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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21화 (121/181)

〈 121화 〉 개전 (4)

* * *

촤아악­! 얼마나 베었을까. 이제는 완전히 무감해진 표정을 지은 카이셀이 생각했다.

얼굴에 묻은 피가 굳고, 또 다시 굳은 피 위로 피가 튀었다.

말을 타고 있던 기사들의 말은 이미 고깃덩어리가 된 지 오래였다.

압도적인 격차, 허나 그 격차를 좁힐 수 있는 의지.

싸움의 전반적인 기세는 아직도 제국군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살점이 튄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큼이나 잔인한 광경이 가득한 이 전장을 눈에 담는 기사들의 사기가, 과연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현재 피해는.”

“대충 천 명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확한 수는 다 끝나야 파악하겠지만...그래도 꽤 선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 퇴로 하나 뚫고 있지 못하고 있긴 한데, 선전은 선전이지.”

카이셀의 비관적인 말에도 케인은 무어라 하지 못했다.

아직도 저 앞에 깔린 것은 그 남은 수를 파악조차 할 수 없이 남은 무수한 수의 적들.

얼굴에 묻은 피를 닦던 카이셀은 완전히 굳어 차마 떨어지지 않는 피를 보곤 피식 웃었다.

“뚫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게 전부라면 말이죠.”

“...에반 프리드의 증원은.”

그 말에 잠시 몰려오는 적들을 바라보던 케인은,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오고 있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런 말 하지 말게. 순간 안 온다는 줄 알고 식겁했으니까. 그래서, 얼마나 걸린다고 하던가?”

“아마 30분에서 1시간. 전력으로 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증원군 1천과 함께요.”

1천, 1천이라. 애매한 숫자였다.

지금 잃은 군사들을 채워주는 숫자였지만,

에반 프리드와 그 1천으로 이 퇴로를 뚫을 수 있을까.

하지만 카이셀은 그 불안을 구태여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뭉친 어깨근육을 풀어내며, 기세 좋게 웃곤 흑마법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수만 많지, 개개인은 상대할 만 해. 저걸 지휘하는 녀석 어떻게 잡는다면 퇴로를 뚫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대규모 마법을 사용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5분만 더 버텨주십시오.”

“5분...그 거면 마법이 준비될 것 같나?”

“충분합니다. 더 빨리 준비될 수도 있습니다.”

주춤한 전세였지만, 다시 한 번 몰아칠 때가 되었다.

카이셀의 시선이 테오라드에게 닿자, 그 시선을 느낀 테오라드가 검을 갈무리하며 숨을 내뱉었다.

펴진 5개의 손가락이 의미하는 것, 곧 마법이 준비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테오라드가 기사들을 이끌며 대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진형을 보다 날카롭게, 어수선하게 퍼져있던 기사들이 다시 대열을 갖추자 흑마법사들은 저마다 마법진을 그리며 기사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은 하늘이었건만, 새카만 마법진들이 하늘을 수놓아 마치 밤처럼 색을 물들였다.

그 마법진에서 타오르는 것은 초록색의 지옥불, 보랏빛의 황혼, 그리고 거뭇한 흑염.

흑마법사들의 마법에서 태어난 구울들이 저마다 살점 낀 이빨을 드러내며 기사들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차마 썩지 않는 살들, 드러난 뼈, 흘러내리는 장기.

시체들을 엮어만든 구더기골렘들이 육중한 발걸음을 옮기며 갈고리를 끌고,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그대로 둔 채 기사들을 향해 입을 벌리는 구울들의 모습에 기사들은 저마다 어깨를 흠칫 떨며 검을 쥐었다.

“뚫고 간다.”

카이셀이 입을 열었다. 목표는 안전한 퇴각,

마음 같아선 공작저를 향해 그대로 진격하고 싶지만.

지금은 이들이 어느 정도의 전력을 지녔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렇게 다수의 상대와 기사들로 맞부딪히면 손해가 컸다.

벌써 1천의 피해를 입지 않았던가. 이제부터 노리는 것은 소수로 저들의 무리를 각개격파하는 것,

지휘체계를 어지럽히고 동시에 야금야금 갉아먹는 장기전을 노려야 했다.

‘...에반이 오면 조금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카이셀은 에반이 데리고 온다는 증원군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카심 백작과 제라드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던 연구.

흑마법사를 상대로 효과적인 무구를 만든다던 것이 그들이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오는 그 증원군이 그 무구를 들고 온다면 앞으로의 전황은 어찌 될까.

‘지금은 이걸 고민할 때가 아니긴 하지.’

카이셀은 문득 스쳐지나가는 한 얼굴을 떠올리곤 쓰게 웃었다.

스칼렛 테라제인, 왜 지금 그 얼굴이 떠오르는 건지.

이제는 그 여인이 절멸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만약 그 여인이 절멸이 아니었다면, 하필 그 절멸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여인이 아니었더라면.

자신도 누군가와 백년해로 했을 지도 모르리라.

미련을 버린다. 이미 까맣게 물든 검은빛의 하늘을 바라보는 카이셀의 두 눈이 푸른 색으로 물들었다.

마나를 한계까지 끌어올려, 남은 5분을 확실하게 버텨내기 위한 수.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사방에 깃털이 흩뿌려졌다.

바람과 함께 흩날리는 깃털이 구울의 목을 베어나가며 탁한 색의 액체를 뱉어냈다.

뺨을 스치는 마법을 무시하고, 검으로 하늘에 솟구친 흑염을 베어냈다.

한 걸음을 걸으며 두 마리의 구울을, 두 걸음 째를 걸으며 거대한 배를 들이내미는 구더기 골렘의 배를 쑤신다.

흘러내리는 장기를 밟으며, 몸으로 들어오려는 혼탁한 탁기를 마나가 막아내고 있었다.

주변을 살핀다. 기사들은 아직 잘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잘 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타닥, 카이셀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카이셀과 테오라드가 첨단에 섰다. 조금씩 속도를 높이며,

앞을 향해 달려오는 구울들을 베는 것과 동시에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쐐기처럼 보이는 진형, 오로지 돌파를 위해서 만들어진 형세는 빠르게 구울들의 무리를 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따금 날아오는 마법은 메디브의 마법사들이 방어했다.

완전히 뭉쳐 처리하기 힘든 구울들은 황실의 마법사들이 직접 마법으로 처리했다.

그 외의 것들은 기사들이, 테오라드가, 카이셀이 직접 검으로 처리한다.

말은 없었다. 허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그 기세에 흑마법사들이 차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완벽하게 압도적인 군세, 허나 그럼에도 완벽하게 밀리는 기세.

불어오는 바람에 혈향이 섞인다. 기름으로 문질러진 검이 서서히 피로 물들며,

비릿한 철과 피가 불꽃에 실려 밤하늘을 불태우고 있었다.

쿵쿵! 동시에 내딛어지는 발걸음이 심장과 함께 울린다.

하나가 된 것처럼, 기사들은 마치 한 몸처럼 검을 내질렀다.

위에서 날아오는 구울의 아가리를 찢으며,

내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누더기골렘의 흉측한 눈알을 부수며,

터져나가는 뇌수와 척수액이 몸을 적심에도 기사들은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3분!”

하아­!

누군가의 입에서 외쳐진 고함 소리는 번져나가는 불길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두려웠다.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제 아무리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초인이라 불리는 기사들 또한 결국 인간이었다.

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에 이끌릴 뿐,

결국 불꽃이란 유혹에 날개를 펼치는 한 마리에 부나방에 불과 했다.

뛴다.

심장이, 다리가. 어쩌면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마저 망각할 만큼이나.

기사들은 저마다 여러 생각을 품은 채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회의감을 느꼈고, 누군가는 희열을 느꼈고,

누군가는 고통을, 누군가는 슬픔을, 다시 절망, 회한, 후회, 좌절.

그리고 그 끝에는 희망을.

아침에 울먹이며 싸우기 싫다고 말했던 기사가 이를 악물었다.

어젯밤에 담배를 태우며 내일 싸움을 상상했던 기사가 검을 놓쳤다.

자식이 둘 있다며 자식 자랑을 늘어놓던 기사의 검이 구울의 머리를 꿰뚫으며,

아내가 바람을 피는 것 같다고 한탄하던 기사가 구더기 골렘의 주먹에 맞아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허나 끝내 희망을 놓지 않는다. 황태자도, 황실 기사단의 단장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삶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결국 똑같이 생각을 품고 있었으니, 그들의 행동은 어느 순간부터 무서우리만치 하나가 되고 있었다.

밟은 땅에서 흙이 뿌려져 눈에 닿았다.

질끈 감긴 눈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은 사방에서 다가오는 구울의 시선을 느낀다.

오른쪽, 위, 아래, 왼쪽, 다시 회전 시킨 허리가 끝내 구울의 턱을 찢어발기며 탁한 액체를 하늘을 향해 뿌려놓는다.

그로 인한 기쁨은 잠시다. 구울이 휘두른 도끼가 갈비뼈를 후려갈긴다.

둔탁한 고통과 함께 입에서 뿌려지는 타액을 맞은 기사의 옆으로 다른 기사가 검을 휘두른다.

콰직!

머리를 부순 기사는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울먹이던 기사였다.

유약하던 성격으로 자주 놀림 받았음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유약한 성격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머리에서 질척이며 흐르는 것이 피인지 땀인지도 모를 만큼 혼란스러운 전장에서도 기사들은 시선을 보냈다.

살아라.

여전히 많은 적이었다. 허나 발걸음을 내딛는다.

살점이 파묻혀 조금의 움직임조차 하기 힘든 상황임에도 움직인다.

두툼한 살에 칼을 쑤셔 박고, 도끼를 휘두르고, 이어 둔기를 꺼내 머리를 박살내면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반목하던 기사들의 서로의 등을 맞대었다.

웅­ 북이 울린다. 그것이 하나의 ‘신호’임을 깨달은 카이셀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마법사들이 있을 후위에서 솟구치는 빛기둥.

“준비된 것 같군.”

“시전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아직 기세를 늦춰서는 안 됩니다.”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되겠나? 마법 한 방으로 퇴로를 뚫는 게.”

“해봐야 아는 법이겠죠. 안 되면 증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런가. 잠시 어깨를 으쓱이던 테오라드는, 다시금 구울을 향해 돌진하며 소리쳤다.

지금 필요한 건 마법사들의 시전을 위한 잠시간의 시간.

우웅­ 제국군을 둘러싸는 것은 대규모 마법으로부터 피해를 없애기 위한 메디브의 보호막이었다.

육각형처럼 생긴 조각으로 이루어진 방어막이 상공을 감싼다.

한 겹, 두 겹,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반투명한 보호막이 완전히 제국군을 뒤엎자,

기사들은 보호막 내에 남아있는 구울들을 처리하며 상황을 살폈다.

“마법 시전까지는 얼마나 남았나.”

“10초 남았습니다!”

후위에서 들려온 대답에 카이셀이 팔짱을 낀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메테오 같은 대규모 마법은 비효율 적이다.

지금 같이 퇴로를 뚫어야할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이 주변의 초토화가 아닌,

오로지 일점을 뚫어 길을 낼 마법. 하늘에서 솟구치는 것은 번개였고,

그를 확인한 카이셀이 옅게 미소 지으며 검을 들었다.

“...방어막이 사라지면 바로 진격한다.”

번개는 하늘을 찢는다. 거뭇한 색으로 물들었던 하늘을 단숨에 백색으로 덧칠하며,

순식간에 주변을 덮은 한기를 잊게 만드는 강렬한 열기를 내뿜을 따름이었다.

눈으로 감히 쫓을 수 없는 속도, 그렇기에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위력.

하늘을 가른 번개가 땅에 떨어지는 그 순간, 카이셀은 기사들과 함께 땅을 밟아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콰지지직­!

질주하는 번개가 스쳐난 자리에 더 이상 생명의 흔적은 남지 않았다.

새까맣게 재가 되어버린 땅에 남은 것은 차마 타지 않고 남은 육편,

한 때나마 사람의 형체를 지녔던 것은 이미 사라져 온 땅에 말라버린 액체를 흩뿌리며 사라진지 오래였다.

달린다. 부서지고 타버린 땅을 달리는 기사들은 점차 진이 빠지는 몸을 이끈 채 힘껏 달렸다.

마법사들은 차원문을 그리며 밖으로의 탈출을 시도했고,

뒤쳐진 병사들은 마법사들의 차원문을 타고 이동했다.

단 번에 많은 수가 이동할 수 없었기에 소수만이 이용하는 방법,

몸이 성한 기사들은 잠깐이나마 텅 비어버린 길을 따라 쭉 내달렸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카이셀은 폐로부터 올라오는 비릿한 맛에 이를 악문 채 뛰었다.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심했다. 이대로 퇴각에 실패하면 병력 소모가 클 터,

잠시나마 뚫린 이 퇴각로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카이셀은 모든 마나를 뛰는데에 소모하며 달리고 있었다.

달릴수록, 저 멀리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첨탑의 반대쪽,

처음 이 평야에 들어섰던 길목. 모든 기사들이 안도하며, 카이셀 또한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채 검을 쥔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한순간 풀린 긴장에 타오르던 불꽃이 사라진다. 모든 것이 끝났다.

퇴각에 성공했고, 이제는...증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

“좋아, 전부­”

두근.

그 순간 머릿속에 울린 경종은 카이셀의 몸을 순식간에 움직이게 만들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발걸음 하나 못 옮길 것만 같이 무거운 몸이 튕겨나가듯 나아가,

땅에 구른 카이셀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지쳐서가 아닌, 무언가에 의한 원초적인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돌겠군.”

크오오­

거친 포효에 기사들이 몸을 떨었다. 등을 맞대고 싸운 기사들이 그 거대한 손톱에 가볍게 찢겨나갔다.

잠시나마 용기를 되찾았던 기사의 머리가 뭉개져 힘없이 스러졌다.

자식이 있던 기사의 다리가 찢어지고, 아내가 바람을 피던 기사는 그나마 깔끔하게. 그렇게 죽어 사라진다.

한 때는 비늘 덮인 몸이었을 터였다. 창공을 가르는 넓은 날개엔 이미 그 거죽이 사라진지 오래라,

완전히 뼈만 남은 몸체에 백골만이 성성하게 남아있었다.

텅빈 두 눈을 불사르는 것은 보랏빛의 황혼.

뼈만 남은 목이 외쳐대는 포효에 기사들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 시선이 마주하는 자는 곧 죽음을 겪었으니,

진열을 이탈하고 도망치는 기사를 카이셀은 차마 잡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본 카이셀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얗게 질린 입술에서 피가 흠뻑 새어나옴에도, 미친 듯이 떨리는 몸은 진정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힘들게 잡은 희망의 끈이 순식간에 뚝 끊어짐에,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제스트마저 탄식을 머금었다.

“...태자 전하.”

테오라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똑같이 떨리는 몸이었지만,

흘러버린 세월이 안겨준 연륜은 그 떨림을 잠시나마 숨길 수 있게 했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황태자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 테오라드가 조용히 웃었다.

“제가 막겠습니다.”

주름진 손의 손가락이 활짝 펼쳐지며 검을 쥔다. 처음 만났을 때 무어라 불렀던가.

그때만 하더라도 사람으로 클 수 있을까 걱정했건만,

이렇게 다 자라버린 황태자의 모습에 중년의 기사는 회한마저 불살랐다.

“퇴각하십시오. 총대장으로써의 명입니다.”

카이셀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테오라드를 바라보았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혼자 막아봐야 얼마나 막을 수 있겠는가.

허나, 터져나갈 듯 뛰는 심장은 더 이상의 마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조금 더 현명하게 판단했다면, 조금 더 주변을 살피고 움직였다면.

그 말을 입 밖에 내뱉지 않았다. 여기서 더 변명해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피가 뚝뚝 흐르는 주먹을 쥔 채 발걸음을 옮기는 카이셀이 뒤를 돌아봤을 때,

테오라드는 본 드래곤을 향해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버틸 수 있는 시간이라 해봤자 고작 몇 분일 터. 여기서 도망가는 것이 과연 옳을까.

그 찰나의 시간동안 수많은 생각이 뒤따랐고, 수많은 상념이 거듭됐다.

그렇게 찰나, 다시 쪼개진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상념.

콰르릉! 무너지는 땅에서 테오라드는 다시금 영역을 펼쳤다.

공간을 가르는 검이 드래곤에게 닿았으나, 이미 전력을 되찾은 용 앞에 허무하게 흩어질 따름이었다.

그나마 약간의 금이라도 생긴 것을 다행이라 할까. 손에 쥐어진 대검이 파르르 떨렸다.

앞으로 쳐낼 수 있는 공격이라 해봐야 몇 합.

후우­ 쏟아지는 숨에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자신이 여기서 죽는다면, 이 뒤에 저 용을 잡을 수 있을까.

이 전장에서 잃은 기사가 1천 하고도 5백이었다. 거기에 마스터 한 명을 잃는다면.

표정이 점차 굳어진다. 완전히 하늘을 뒤덮은 그 거대한 용의 몸집에 잠시나마 비쳤던 빛마저 사라졌다.

새까맣게 변한 주변, 몰려오는 구울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옴에 테오라드가 다시 이를 악물었다.

늘 애지중지하며 길러왔던 콧수염이 용의 숨결에 타올랐다. 푸른 불꽃과 부딪혀 하늘로 치솟는 검은 불길.

한 합, 공격을 막아낼수록 지쳐가는 몸에 테오라드의 무릎이 접혔다.

헐떡이는 숨에 시야마저 흐릿해지고, 순간 고꾸라진 고개에 정신이 찰나 깨워진다.

몸을 향해 다가오는 발톱, 순식간에 닿아 이윽고 몸뚱아리를 꿰뚫을 발톱에 몸을 어떻게든 일으키려는 그 순간.

“늦어서 죄송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테오라드는 그대로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한 바퀴 뒹굴어 넘어진 그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다시금 이 주변을 새까맣게 뒤덮은 군세들.

유리스의 상징인 가시방패가 그려진 깃발이 나부낌에 멍하니 입을 벌린 테오라드를 본 에반이 멋쩍게 웃었다.

“...이렇게 몰릴 줄은 예상 못 했습니다. 빨리 온다는 게 그만, 용 하나를 잡느라.”

새하얀 불꽃을 날개처럼 펼친 에반의 뒤로 거대한 용의 사체가 눈에 띄었다.

이 길을 가로막고 있던 용보다도 거대한 본 드래곤.

그 시체를 잠시 바라보던 에반이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아스칼론을 쥐었다.

손잡이만 남아있던 검에서 뽑혀 나오는 것은 금빛의 검신.

새하얀 불꽃에 휘감긴 에반의 눈이 황금색으로 물들며, 이윽고 밤으로 뒤덮인 하늘에 새하얀 빛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진격하죠.”

저마다 새하얀 갑주를 입은 유리스의 군사를 보던 테오라드는,

에반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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