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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02화 (102/181)

〈 102화 〉 Love is an open door (4)

* * *

쪼르르­

와인잔 위로 따라지는 붉은 빛깔의 액체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동시에 에반은 아이린을 힐끔 쳐다봤다.

갑자기 변해버린 상황에 적응하기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난데없이 둘이서 술을 마시는 상황이라니, 애초에 술에 약한 아이린과 이렇게 있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 자리를 파하고 돌아가기엔. 에반은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자리를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그녀의 호위 기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였고,

에반은 결국 가슴 속에서 소리치는 본능의 목소리를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살짝 달아오른 뺨, 취기가 올라온 듯 보였지만, 아직 아이린은 멀쩡해보였다.

...한 잔, 아니. 적어도 그녀가 취할 때까지 곁에 있는 것은 괜찮으리라.

“안 마셔요? 짠, 해야죠.”

짠, 이라니.

그래도 조금은 취기가 있는지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말투를 쓰는 아이린을 보며 에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난번처럼 취하는 것만 아니라면 나름 좋지 않을까.

어쨌든 취기는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터놓는 것에 도움을 주니, 이런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그리 옳지 못한 태도가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에반은, 이윽고 어색하게 웃으며 잔을 들어 부딪혔다.

“후후.”

짠­ 하는 소리와 가볍게 부딪힌 잔을 보던 아이린이 기분 좋게 웃자,

에반은 어쩐지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처럼 취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약간의 취기만 올라온 건지.

허나 와인을 들이켰을 때, 입안에 느껴지는 달짝지근한 맛에 에반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도수가 거의 없네.’

일부러 이런 술은 고른 것일까. 지난번에 마신 과일주는 사실 도수가 강한 편이었으니,

어쩌면 취하지 않기 위해 이런 술을 골랐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저 취기만 올라온 것으로 보면 되는 것일까?

잠시 고민하던 에반은, 이윽고 아이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마나 드셨습니까?”

“글쎄요, 한 두 잔 정도?”

두 잔 정도로 취기가 올라올 정도면, 에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을 마저 들이켰다.

이렇게 있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리라.

아이린이 만족할 만큼 대화하다가 방에 돌아갈 거란 판단이 섰기에,

에반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앞치마를 꺼내 둘렀다.

“에반?”

“와인만 마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간단한 안줏거리 하나 정도 만들어보겠습니다.”

마침 식당이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재료도 충분했다.

게다가 이전에 아이린이 자신에게 죽을 끓여주지 않았던가.

그에 대해 한 번 정도 보답해주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됐다는 생각에 에반은 곧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콩쿠르로 전세계를 순회했던 터라, 이래저래 혼자 요리할 기회가 꽤나 많지 않던가.

요리사만큼은 아니더라도 간단한 것 정도는 할 수 있었고, 안주 정도야 이전에도 수없이 만들던 것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잠시 냉동고를 살피던 에반은 한 켠에 예쁘게 포장 되어 있는 양송이를 꺼내들었다.

이 시간에 거창한 요리를 할 수는 없으니, 역시 간단한 것 한 두 개면 충분하지 않을까.

살라미를 찾았지만, 아쉽게도 살라미는 없는 터라 종이로 포장된 고깃덩어리를 꺼낼 따름이었다.

아이린은 요리를 준비하는 에반의 모습을 보곤 조용히 탄성을 흘렸다.

몸에 딱 달라붙는 셔츠자락 위에 메어진 앞치마.

부각되어 보이는 쇄골에 아이린은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차마 알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탄탄한 몸이건만, 취기가 올라온 탓인지 몽롱한 시야 속에서 에반은 저 혼자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허나 그런 것을 티낼 수는 없어서, 조용히 에반 뒤를 따른 아이린이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요리도 할 줄 알아요?”

“이것저것 할 줄 압니다. 요리사만큼은 못하지만요.”

아이린은 새삼스레 에반을 다시 보게 되었다.

외모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저런 면에서 다양하게 활약하고 있지 않은가.

피아노 연주는 제국에서 유명한 연주가들보다도 실력이 좋다며 칭송이 자자했고,

제국에 단 둘 있는 마스터이며, 심지어 이제 요리까지 잘한다니...

그에 비해 자신은 무얼 잘한단 말인가. 괜스레 시무룩한 아이린이었지만,

이윽고 다시 마음을 다잡은 채 에반을 바라보았다.

이런 사람을 놓친다면, 아마도 평생 후회하리라.

에반이 자신에게 마음을 주고 있을 때 확 잡아둘 방법...이라면.

‘역시 하나밖에 없어.’

책에서 보았던 내용을 떠올린 아이린은 잠시 심호흡을 내쉬며 에반의 뒤로 슬쩍 달라붙었다.

셔츠자락 위에서 느껴지는 근육의 갈라짐에 헛숨을 삼켰다가,

이윽고 조용히 에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옆으로 빼꼼 내밀었다.

“무슨 요리에요?”

“타바스(에스파냐의 전채요리, 술과 곁들여 먹음)입니다. 아무래도 간단한 요리 말고는 할 것이 없으니, 이런 거라도 만들어야죠.”

능숙한 손길로 양송이의 줄기를 부분을 벗겨낸 에반이 중얼거렸다.

사실 이런저런 것들을 더 할 줄 알긴 하지만,

그래도 레드와인과 곁들일 것이라면 역시 육류 아니겠는가.

탁탁탁, 파슬리를 다진 뒤 썰어놓은 마늘과 함께 한 곳에 담은 에반이 팬 위에 올려놓은 양송이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물이 고이기 시작하며 노릇하게 구워지는 양송이에 소금을 살짝 뿌린 뒤,

도마 위에 방금 꺼내두었던 부채살을 올려 올리브유를 그 위에 덮는다.

장갑이 없으니 붓으로 올리브유를 바른 고기 위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양송이를 치운 팬 위에 올려 그대로 구워낸다.

이건 얇게 썰어서 치즈와 곁들여 먹을 용도. 생각해보니 치즈가 있나 했지만,

다행히도 냉동고 안에 있는 브리치즈를 발견한 에반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와인에 치즈가 빠져서야 쓰겠는가. 사실 이 치즈를 브리치즈라 할 수는 없겠지만,

특이하게도 현대와 별 다를 바 없는 특색을 지니고 있기에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겉에 있는 흰색의 곰팡이가 틈 하나 없이 치즈를 덮은 것이, 아무래도 꽤나 질 좋은 치즈인듯 싶었다.

치즈를 둥그렇게 썰어 한 곳에 둔 뒤, 점차 갈색 빛을 띄고 있는 고기를 확인하며 천천히 조리하기 시작했다.

1분에 한 번씩 뒤집고, 다시 30초에 한 번 씩 뒤집는다. 마음 같아선 속의 온도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럴만한 기계가 없다는 걸 깨달은 에반은 이내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허나 이런 것을 꽤나 많이 한 만큼 감 또한 꽤 정확하리라.

녹인 버터가 부어진 부채살은 서서히 마이야르 반응을 일으키며 구워지고 있었다.

팬에서 고기를 꺼내어 나이프를 넣자,

순간 입꼬리가 당겨질 만큼이나 부드럽고 촉촉한 속면에 미소가 절로 자아졌다.

겉은 노릇하게, 속은 고기 특유의 육즙이 전혀 사라지지 않은 채 선홍빛을 띄어 척 보아도 조리가 잘 되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위에 통후추와 월계수 잎을 올린 에반이 치즈까지 덮자,

그 과정을 본 아이린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고기에 열기에 닿아 살짝 녹은 치즈의 고소한 향이 코를 찌른다.

치즈 특유의 향과 후추, 그리고 월계수잎이 고기에 약간이나마 남은 누린내를 잡아 남은 것은 고소함과 감칠맛 뿐.

먹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는 맛이 아마도 이런 요리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까.

아이린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본 에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고작 이정도로 놀라기엔 아직 보여주지 못한 것들이 많지 않던가.

처음 식탁에서 마주했을 때보다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 풀리는 듯 해서,

에반은 제 허리를 끌어안은 아이린의 손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벌써 손대시면 안 되는데요. 와인과 같이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까지 잘하면 어떡해요.”

“어차피 당신에게만 할 요리인데,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순간 그 말에 흠칫한 아이린은, 이윽고 조용히 웃으며 에반의 허리를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늘 서로 바라보면서 안았는데, 가끔은 이렇게 뒤에서 끌어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올라온 취기 탓일까, 와인의 포도향과 에반의 체향이 뒤섞여 아이린의 뺨이 조금 더 붉게 물들였다.

술과, 밤, 그리고 하늘에 떠오른 별과 달, 거기에 마음이 이어져 묘한 감정을 일깨운다.

그런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아이린은 에반 몰래 달뜬 숨을 내뱉었다.

아직, 아직 때가 아니었다. 조금 더 참을 수 있었다.

그런 아이린을 등진 에반은 다시금 양송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져놓은 마늘과 파슬리. 거기에 고깃덩어리 중 일부를 다진 것을 섞어 볶자 금세 향이 식당에 가득퍼졌다.

파프리카도 있으면 좋겠지만...아무래도 그런 것까진 없어서.

양송이 속을 채운 뒤 나무꼬치를 꽂아 넣자 금세 타바스가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완성된 요리를 잠시 보던 에반은, 아이린의 손을 떼어내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앉아계시죠.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그럴까요?”

“한 번 쯤 해보고 싶었던 거라. 낭만 있지 않습니까.”

아이린이 자리에 앉아 잔에 와인을 채우자,

두 손에 덮인 쟁반을 든 에반이 피식 웃으며 식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꼭 셰프가 된 것만 기분이 들지 않은가. 양송이 타바스가 들어있는 쟁반을 내려놓으며,

에반은 조금 엄숙한 목소리를 흉내내며 입을 열었다.

“주문하신 참피뇨네스 레예노스 데 하몬 이베리코 나왔습니다.”

“후후, 에반은 그런 어린애 같은 장난을 좋아하네요.”

“어린...애 같았습니까? 흠,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장난이에요. 멋있었어요.”

푸흐, 작게 웃음을 터트린 아이린으 두 손으로 입을 가리자 따라 웃은 에반 또한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있으니 조금 분위기가 사는 것 같지 않은가. 살짝 달콤하면서도 쓴 와인의 맛이 입 안을 가득 적셨다.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닌, 주변을 감싸는 이 분위기에 취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턱을 괸 채 와인잔을 드는 아이린의 모습을 본 에반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누른 채 부채살을 하나 포크로 집어 들었다.

소설 속에서나 묘사되었던 모습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소설 속에서 그녀가 즐겨 마시던 와인 또한 이렇게 도수가 낮았을까.

어쩌면 술이 아닌 포도즙이라해도 무방할 만큼의 와인.

이런 것을 마시고도 취기를 느끼는 것을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에반은 그런 생각에 빠지며 조심스럽게 입에 고기를 한 점 집어넣었다.

‘맛있네.’

자신이 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칭찬 할만 했다. 썰면서 느꼈던 촉감은 과연 거짓이 아닌 듯 했다.

고기의 질감은 그대로 살리면서 그럼에도 부드럽게 녹아드는 육질.

파인애플이나 배 같은 과일을 담아 숙성시킨 고기가 아님에도 이렇다는 것에 괜스레 뿌듯함 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거기에 치즈의 고소하면서도 독특한 특유의 향,

간으로 베어진 소금과 후추가 적절히 뒤섞여 고기의 감칠맛을 한 단계 높은 수준까지 끌어올려주고 있었다.

동시에 씹히는 부드러운 브리치즈는 이 맛의 방점이라 할 수 있으리라.

브리치즈처럼 소젖과 과일을 이용하여 숙성시키는 건지는 몰라도,

향긋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워 고기를 먹은 뒤 느껴지는 텁텁함을 완전히 잊게 만들고 있었다.

거기에 타바스 또한 더해지니, 양송이에 고여진 물과 뒤섞여 버섯의 향과 파슬리,

마늘, 다진 고기가 적절하게 어우러져 와인의 쓴 맛을 완벽하게 지워주고 있었다.

화이트와인에 비해 텁텁한 맛이 조금 강한 것이 레드와인이다.

안주와 섞여 그 텁텁함을 날린 붉은 색의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포도의 잔향이 남아 조금 진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오는, 젖혀진 커튼 너머로 보이는 별밤이 펼쳐진 하늘.

에반은 조용히 그 하늘을 감상하다가, 이윽고 아이린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술이라니, 놀랐습니다. 저번에 취한 뒤로 드시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게다가 이 새벽에 말입니다.”

“...생각할 게 있었으니까요.”

아이린은 와인을 흔들어 입술을 축이며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에반이 이렇게 찾아올 거라고 생각치도 못한 터였다.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자신이 몰랐던 에반의 모습을 볼 때마다 조금씩 조급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에반, 사실 지금도 에반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지 않던가.

지금처럼 요리를 잘 하는 것은 조금도 알지 못했고,

자신의 호위 기사가 되기 전에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이번에 그 스칼렛 테라제인이라는 여인의 이름이 나온 것도,

무슨 경위로 나오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지 않던가.

하아, 한숨을 내뱉은 아이린은 목을 타고 서서히 올라오는 취기에 뺨을 쓸어내렸다.

조금 더 취하면...정신을 놓아버릴지도 몰랐다. 차라리 놓아버릴까.

지난번에 키스했을 때처럼, 차라리 정신을 놓은 채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길까.

허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지난번처럼 정신을 놓은 채가 아닌,

제정신으로 모든 것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 책에서 보았던 것처럼, 모든 것을.

“...에반.”

탁자를 내려다보던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살짝 붉게 달아오른 귀를 본 에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아이린을 향해 다가갔다.

아무래도 이제는 취한 것이 아닐까. 축 늘어진 아이린의 어깨를 부축하며,

아이린을 일으킨 에반이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아이린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몽롱하지만 아직 정신이 남아있었다.

에반에게 몸을 맡긴 채 복도를 걸으면서도, 아이린은 그저 옆에 에반이 있는 것만을 느끼고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참 우습게도, 처음 마음을 자각한 순간보다도. 지금 이 순간 심장이 터질듯이 뛰고 있었다.

...자신은, 아마도 에반이 생각하는 것만큼 깨끗한 여인은 아니리라.

속으로 조소하는 아이린을 에반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취한 나머지 기운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며,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 이윽고 아이린의 방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아이린을 침대에 뉘이기 위해 에반이 조심스럽게 아이린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찰나에, 아이린의 눈동자에 이채가 일었다.

완전히 방심한 기사를 넘어트리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그녀 또한 나름 익스퍼트의 기사였기에, 에반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려 침대에 눕힌 아이린이 그대로 에반의 손목을 붙잡았다.

순식간에 자신의 위에 앉은 아이린을 에반은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어째서? 라는 의문 보다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에 서린 욕망을 읽었다.

“...아이린.”

“나는 에반을 몰라요. 에반이 이런 걸 좋아하는지도 모르고...이런 건, 그냥 책에서 읽은 게 전부니까요.”

에반의 손목을 양 손으로 붙잡은 채 일어나지 못하게 한 아이린이 에반의 몸 위에 포개어졌다.

포도향이 감돌았다. 거기에 섞인 장미향, 그리고 요즘 들어 종종 뿌리고 다녔던 에반의 향수까지.

어둠 사이를 뚫고 새어나오는 달빛이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빛 사이에서 아이린의 하얀 살결이 창백하게 보였다.

허나 그 입술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이는 터라,

에반은 침음을 삼킨 채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살짝 내려간 가운에 아이린의 어깨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아이린은 에반의 시선을 따라 그 어깨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윽고 피식 웃으며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어깨를 가릴 생각도 없는 것인지,

이제는 미동조차 안하는 에반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훑던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에반도 나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고 할 수 없겠죠. 그렇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에반은 도무지 이 상황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묘한 분위기도 그렇고,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아이린의 모습을 무어라 해야 할 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을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조금은 갑작스러워서, 그리고 조금은. 이 상황에 희열마저 느끼고 있어서.

에반은 아이린의 시선을 슬쩍 피한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이린은 흔들리는 에반의 눈동자를 보며 속으로 웃어 보였다. 이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린은 멈추지 않았다.

뜨겁게 타오르는 속을 억누르지 않고, 그대로 에반을 향해 얼굴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나는 에반이 생각하는 것만큼 착한 사람이 아닐 지도 몰라요. 에반은 늘 나를 배려했죠. 선을 지키고...항상 내가 싫어할 것 같으면 억지로 멈추는 거 전부 알고 있었어요.

파고드는 숨결이 코를, 이윽고 귓가를 간질였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그 침묵 속에서, 아이린은 조용히 한 마디를 속삭였다.

무방비한 에반의 귀를 깨물자, 에반은 그 간질거림에 몸을 흠칫 떨었다.

흐르는 타액이 귓속에 흘러 온 몸을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달뜬 숨결, 닿기만 하더라도 몸이 떨리는 그 열기 속에서.

에반의 귓속으로 아이린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선, 넘어볼래요?”

창백한 달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는, 마치 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니, 아마 불보다도 더욱 뜨거우리라. 목을 죄이는 그 뜨거운 침묵,

점점 몸을 덮어가는 서로의 숨결.

에반은 조용히 아이린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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