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세계수, 진실, 그리고 빙의 (3)
* * *
“이제 어떻게 할 건가?”
하탄 토벌은 완전히 끝났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이 소모되긴 했으나, 제국군의 피해는 증원군을 제외하고도 2천에 달했다.
단 3명으로 이루어졌던 로만 토벌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
비록 9천의 기사가 없었다면 그 많은 수의 구울을 전부 처리하는 게 꽤 힘들었을 테니.
이렇게 된 상황에 계속해서 진격할 수는 없었다.
“우리들은 황도로 돌아갈 생각이네. 어차피 기사들을 재정비해야하고, 이 상태로 어디론가 진격하기도 힘들 테니까. 진격해봤자 하탄 만큼 큰 곳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뭐, 저도 돌아가야죠. 엘프 사절단을 맞이해야 하니까요.”
“엘프라면, 생각해보니 유리스에 엘프들이 찾아왔다고 하던가.”
엘프들이 겨울에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꽤 자주 있는 일이었다.
특히나 대륙의 북부에 위치한 유리스의 겨울은 다른 곳에 비해 훨씬 춥지 않던가.
제 아무리 세계수의 가호를 받아 계절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는 엘프라 한들,
결국 추운 겨울이 찾아오면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종종 유리스와 교류하곤 했으니,
에반의 말을 들은 카이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엘프가 유리스를 도와 절멸과 싸운다면 어떻게 될까. 이제 얼마 남지 않긴 했으나,
그들이 부활시키려 하는 고룡 마베트가 언제 깨어날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정말로 개기월식이 벌어지는 날 깨어난다면, 도대체 이 넓은 대륙 어디에서 마베트가 부활한단 말인가.
하탄의 가주인 로이는 끝까지 마베트의 부활에 대해서는 조금도 내뱉지 않았다.
이미 막을 수 없다며, 순리를 거스르지 말라는 대답에 열불만 삭히던 카이셀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군. 그대는 엘프 사절단을 따라 엘드랏실로 향하겠지? 몸 조심하고...아마 다음엔 조금 더 좋은 일로 만났으면 좋겠군. 얘를 들어 결혼이라던가.”
“어째 저보다 더 결혼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팬이거든. 응원하고 있지.”
“그러십...니까.”
살짝 얼떨떨한 표정으로 카이셀을 바라보던 에반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쿡 웃음을 터트렸다.
결혼이라. 뭐,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내년이 오면, 그리고 봄이 오면. 이 앞에 남은 모든 것들이 끝나 결과만이 남았을 상태였으니까.
천 명이 고스란히 남은 기사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에반은 다시 공작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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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누 벨로레 델레나. 태양이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특유의 길쭉한 귀를 자랑하는, 눈에 흰자 하나 없이 초록색의 마력만을 담고 있는 엘프들의 모습에 아이린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비록 유리스의 소가주이나, 엘프들을 상대로 인간의 지위는 황제나 노예나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인삿말에 맞추어 인사하자, 가장 앞에 서있는 화려한 옷을 입은 엘프가 입을 열었다.
“유리스에 오는 것은 꼭 70년만이군요. 정말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제 증조부께서 살아계실 때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거죠.”
“...예의가 아님은 알지만, 저희의 용건을 먼저 말해도 되겠습니까? 상황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여러 인삿말이 오갈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엘프 사절단의 대사는 먼저 자세를 낮추며 용건을 꺼내려 했다.
엘프의 눈을 잠시 쳐다보던 아이린은, 이윽고 빙그레 웃으며 찻잔이 놓인 탁자로 그들을 안내했다.
마법으로 보존 된 수많은 꽃과 풀들. 엘프가 온다는 얘기에 며칠간 가꿔놓은 정원에 엘프 들의 얼굴에는 한껏 호의가 서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꽤 급하신 것 같네요.”
“그렇습니다. 원래라면 이렇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번 겨울은 세계수께서도 힘들어하시고 계십니다. 인간들의 세상에서 최근 이변이 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변이라 함은, 절멸 외에 이렇다 할 것은 없죠.”
“...절멸이라는 조직이 아마 이번 일의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그 말에 아이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전까지 모인 정보는,
분명 절멸이 이종족과 척을 지지 않으려 확실하게 선을 긋던 행보가 아니던가.
허나 이제 와 엘프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게 절멸의 영향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그 말에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아이린은, 앞에 앉은 엘프를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최근 들어 우리가 살고 있는 숲 외곽의 황폐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를 억제하느라 엘드랏실의 힘 상당수가 소모되었고, 결국 겨울의 추위를 버텨내야할 식물들이 시들어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게 되었죠.”
“요컨데, 그 황폐화의 원인이 절멸이라는 것이네요.”
“인간들이 숲을 지나는 것에 불만을 가지진 않습니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숲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 통행을 허락했으니까요.”
하지만, 엘프는 조용히 입술을 짓씹었다.
인간들이 지나간 곳에 남은 흔적은 분명 어둠이었다.
그림자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는 흔적, 생명이 사라지고, 땅이 죽어 황폐화된 숲.
엘프들은 이미 그 존재들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인간들에겐 절멸이라 불리며, 엘프들에겐 고룡의 추종자들이라 불리는 조직.
“혹여, 절멸의 목적이 고룡 마베트를 부활시키는 것은 아닙니까?”
그 말이란 아이린의 정곡을 꿰뚫는 말이었다.
아직까지 제국군이 섣불리 모든 절멸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
하탄과 로만을 토벌하고도 안심하지 못하는 이유란 결국 고룡 마베트의 부활을 경계하기 때문이 아니던가.
아이린의 표정을 확인한 엘프는 이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만약 그게 맞다면...고룡 마베트는 이미 부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아니, 혹시 그걸 증명할 단서가 있는 건가요?”
“숲의 황폐화는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9서클을 이룩해낸 대마법사라면 몰라도, 수준이 기본적으로 낮은 흑마법사들이 그런 것을 해낼 수 없죠. 그리고 그건 애초에 마법으로 해낸 게 아닌, 자연적으로 생겨난 현상.”
잠시 숨을 가다듬고, 조금 더 차분한 표정을 지은 엘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룡 마베트는 분명 이미 부활했습니다. 여태껏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건 아마도 힘이 모자라 본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얘기겠죠.”
엘프의 말을 들은 아이린은 순간 뒷통수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짜릿하며, 단숨에 뇌를 관통해 등골을 타고 느껴지는 오싹함.
지금까지 의문으로 남아있던 것들이 단번에 풀리는 말이었다.
절멸이 붉은 달이 뜨는 날 계획을 실행하는 이유,
그게 사실은 고룡 마베트를 부활 시키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이미 부활한 마베트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잠시 침음을 삼키던 아이린은 엘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저자세로 나온 엘프이기에 조금은 이득을 챙기려 했건만,
아무래도 급박한 것은 엘프 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협력을 구해야 했다.
인간들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뤄낼 수 없는 일.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유리스와 협력하여 절멸과 싸울 생각은 없으신가요?”
아이린의 말에, 조금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던 엘프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야 우리가 원하는 말을 꺼내주시는 군요. 우리 엘프는 세계수와 태양의 이름 아래 그대들에게 협력할 생각입니다. 다만 원하는 것은”
“전투원이 아닌 엘프들이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정기를 흡수할 수 있는 곳.”
“마침 이 유리스 근처에 적합한 곳이 하나 있던데, 우리에게 그곳을 빌려줄 수 있을지가 궁금하군요. 이곳과 꽤나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라 괜찮은 것 같은데 말이죠.”
하아. 아이린은 속으로 끙 앓으며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말하는 장소란 뻔하지 않은가. 협상에서 카드로 내세울 곳이 바로 세이렌이었건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얘기하는 그들의 모습에 아이린은 쓰게 웃으며 뺨을 쓸어내렸다.
허나 이제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정말 엘프들의 말대로 고룡이 살아있는 상태라면, 이제 고룡과의 일전을 준비해야 할 테니까.
모든 것을 내줄 수도 있다. 유리스의 병력, 마법사들, 설령 이 땅 전부를 잃어도 좋았다.
허나 사람들이 죽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으니,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란. 엘프들과 손을 잡는 수였다.
“그래서, 세계수로 향할 사람은 누구인가요?”
“...세계수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고 싶지만, 여왕 폐하 때문에 그것은 역시 힘들겠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대들을 배려하고 싶어도, 다른 모든 부분을 배제하고 그 부분만큼은 어쩔 수 없으니까요.”
“아마도 저와 제 호위 기사가 향할 겁니다. 약간의 기사단 또한 뒤따르겠죠. 그런데 지금 당장은 호위 기사가 없는 터라, 늦어도 내일이나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하루 정도면 괜찮습니다. 그 정도 시간은 우리도 배려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에반의 얼굴을 떠올린 아이린은 괜스레 피어오르는 불안감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지금쯤이면 하탄 토벌에 가 있을 에반이 혹여 다치지는 않았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에반 몰래 방어 마법 여러개를 걸어두었는데...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라, 아이린은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멀리 하탄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았다.
“연인이라도 걱정하는 겁니까?”
“...아.”
“인간의 눈에서는 늘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비치곤 하는 법이죠. 이해합니다. 아마도 아이를 잉태한 것 같은데...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확인해도 괜찮을까요?”
“미안하지만, 무엇을 하려는지 물어도 되나요?”
“엘프들은 아이 한 명을 낳기 위해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것이 엘프의 수가 적은 이유이자, 동시에 긴 수명을 지니는 이유이죠. 비록 엘프처럼 긴 수명을 보장할 수는 없어도, 태어날 때 아무 사고 없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미의 종족이라 불리는 그들답게 적의 하나 없는 깨끗한 미소를 본 아이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를 확인하게 하는 것 정도는 괜찮으리라. 어차피 의사들도 확인하는 것이었으니,
아이린의 옆에 서있던 크리스가 검을 살짝 움켜쥐었지만, 엘프는 아무렇지 않게 아이린의 배 위에 손을 올린 채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세계수의 기운은 오직 엘프에게 긴 수명을 약속합니다. 허나 세계수께서 스스로 친애하고자 한다면, 엘프가 아닌 이들에게도 그 축복의 일부를 선물해줄 수 있죠. 저는 비록 여왕은 아니나 세계수에 속한 대장로중 하나, 같은 여인으로써 그대의 심정을 이해하고. 동시에 이제는 동맹으로 거듭날 사이로써 하는 것이니 안심해도 좋습니다.”
“...의심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조금 예민해진 터라.”
“이해합니다. 비록 경험은 없으나, 제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했을 때 어떻게 변했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자랐으니까요.”
스르륵 엘프의 손을 타고 흘러내린 초록빛의 기운이 아이린의 배를 향해 스며들기 시작했다.
기분이 산뜻해질 만큼이나 따듯하고 깨끗한 기운.
마나와는 완전히 다른 그 기운을 느낀 아이린이 엘프의 손이 사라진 배를 쓰다듬자,
과연 그 안에서 느껴지는 생명이 이전보다 훨씬 건강하고 활기차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해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유리스와 연을 맺은 지 400년, 이 정도 호의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습니다. 다만...아무래도 손님이 하나 온 것 같군요.”
엘프가 고개를 들자, 그곳을 향해 시선을 돌린 아이린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지기 시작했다.
귀에 들려오는 발걸음, 그리고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이 익숙한 마력이란 오직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니.
순식간에 밝아진 아이린의 얼굴을 본 엘프가 싱긋 미소 지었다.
아까 허공을 보며 그리워 하던 사람이 저 기사였을까.
그 기사를 찾아 눈동자를 굴리던 엘프는,
이윽고 시선이 마주친 한 기사의 얼굴에 어깨를 흠칫 떨며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아니, 그런 반응은 그녀만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 엘프들 모두가 살짝 벙찐 얼굴로 한 기사를 바라본 채 멍하니 서있을 따름이었다.
백색의 갑주를 입은 기사, 어쩌면 어리다고 할 수 있을 만큼이나 젊은 나이처럼 보였으나.
그 얼굴에 담긴 미색이란 어지간한 엘프보다도 더한 것을 담고 있었다.
엘프의 눈동자처럼 초록빛을 띄고 있는 눈, 거기에 저 멀리 서 있는 한 여인을 보며 띄고 있는 은은한 미소까지.
같은 엘프마저 얼굴을 붉힐 정도의 미색에 엘프들은 저마다 할 말을 잃은 채 인간 기사를 향해 시선을 차마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는데.”
엘프들의 시선을 알아차린 아이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무사히 돌아오긴 했지만, 이제는 엘프마저 홀릴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것이 아니냐며, 그저 말없이 한숨만을 내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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