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결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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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정확히 자연은 제 아무리 높아진 마법으로도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비가오고 눈이 내리는 것이라면 몰라도, 몇 년에 한 번 있는 현상을 어떻게 완벽하게 측정할까.
허나 월식과 일식은 농사가 중요한 이 시대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현상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관측되기 몇 백 년 전부터 다뤄지며,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그 정확도는 점차 높아져 갔다.
그렇기에 예측했던 것이 개기 월식, 만약 달이 제 스스로 움직이거나.
그 달이 움직인 것처럼 보이도록 누군가 환상 마법을 걸어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예측하는 것에 성공하기 마련이었다.
허나, 왜 갑자기 달의 궤도가 급격하게 틀어진단 말인가.
“말도 안 돼! 달이 왜 갑자기 제 마음대로...!"
달을 보던 천문학자가 소리치자, 그 옆에 있던 마법사들이 모여 달을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달을 감싸고 있던 것은 엄연한 마력. 도대체 누가...저 하늘에 있는 달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마치 개기 월식을 가리키는 날을 착각하게라도 만들기 위한 것처럼.
그 순간 마법사들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하나같이 한 존재를 떠올린 마법사들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공포에 휩싸여, 이윽고 떨리는 손가락을 하늘에 향해 들어 올린 마법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용이다.”
용, 이미 몇 백 년 전에 잊혀져 신화로 남아버린 이름.
달에 가려져 흩어진 마력은 감히 인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마법사가 아닌 인간은 단지 느끼기만 하더라도 전율을 느끼는 마력.
그 마력이 달에 작용했다면, 달에 적용한 마력이 사람들에게 환각을 느끼게 해 개기 월식의 날짜를 착각하게 만들었다면.
그 용이라는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지 않던가.
“마베트.”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모든 마법사들의 표정이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개기 월식이 내일이라는 가정 하에 시작된 출병, 그것이 틀렸다는 건...
지금 제국군이 고룡 마베트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순간,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의 표정이 절망으로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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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있었다. 새하얀 물감처럼, 태어나서부터 순수함을 타고난 여인이었다.
먼지 한 올이라도 닿는다면 순식간에 더러워질 것이 뻔한, 그 지고하리만치 깨끗한 순수함은 모두의 이목을 이끌었다.
그 어떠한 흠조차 없는 순수함,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이었기에.
어쩌면 그녀가 보랏빛으로 물들 것은...예견되어 있을 미래였을지도 몰랐다.
“...조금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카이셀은 쓰게 웃었다. 단지 절멸을 처리하기 위해서라며,
애써 스스로의 마음을 변명하던 자신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조금 솔직하게 말해봤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빨리 만나서,
조금 더 마음을 터놓고 대화했다면. 이렇게 다시 만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차가운 바람이었다. 그리고, 닿지 않을 바람이기도 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밤 그림자에 묻혀 조금씩 흐릿해져 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탄 원정에서 조금 더 빨리 돌아와 스칼렛을 붙잡았다면 이런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었을까.
허나 이미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마음에 품고 있던 여인이 아니라,
천 년 전 봉인 당했던 고룡이 되어버린 스칼렛이. 제 눈앞에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아해(??)야, 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모든 것이 예견되어 있지 않았더냐.”
마베트가 입을 열자,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힘에 카이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목소리만으로도 느끼는 전율, 맞서 싸운다면 과연 저 비늘을 벨 수 있을까.
본 드래곤과 마주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승산을 재는 것보단, 그저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떠나라며 온몸이 경고를 부르짖었다.
여기서 도망치면, 자신은 살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살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살아야 하는 이유, 거듭되는 생각 속에서 카이셀은 그것을 끝내 찾지 못했다.
제국의 황태자가 그리 대단한 존재였던가. 제 여인 하나 지키지 못하는 이가,
여기서 구차하게 살아가봤자. 아마도 평생을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목소리도 똑같군.”
마베트를 바라보던 카이셀이 중얼거렸다. 늘 듣던 목소리였다.
얼마 듣지는 않았으나, 항상 기억하고 있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의미하는 것,
아마도 스칼렛은...마베트에게 제 몸을 완전히 빼앗긴 것이 틀림없었다.
뿌드득 거칠게 쥐인 검의 손잡이가 부들거리며 떨렸다.
새하얗게 물든 손아귀에서 피가 흐르고, 짓씹은 입술이 찢어져 이미 입가엔 피가 흥건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마베트의 시선에 카이셀은 온 영혼이 찢어발겨지는 고통을 느꼈다.
단순히 시선을 보내는 것뿐이지만, 천 년을 살아가던 고룡의 시선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모든 마법을 능가할 저주와도 같았다.
무거운 몸, 당장이라도 한 걸음 걸으면 뼈가 부러질 것만 같은 그 압력 속에서.
저벅
카이셀은 힘겹게나마 발걸음을 내딛었다.
화르륵 잠시 그 압력에 짓눌려 꺼져가던 불꽃이 피어올랐다.
붉은 색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투지를 담아서, 꺾이지 않을 의지를 담아 카이셀은 앞을 향해 걸었다.
이길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진다. 허나 여기서 도망친다면...
“나중에 스칼렛을 만나서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자신은 말재주가 꽤 뛰어났다. 여자들을 만나 허풍을 떠는 것도 익숙했고,
여자 하나쯤은 하룻밤이면 제 것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허나 그렇지 못한 여자가 하나 있었다면, 그건 스칼렛이었다.
어쩐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여인. 그냥 제국을 위해 만난 여인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먼저 약속을 잡으려 했던 여인.
살아서, 스칼렛을 만난다.
그 일념이 다시 불꽃을 만들어냈다. 마스터에 처음 올랐을 때,
그 순간 느꼈던 폭발적인 힘이 카이셀의 몸을 천천히 휘감기 시작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불꽃이 어둠을 잠시나마 걷어냈다.
마베트가 만들어낸 그림자를 걷어내며, 동시에 잠깐이나마 하늘에 비친 별빛이 카이셀의 머리에 부딪혀 반짝였다.
콰가가가각! 마베트의 몸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 거대한 몸집이 움직이자, 아직까지 버티고 있던 테라제인의 성채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려 땅으로 휩쓸렸다.
펼쳐지는 날개, 단순한 날갯짓만으로 생겨나는 바람이 태풍처럼 불어와 병사들을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부서지는 땅, 격동하여 갈라지는 대지에서 용암이 솟구쳤다.
하늘이 어둠으로 뒤덮여, 오로지 붉은 달빛만이 기이하게 빛나는 하늘에 마베트의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오만하다.”
“알고 있다. 나는 바보가 아니야.”
카이셀은 답했다. 승산? 부질없는 소리였다.
객관적으로 봐도, 설령 마베트가 지금 보이는 모습이 그저 허세에 불과 한다고 한들 자신이 질 게 뻔한 싸움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돕지 못한다. 마베트의 마법으로 급격하게 불어난 구울을 처리하기 위해 테오라드가 뒤에서 싸우고 있었다.
에반이 향한 것은 이곳과 완전히 반대였으니, 아마 여기까지 온다고 한들 시간이 걸리겠지.
“그런데도 싸우겠다면, 기어코 스스로의 죽음을 택하는 것인가? 어리석군.”
“...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지 마라.”
기기긱 검을 고쳐 잡은 카이셀이 마베트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스칼렛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살아있을 지도 몰랐다.
검 손잡이 끝에 매달린 머리카락이 아직 남아있었으니까.
완전히 스칼렛이라는 존재가 사라졌다면, 저 머리카락마저 사라졌을 터였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다. 카이셀은 스스로 희망을 품어보았다. 마베트를 죽여서, 스칼렛을 구한다.
‘못할 지도 몰라.’
알고 있었다. 사람이 주먹으로 하늘을 때리지 못하는 것처럼,
어쩌면 조금도 닿지 못할 벽일지도 몰랐다. 시조 황제 알라르 조차 고룡을 베지 못했다.
비범하지 않은 자신이, 평범하지 않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저 용에게 흠집하나 내는 것뿐이리라.
어쩌면, 흠집조차 내지 못할 수도 있음을 카이셀은 잘 알고 있었다.
호흡을 고른다. 박동하는 심장이 혈류를 내뿜어,
이윽고 온몸에 가득 퍼진 마나가 다시금 푸른 불꽃을 일으켰다.
펼쳐지는 영역, 느려진 시간 속에서 온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카이셀이라는 한 명의 기사뿐이었다.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인가?
스릉
검이 허공을 갈랐다.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나뭇잎이 검 끝에 닿아 양단된다.
날카롭다. 자신의 지금은, 스스로를 검으로 칭한다면 자신의 예기(??)는 그 어떤 것보다도 날카로울 따름이었다.
허나 닿지 않는다. 알고 있다. 아무리 에반이어도, 저 용을 죽이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허나.
물러서지 않는다. 제 아무리 적이 하늘이어도, 여태껏 그 누구도 베지 못한 용이더라도.
이 순간 검을 쥐고 있기에, 단 한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기에.
카이셀은 검을 들었다. 푸른 불꽃이 솟구쳐, 용암이 흐르는 땅에 자그마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마베트의 입에서 검을 불꽃이 용솟음쳤다. 구오오오 밤이 가진 모든 어둠이 그 불꽃에 모이는 것만 같았다.
압도적인 위력, 그 불꽃에 닿지도 않은 나무가 열기에 불타 재가 되었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감각에 카이셀이 이를 악물었다.
불꽃이 품은 열기에 하늘에 순간 아지랑이가 비쳤다. 타닥, 카이셀이 땅을 밟았다.
마스터의 육체를 가진 카이셀의 몸짓은 바람과도 같았다. 순간 튀긴 불꽃을 검으로 가르며 나아간다.
하늘에 있는 용이었으나, 한 번의 도약으로 허공에 날아오른 카이셀이 마나로 하여금 날개를 펼쳤다.
빠지직! 용의 발톱과 부딪힌 검에서 불꽃이 튀겼다. 어떠한 금속보다도 단단한 것이 발톱이었기에,
어깨에서 전해져온 충격에 카이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깐이나마 희망을 품은 것은 오만일지도 몰랐다. 상상보다 강력한 것이 용이었다. 여기서 죽는 건가? 아니, 카이셀은 웃었다.
자신이 죽을 곳은 여기가 아니었다.
언젠가 죽는다면, 그건...지금이 아니었다. 카가가가각! 허공에서 도약한 카이셀의 옆을 불꽃이 꿰뚫었다.
마베트의 눈동자가 살짝 아쉬움을 품자, 그걸 본 카이셀이 마베트의 비늘을 밟으며 다시금 앞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어차피 베지 못한다. 자신의 검으로 베기엔, 너무도 단단한 것이 저 비늘이었다.
하지만 눈이라면, 저 보랏빛의 눈동자가 꿈틀거리는 눈이라면 벨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타닥, 안 쪽으로 파고드는 카이셀을 떨쳐내기 위해 마베트가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부서지는 산, 흩어지는 구름.
다시금 격동하는 대지에 군사들이 구울과 싸우다가도 놀라 도망치기 바빴다.
그걸 보며 혀를 차던 카심 또한 결국 퇴각을 명했다. 지금은 싸울 수 없다.
용과 인간의 싸움, 저 초월적인 싸움에서 이종족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남은 병력을 온존시키는 것뿐이었다.
“전원 퇴각하라! 뒤로 물러선다!”
“구울들은 어떡합니까?”
“무시하세요! 여기에 더 있다간 마베트의 불꽃에 휩쓸릴 겁니다!”
아니스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카이셀이 아무리 선전한다고 한들 결국 시간을 끄는 것이 전부였다.
에반 프리드가 오기 전까지 버틸 수 있을까.
정확히는, 에반 프리드가 온다고 해도 저 고룡을 죽이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이미 여왕으로부터의 전언을 들은 아니스였다. 고룡이 나타나면, 에반을 도와 용과 싸워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과연 이 구울을 전부 처리할 때까지 에반이 버텨줄 수 있을지.
다시금 화살을 시위에 매긴 아니스가 주변을 둘러보자,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구울이 눈에 띄었다. 허나,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수였다.
‘1시간.’
이 구울 들을 전부 처리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
콰직 구울의 머리를 화살이 꿰뚫고 지나갔으나, 아니스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밤이 깊어진다. 아직 여명이 찾아오기까지 한참 남은 시간.
붉은 달은 점점 그 빛을 키워가고, 점차 옅어지는 푸른 불꽃만이 희미하게 빛을 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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