...알면서 그렇게 얘기하신 겁니까.”
“보아하니 귀한 집 자제 같은데, 그냥 한 번 골려주고 싶었네. 이런 소리 듣는다고 기분 나쁘다며 나갈 사람 같지도 않고 말이야. 크크.”
제라드는 구태여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이아몬드를 금으로 만든 반지에 박아넣는다면 돈이야 많이 벌겠지만, 그런 것이 과연 내포한 의미처럼 오래가겠는가.
자신이 세공한 보석을, 장신구를 조금이나마 제대로 된 의미를 담아 오래토록 사용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반지를 약지에 끼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의 심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지. 심장이란 곧 마음을 의미하니, 그 마음이 조금이나마 잘 느껴질 바라지 않았겠는가.”
“그렇습니까.”
“굳이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보석은 많네. 영원이란 뜻을 담은 보석만 하더라도 몇 개는 더 있고, 사랑을 의미하는 보석은 훨씬 많지. 평생토록 낄 반지일 텐데, 조금은 서로에게 의미 깊은 반지를 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한 제라드는 이윽고 세공된 에메랄드 하나를 꺼내들어 에반 앞에 내놓았다.
제라드는 사람의 눈동자와 닮은 보석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에반의 눈을 보자마자 에메랄드가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찬연한 초록빛은 숲을 그대로 담아낸 듯 했다. 속을 들여다보면 보이는 얇은 실선들이 꼭 정원처럼 어우러져,
새로이 찾아오는 계절의 신록을 보이는 보석에 에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에메랄드군요.”
“눈동자는 으레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창이라고 하지.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그 눈만 보더라도 꽤 많은 것을 알 수 있네. 자네가 꽤나 열렬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나, 여기까지 오는 것에 많은 고민을 품었다는 것도 말이야.”
툭, 제라드의 손가락에 튕긴 에메랄드가 굴러 에반의 앞에 향하자,
에반은 조심스레 보석을 주워들어 그것을 살펴보았다.
제 거울을 보는 것처럼 밝은 녹색을 띄는 보석이, 꼭 자신을 뜻하는 것 같지 않은가.
“자네가 반지를 선물해줄 사람의 눈동자 색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서로의 눈동자 색으로 맞추면 썩 괜찮지 않겠는가? 나름 행복을 의미하는 보석이니, 의미를 맞추는 것도 괜찮을 테고.”
“...나쁘진 않군요.”
에반은 조용히 보석을 들여다보았다. 꼭 자신의 눈동자의 색과도 같은 짙은 녹색,
이런 것이 박힌 반지가 제 손가락에 있다면. 문득 새어나온 웃음에 에반은 약지를 툭툭 두드렸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아니, 오히려 남들과는 다른 것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좋은 생각이지 않을까.
자신의 반지에 사파이어를, 그리고 아이린의 반지에 에메랄드나 페리도트를 박아 넣는다면...
만약 떨어져 있더라도 반지를 보며 서로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에반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만약 다른 귀금속점에 갔으면 영문도 모른 채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맞췄겠지만,
어쩌면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뜻밖의 행운이 아닐까.
“그래서, 생각은 결정한 건가?”
“다이아몬드 말고 다른 보석을 사용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부정하질 못하겠군요. 제가 생각해도, 그게 조금 더 의미 있으니까요.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평생토록 간직할 반지가 아닙니까.”
결혼을 염두에 둔 에반의 말에 제라드는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까지는 자신 없는 듯 얘기하더니, 이제 와선 평생을 입에 담을 줄이야.
허나 마음에 들었다. 이런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따지는 것도 그렇고,
제 나름대로 모든 것에 진심이라는 소리가 아니던가.
“금은 쉽게 구부려지고 휘어지지, 허나 그렇기에 잘 부러지지 않아. 무릇 사람과 사람의 관계 또한 그래야 하기에 반지의 주물을 금으로 만드는 것일세.”
살짝 눈썹을 까딱인 제라드는, 이어 에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도 그렇게 오래토록 둘이서 잘 살았으면 하는군. 귀족의 자제가 하는 약혼이라면 소문이 날지도 모르니, 멀리서 나마 응원하겠네.”
“...감사합니다.”
사실 조용히 둘이서만 할 계획이었지만, 에반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큰 쪽에 에메랄드, 작은 쪽에 사파이어를 박아 달라 부탁한 에반은 이어 앞으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어떻게 전달해주어야 할지, 무어라 말하며 주어야 할지.
...참,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어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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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에반이 나간 뒤, 신문을 살피던 제라드가 침음을 삼키며 문밖을 살폈다.
자신에게 반지를 맞추러 온 사람이 이토록 거물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로만 공작을 직접 토벌한 그 기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그나저나 그 얼굴이면 이런저런 여자가 많을 것 같은데 말이야."
누가 보아도 훤칠한 얼굴을 지닌 기사가 보여준 얼굴은 영락없이 풋사랑을 겪는 청년의 얼굴이라,
그 모습을 떠올린 제라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문을 덮었다.
뭐, 남의 연애사야 자신이 신경쓸 일이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꽤 오랜만에 받는 사람이라 그런지, 이런저런 신경이 쓰이긴 했다.
"조금 신경을 써줄 필요는 있을 것 같군."
응원한다고 제 입으로 내뱉은데다가, 신문에 나온 본인이라면 개인적은 은혜를 입지 않았던가.
물론 그는 모르겠지만, 슬쩍 미소지은 제라드는 이윽고 세공하던 보석을 향해 마법진을 새기기 시작했다.
언젠가 한 번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그것이 그 기사든, 아니면 그 기사의 약혼자든.
그거면 충분한 보답이 아닐까? 여느 때처럼 한적한 귀금속점엔, 다시금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