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순조롭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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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오후였다.
늘 보던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제 막 겨울에 접어들어 조금 쌀쌀해진 날씨에 차 한 잔을 홀짝이는 그런 날.
에반은 오랜만에 크리스와 단 둘이 마주했다. 은퇴하고 제복을 입지 않은 그의 모습은 꽤 어색했지만,
늘 진지했던 표정과는 달리 한껏 웃고 있는 모습에 에반은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좋아 보이십니다.”
“좋지. 신경 쓸 게 없으니까.”
크리스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식어가는 차를 입에 기울였다.
다즐링이라, 갑작스레 떠오른 한 사람의 얼굴에 입꼬리를 당긴 크리스가 에반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어두운 얼굴은 완전히 사라져, 비로소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이 아니던가.
도대체 그날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어떤 계기로 완전히 변해버린 에반의 모습을 떠올리던 크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은퇴했으니까 물어보는 건데, 갑자기 그렇게 달라진 이유가 뭐냐?”
“갑자기 달라지다니요?”
“분명 내가 기억하기로 호위 기사를 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안색이 창백했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안색이 확 펴지 않았느냐. 그 전에만 하더라도, 리제한테도 틱틱거리고 그랬던 녀석이 생글생글 웃고 다니니까 나는 네가 죽으려는 줄 알았다.”
“그건 틱틱 거린 게 아니라 그냥 그 때 기분이 별로 좋지...아?”
머릿속을 스쳐가는 기억에 에반은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라면 떠올리지 못했던 기억, 빙의하기도 전의 기억이 갑작스레 떠오른 탓에 크리스가 말했던 그 때를 조금이나마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것을 자신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마치 원래 있던 것처럼 되살아난 기억에 에반이 멍하니 입을 벌리자, 크리스는 그런 에반을 보며 실소를 지었다.
“갑자기 왜 그리 멍청한 표정을 짓고 그러냐. 기억이 안 나면 안 난다고 하면 되지.”
“예...기억이 안 나는군요.”
에반은 어색하게 웃었다.
갑작스럽게 되살아난 기억의 편린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하긴 했으나, 지금 고민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왜 빙의하기 전의 기억이 이렇게 떠오른 건지,
그것을 알 수가 없어 의문이 피어오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에반이 침묵하자, 혀를 차며 찻잔을 비운 크리스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목을 젖혔다.
뚜둑 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살짝 놀라면서도, 이제는 이런 걸로 크게 상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미묘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이것을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후련하다고 해야 할지.
늘 몸 관리에 힘썼던 기사 시절이라면 어떻게든 몸 상태를 정상으로 돌리려 애썼겠지만,
지금은 그냥 몸이 늙어가고 있음을 받아들일 따름이었다.
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
빨간 색으로 물든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스쳐가자 눈살을 찌푸린 크리스가 작게 푸념했다.
괜스레 무슨 일이 있을 것만 같지 않은가. 나쁜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았으나,
큰일이 하나 벌어질 것 같은 직감에 이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잠시, 노을이 서서히 저물어 하늘이 거뭇하게 변할 무렵.
“기사님! 기사님!”
저 멀리서 다급하게 소리치는 로페나의 목소리를 들은 에반이 고개를 들었다.
기사님이라 부를 사람이라 해봐야 자신뿐이었으니,
그 목소리에 로페나의 얼굴을 확인한 에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평소와는 달리, 굉장히 진지한 표정이 아니던가. 로페나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인 터라,
에반이 로페나에게 묻자 로페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에반의 손목을 잡았다.
“크리스 님은 조금 이따가 오시고요. 기사님부터 빨리요! 아가씨 일이란 말이에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설명부터 해줘.”
“아니요, 여기서 설명 못 해요. 빨리 와요.”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로페나의 손길에 이끌려 사람이 없는 으슥한 복도로 향한 에반은,
우물쭈물 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로페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일이라면서, 왜 여기에”
“아가씨 임신 하신 것 같아요.”
“...뭐?”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에반은 헛웃음을 흘렸다.
임신이라니, 그 말인 즉슨 자신이 아버지가 된다는 소리가 아니던가.
고작해야 하룻밤일 뿐이었다.
술기운을 빌려 약간의 용기를 내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하룻밤일 뿐이지 않은가.
그 한 번으로 임신이라니. 허나 에반의 웃음에도 로페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반의 손을 꼭 잡으며, 더욱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 곁에 있어주세요. 농담 아니니까요.”
순간 모든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버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멍하니 벽을 짚은 채 얼굴을 쓸어내리던 에반은,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아이린이 있을 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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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
에반이 다급하게 문을 열었을 때 보인 것은, 에반을 바라보며 옅게 웃는 아이린의 모습이었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조금도 심란하지 않아 보이는.
늘 똑같은 표정을 지은 아이린은 에반을 향해 조용히 웃어 보였다.
“왔어요?”
“내가 아니, 제가...로페나에게 들었습니다. 정말인 겁니까?”
“글쎄요. 아마 의사가 와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 아마 맞을 것 같아요.”
아이린의 손은 아직 채 부풀지 않은 배 위에 올라가 있었다.
임신이라, 그런 것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었건만.
갑작스레 찾아온 잉태에 얼떨떨한 것은 아이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뱃속에 생명이 깃들었다니, 그런 것을 곧장 실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오히려 더욱 당황한 것은 에반이었으니,
그런 에반의 모습에 피식 웃은 아이린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 옆 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이리 와서 앉아요. 할 얘기가 많으니까.”
“괜찮으신 겁니까. 제가...조금 더 조심했어야 하는데.”
“왜 나한테 사과해요. 쉬려는 에반을 못 자게 한 건 나잖아요.”
그 말에 흠칫 굳은 에반은, 아이린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그 곁에 앉았다.
도무지 무어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갑작스런 인연이 찾아온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가 않아서.
에반은 아이린의 배 위에 손을 올린 채 조용히 숨을 죽였다.
“아직 부풀지는 않았어요. 아마 그 때 임신한 거면...고작해야 한 달 정도니까요.”
“......”
힘없이 떨어진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던 에반이 떠올린 것은 과거였다.
정확히는, 자신이 그동안 살면서 겪어온 아버지라는 존재였다.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누가 보더라도 좋은 아버지라 하진 않을 만큼이나.
자신의 아버지는 몹쓸 사람이었다.
피아노에 재주가 있단 것을 알고 난 뒤로는 동생조차 쉬이 만나지 못하게 했으니,
오직 피아노만을 머리에 심으며 음악이란 세상 속에 자신을 가둔 것이 바로 아버지였다.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그렇게 되지 않고자 결심했다.
자신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노라, 하여 받지 못한 사랑을 동생에게나마 쏟아 붓지 않았던가.
허나 시간이 흐르고, 살아가던 세상이 변했다.
아이린이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제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게 생겼다.
아버지라. 에반은 두려웠다. 자신 또한 자신의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될까 봐.
준비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찾아온 이 이름 모를 축복이 두려웠다.
아이린에게 너무 큰 짐을 준 것이 아닐까. 왜 이런 것을 조금이나마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스스로가 한심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이 에반의 눈에 닿았다.
천천히, 차가운 숨결과 함께 내려가는 손이 창백한 색을 띄었다.
“아이린.”
말을 이어가려고 해도, 차마 이어갈 수가 없었다.
턱밑까지 차오르던 말이 가슴팍에 걸려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뻐끔거리며 벌려진 입이 움직여 무어라 할 말이 있다는 것만 겨우 전할 뿐.
여러 감정이 가슴 속에서 요동쳐, 이윽고 흔들리는 눈동자에 조금씩 물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기뻤다.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어찌 이 일에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전에 겪었던 아버지라는 존재로부터 이어져 오는 본능적 두려움이 있었지만.
에반은 이 일에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아이린이라는 한 사람의 여인에 대해서, 그녀가 행복하도록 자신이 만들 수 있을까.
여러 의문 속에서 에반은 결국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은 이전보다 훨씬 무거웠고,
아이린을 임신시켰다는 생각은 에반의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있다면.
에반은 가슴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감정을 인정했다.
행복하다는 감정을, 지금 이 순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고.
아이린이 슬퍼했다면 모를까, 아이린 또한 에반의 손을 잡은 채 조용히 웃고 있었다.
에반이 고개를 들자, 쭉 에반을 바라보고 있었던 아이린과 에반의 시선이 마주했다.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처음 서로의 눈을 마주한 순간.
이 방에서, 에반은 무릎을 꿇었고 아이린은 그런 에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자신이 이 초록색의 눈동자를 쭉 쫓아다닌 순간은.
아이린은 피식 웃으며 에반의 뺨을 쓸어내렸다.
아까부터 흐르던 눈물이 에반의 뺨을 적셔 목에 닿아, 꽤 우스운 얼굴을 한 에반이 그 손을 마주잡았다.
“슬퍼요?”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울어요. 좋은 날이잖아요.”
아이린의 손을 잡은 에반은 눈물을 마저 닦으며 조용히 웃었다.
왜 우냐고 묻는다면, 감정이 복잡해서 우는 것이 아닐까.
정확히 말하면 그저 행복해서 우는 것일 뿐이었다.
이 현실이, 이렇게 결실이 맺어졌음이 가슴을 간질여서.
당겨진 입꼬리와는 달리 자꾸만 눈이 축축해졌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감정이었다.
좋은 날이었다. 이 이상 좋다는 것을 어찌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이나.
아이린의 품의 안긴 에반은 아이린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두근 규칙적으로 뛰는 소리가 에반의 귓가에 들려오자,
에반은 가늘게 뜬 눈으로 아이린의 손에 껴있는 반지를 보았다.
이렇게 빨리 바꿔줘야 하게 될 줄은 차마 몰랐는데. 반지를 만들어준 장인은 무슨 생각을 할까.
결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아이린의 품속에서 에반은 다시 웃었다.
지금 당장 말할 생각은 없었다. 절멸이라는 눈앞의 위협이 사라진다면...
모든 것이 평화롭게 제 자리에 돌아간다면, 그때 말하고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뱃속에 있을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임신한 게 아니면 우습겠네요. 둘이서 설레발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임신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이린을 본 순간 들은 확신, 감정,
아직도 속에서 차오르는 이 뜨거운 감각은 분명히 아이린이 임신했음에 비롯하는 것이었으니까.
감에 불과했지만, 에반은 확신을 받았다. 두 사람의 아이가, 이제는 ‘우리’의 아이가 이 뱃속에 있음을.
아이린의 품속에서 벗어난 에반은 그대로 아이린을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이면서,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이 순간 필요한 것은 어떠한 말 한 마디가 아니라 단지 서로의 존재였기에,
이 자그마한 공간에 두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기에.
아이린도 에반도, 잡념을 지운 채 서로를 느끼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떨리는 것은 아이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최근 들어 몸 상태가 여러모로 변했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제 뱃속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느낀 것이 미안하긴 했으나,
그것이 착각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은 여전했으나,
에반과 아이린이라는 두 사람 사이에 긴 인연의 끈이 비로소 두터워졌다는 것 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아주 두꺼운 붉은 실.
그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뿐일까. 끌어안은 것을 멈춘 두 사람의 이마가 살짝 맞닿았다.
숨소리를 들으며, 가슴팍에 놓인 손은 서로의 맥동을 느끼고 있었다.
숨결이 닿는다. 따스하고, 때로는 서늘한.
불규칙적으로 이어지는 호흡에 코가 부딪혔을 때, 두 사람은 약속하기라도 한 듯 미소 지었다.
“평생...호위 기사로 남아주겠다는 얘기가 이런 걸지는 몰랐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에반의 눈을 본 아이린은 괜스레 지난 겨울의 기억이 떠올랐다.
생일 선물로 대뜸 웃어주었으면 한다는 그의 말에 미소 짓는 것을 연습했던 기억이.
흑마법사와 싸워 다친 그를 타박했던 기억이. 첫눈이 내리던 그 겨울에,
자신의 곁에서 쭉 호위 기사로 남겠다는 기억이.
에반 또한 같은 기억을 떠올려, 두 사람의 눈은 같은 풍경을 담고 있었다.
천천히 맞닿은 입술이 가볍게 스쳐지나간다. 툭, 처음 닿은 입술이 떨어졌다.
서로의 턱을 부드럽게 잡은 채, 다시금 이마를 맞대어 머리카락이 쓸렸다.
까끌까끌한 감촉, 질끈 감은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툭, 두 번째 닿은 입술은 방금보다도 조금 더 진하게.
오랜 시간 맞닿은 입술이 하얀 실타래가 늘어짐과 함께 떨어지자,
배시시 웃은 아이린이 에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어깨를 떨었다.
훅 불어온 바람이 새하얀 눈발을 담았다. 서늘한 바람, 첫눈이 내리는 겨울.
처음, 또 다시 처음. 4년 전의 첫눈이 내리던 날보다 조금 이른 첫눈이었지만.
같은 추억을 떠올린 두 사람은 그 때의 설렘을 떠올렸다.
아직 마음을 자각하지 못하던 시절이었기에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을,
이제는 연인이기에. 그리고 다시금 그 위로 향하는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조금 더 끈적한 감정을 되새기며.
툭
세 번째 닿은 입술을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부드럽게 얽힌 혀가 서로를 이었다. 맞잡은 손이 깍지를 끼고,
그 손톱이 힘을 준 탓에 새하얗게 물들 만큼.
손에 손톱자국이 남을 만큼이나 긴 시간 동안 맞닿은 입술이 떨어졌을 때,
에반과 아이린은 힘겹게 숨을 내뱉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생일 선물을 고민하고 있었어요.”
아이린의 말에 에반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잊지 못할 선물이군요.”
“평생?”
“...평생.”
이 시간은 분명 지날 터였다. 첫눈이 오는 이 순간이 언젠가는 끝나는 것처럼,
언젠가는 기억 한 구석에 남아 다른 기억과 섞이는 날이 오지 않을까.
허나 나중에 기억하기를, 자신의 스무 번째 생일을 결코 잊을 수는 없을 거라고.
아까보다 조금은 후련한 표정을 지은 에반이 옅게 웃었다.
“그런데, 이제 에반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호칭 말입니까?”
“그이...라고 부르기엔, 이제 단순히 연인이라고 할 순 없잖아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에반과 시선을 마주한 아이린은,
이윽고 골똘히 생각하는 척 턱에 손가락을 짚곤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살짝 붉어진 뺨을 두 손으로 받치며, 에반의 시선을 슬쩍 피한 채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여보?”
에반이 멍하니 입을 벌리자, 아이린은 하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조금 부끄러운 듯, 붉어진 뺨은 이전보다 조금 더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여보...라고 불러야 할까요?”
쿵쿵
에반의 심장이, 그 어느때보다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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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내리던 날, 유리스의 소가주가 임신했다는 소식은 공작을 제외한 모든 이의 귀로 들어가게 되었다.
의사는 아이린의 임신을 확정지었으며,
쌍둥이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내 에반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시녀들은 아이린을 부러워했고,
에반과 친분이 있던 기사들은 모두 그를 질타했으니.
결국 모두가 그 두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새 생명의 축복을, 결국 이루어진 두 사람의 인연을.
사람들은 진심으로 축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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