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결전 (4)
* * *
하늘을 수놓는 빛이 있었다. 어둠으로 가득 찬 하늘을 다시금 빛으로 물들여,
모두의 이목을 끄는 빛에 아니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베트의 마력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방금이었건만, 에반의 마력이 그에 뒤따라 어둠을 완전히 걷어내고 있었다.
마치 알라르와 마베트가 싸웠던 천 년 전의 싸움을 다시 보는 것만 광경에 이종족들이 멍하니 있기도 잠시,
마베트를 향해 검을 내질렀던 에반이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방금의 일격으로 갈라진 하늘엔 참격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갈라진 구름, 깔끔하게 잘려 옆으로 퍼진 구름엔 커다란 선이 그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베트가 그 일격으로 죽었는가. 에반은 그 의문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죽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마베트가 고작 그런 것에 죽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영역의 능력을 한 번 사용하긴 했지만, 몸에 감도는 이 미묘한 마력은 이전까지 다루던 것과는 꽤나 다른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애초에 불꽃 또한 하얀 색이 아닌 눈동자와 같은 금빛이 아니던가. 이 금빛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확실한 것은 마베트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이라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을 성 싶었다.
“빌...어먹을.”
상처 입은 고룡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날개 두 개가 모두 뜯어지고,
가슴팍에 길게 남은 상처에선 피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날개를 이용하여 최대한 방어했음에도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
도대체 어떻게...인간이 그런 힘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알라르와 싸울 때엔 상처를 입지 않았다.
봉인된 것은 단순히 프리드가 지닌 정화의 힘에 당해 방심한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날개를 잃다니, 마베트는 작게 탄식을 흘렸다.
이렇게 피해를 입어본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가. 아마도, 스스로 세상의 빛을 본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리라.
땅에 처박힌 고룡의 모습을 바라보는 에반의 시선이 차갑게 식어내렸다.
그걸 막고도 죽지 않았다, 라. 방금의 그 공격은 어쩌면 이 싸움에서 유일했을 지도 모르는 공격이었다...
어지간해선 그걸로 죽이고 싶었건만, 아마도 마베트가 힘을 꽤 사용해 방어해낸 게 아닐까.
‘그래도 날개는 떼어냈으니까.’
용은 더 이상 하늘 위에 있을 수 없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 있지 않을까.
무너진 산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에반의 몸에는 여전히 금색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한 번, 영역에서의 일격을 한 번 더 먹일 수 있다면 끝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 방 먹었군.”
마베트의 입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번 들어본 목소리였기에,
불쾌함을 느낀 에반의 눈살이 한껏 찌푸려졌다. 스칼렛 테라제인의 몸을 잠식한 마베트.
이제는 원작에서 스칼렛이 용언을 사용했던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시점에서는 이미 스칼렛은 마베트에게 몸을 빼앗긴 상태였을 테니까.
구할 수 있을까. 살리고 싶었다. 단순히 절멸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것을 이제 알고 있지 않은가.
억울하게 희생되었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새하얀 도화지에 보라색의 물감이 칠해졌으니,
단지 그들에게 물들어 혼동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죄를 묻는다면,
아니. 애초에 죄를 묻기 위해서라도 살려야만 했다.
“말했잖아. 여기서 너는 죽을 거라고.”
“우습구나. 고작해야 인간에게 이토록 다치다니. 내 너를 인정하겠다. 아마 내 평생을 살아, 지금까지의 삶을 다시 반복하더라도 너만큼 강한 이는 없을 터다.”
마베트는 큭큭 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이미 크게 다쳤음에도 마베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분명 한 방 먹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날개를 잃고,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결국 살아있지 않은가. 드래곤 하트는 여전히 뛰고 있었다.
제게 축복이나 다름없는 용의 어둠이, 아직 자신의 편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베트는 만족했다.
용언, 아직 쓰지 않았다. 마법의 정수로써 군림하는 것이 용이었다.
아직 제 본신의 힘을 전부 다룰 수는 없었으나, 에반에게 이토록 당한 것은 단지 방심했기 때문이었다.
쿠웅, 균형을 잡은 채 다시 몸을 일으킨 마베트가 에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전과 달리 오만하고, 또한 여유로운 시선에 에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엇이...변한 걸까. 심정의 변화가 있어 보이는 것은 확실한데,
그게 무엇인지 감이 잡히질 안않았다. 체념이라도 한 건가.
아스칼론에서는 여전히 금빛의 검신이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저 마베트에게 쉽게 다가설 수가 없었다. 온 몸의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날아올 무언가를 대비하라며,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이 계속해서 경종을 울려댔다.
왜? 마베트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마력이 피어오른다면 곧바로 반응할 수 있었다.
지금 몸에서 흐르는 힘이란, 마스터에 있을 때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른 것만 같은 힘이었으니까.
물론 벽을 넘어선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마베트의 공격에 확실히 반응할 수 있었다.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갑자기 무슨”
구오오오 순간 흠칫 떨린 에반의 시선이 하늘에 향했다.
하늘을 수놓은 수백, 수천 개의 마법진이 이 대지를 향하고 있었다.
피한다면, 피할 수 있었다. 허나 그렇게 피했다간 이종족 전체가 휩쓸리지 않겠는가.
여명 속에서 피어오른 어둠이란 무엇보다도 이질적이었다. 수천 개의 점이 빛을 갈랐다.
콰아아앙! 하늘에서 쏟아지는 번개가 땅을 헤집으며 대지를 파괴했다.
떨어지는 운석이 에반의 검에 닿아 바스러지고, 동시에 휘몰아치는 바람이 몸의 상처를 벌렸다.
왈칵 쏟아지는 피였지만, 에반은 한 순간도 그 상처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마법의 정점, 오로지 드래곤만이 펼칠 수 있는 마법의 세례란 아무리 에반이라 한들 쉬이 반응할 수 없는 무언가였기 때문이었다.
뺨을 스치는 광선에 피가 흐른다. 삐걱거리는 관절에 결국 움직임이 둔해져 허벅지가 꿰뚫렸다.
부서지는 뼈, 망가지는 육체. 에반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이 상처를 회복시켜주고 있었지만,
상처가 회복되는 것보다 에반의 몸이 상처입는 것이 훨씬 빨랐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운석을 뭉개고 부숴도, 바람을 가르고 빛을 찢어도.
마나를 끌어올려 모든 마법을 단번에 파훼해도 그보다 많은 수의 마법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더해지는 브레스, 에반의 몸이 살짝 공중에 떴다가, 이윽고 땅에 처박혀 입에서 피가 울컥 내뱉어졌다.
중첩되는 충격에서 에반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빈틈을 찾는다...불가능했다.
이 마력의 폭풍을 홀로 견디는 것마저 버겁거늘, 어찌 이걸 뚫고 마베트를 향해 나아가겠는가.
사고가 뒤엉키기 시작했다. 사라지는 상념 속에서 에반의 의식은 무아(無?)를 향해 뻗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하고 있는 것, 자신이 지금 해야만 하는 것.
오로지 그 일념을 품고 나아가는 것이 무아였으니, 에반은 검을 쥔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소리를 듣는다. 열린 감각 속에서 망가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청각뿐이었다.
땅이 무너지는 소리, 바람이 대기를 할퀴는 소리, 솟구치는 용암 속에서 흑염이 이는 소리.
소리로 듣고 보는 세상이란 이전과 완벽하게 달랐다.
선이 보인다. 정확히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것도, 어디 한 번 막아 보거라!”
연속되는 소리 속에서 보이는 하나의 길, 에반의 발걸음이 마침내 앞으로 나아갔다.
필요한 것은 단 한 번의 공격, 마법의 폭풍을 뚫고 가는 에반의 몸을 향해 브레스가 쏘아졌다.
마베트의 마력이 응축된 브레스, 역수로 쥔 검이 브레스와 맞부딪혀 커다란 굉음을 쏟아내었다.
귀가 순간 멍해지는 소리의 폭발 속에서, 에반의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에반 프리드를 도와라!”
카심 백작의 목소리였다. 마법 하나를 망치로 부순 카심이 에반의 곁으로 다가가기 위해 드워프들을 이끌었다.
부서진 땅을 망치로 두드려 다시금 평평하게 만들고,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폭풍은 땅에게 명령하여 방어했다.
대지에게 사랑받는 종족, 그 누구보다도. 대지와 친숙한 종족이기에 할 수 있는 마법과도 같은 행위였다.
“앞으로 나아가게! 여긴 우리가 막을 테니까.”
가늘게 뜨인 눈, 에반은 훤히 트인 시야에서 씨익 웃고 있는 카심 백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번개가 몰아쳤다.
에반에게 쏟아지는 번개를 아니스가 나타나 숲의 정기로 몰아내었다.
초록색의 빛을 띠는 마력이 번개와 맞부딪혀 타올랐다. 망가진 땅에서 꽃이 피어나고,
녹음으로 물든 대지에서 넝쿨이 일어나 마베트의 몸을 속박했다.
묶어두는 것은 잠시였으나, 그 잠시에서 피어난 여유는 에반에게 꽤나 많은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타스딩고!”
폭발하는 용암을 도끼로 가른 쟌진이 거칠게 웃었다.
트롤들은 이미 저마다 구울들의 머리를 허리춤에 매달은 채,
난폭하게 무기를 휘두르며 마법의 폭풍을 파헤치고 있었다.
도중에 마법에 휘말려 죽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제 목숨이 완전히 거두어질 때까지 무기를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기에, 오히려 싸우다 죽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 믿었기에.
쟌진은 마법을 피할 생각조차 없이 계속 도끼를 휘둘렀다.
간혹 마법에 맞아 팔이 너덜너덜해지긴 했지만, 트롤의 재생력은 쟌진이 스스로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해서 싸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죽지 마라.”
쟌진을 스쳐지나갈 때, 자신의 귀에 들려온 목소리에 에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죽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처음부터, 찝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지 않았던가.
집, 에반은 그 단어에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집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새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 집이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린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청혼을 하긴 했으나, 결국 아이린이 나중에 하겠다며 없던 일이 되었다.
이 싸움이 끝난 뒤에 불안한 말이었지만. 에반은 그것을 불안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정령들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마법의 폭풍을 파헤치며 소모한 마나로는 영역을 펼칠 수 없었다.
그런 제게 남은 것이 무엇일까. 이상하게도 불안하지가 않아서,
에반은 검을 쥔 제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남은 마나라 해봐야 영역을 펼칠 수도 없는 마나였다.
검을 쥔 손에 끼워진 반지가 꿈틀 거렸다.
반지에서 마나가 흘러나와, 에반을 천천히 감싸기 시작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금빛의 마나가 아닌 푸른 마나였으나, 에반은 그 마나에서 한 사람의 흔적을 느꼈다.
익숙하고도 따스한, 그리고 차가우면서도 그리운 이 감각이란.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던가. 바닥을 보였던 마나가 천천히 채워졌다.
몸에 흐르는 것은 고양감, 동시에 이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은 포근함.
왜 반지에서 아이린의 마나가 흘러나오는지 알 수는 없어도,
에반은 이 순간 아이린과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우웅 잘게 떨리는 반지에서 마법진이 그려졌다. 푸른 마나가 금빛의 마나와 뒤섞여 어우러졌다.
에반의 뒤로 이어진 섬광이 허공에서 난잡하게 궤적을 그렸다.
여명 사이에 퍼진 그림자를 누비면서, 마베트가 내보내는 마법을 검으로 차분히 파훼했다. 이제는 펼칠 수 있는 영역.
허나, 에반은 곧바로 영역을 펼치지 않았다. 영역을 펼친다 한들,
이 일격으로 마베트를 죽이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은가.
조금 더 차분히 생각했다. 마베트가 만들어낸 검은 색의 창을 피하며,발톱을 부수며, 마법을 가르며.
마법으로 만들어진 지옥도를 헤쳐나가는 에반의 머릿속에 품은 생각이란 오직 일격(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단번에 저 고룡을 죽일 방법. 용에게 드래곤 하트가 있다는 걸 떠올리긴 했으나,
영역에서의 일격은 이미 마베트가 직접 방어한 적이 있었다.
만약 이번에도 마베트가 그 공격을 막아낸다면 그 다음은 없었다.
에반의 차가운 시선에 마베트의 눈이 부릅 뜨였다. 덜덜 떨리는 몸은 이미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에 대한 반증이었다.
두려워한다고? 자신이? 고작 인간을 두려워한다니.
콰아아앙! 대지를 박살내며 쏟아지는 그림자가 마치 칼날처럼 에반을 감쌌다.
마베트의 거대한 마력이 응집된 그림자가 땅을 뒤엎으며 이종족들에게 쏟아졌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크게 다쳐 물결에 휩쓸려 떨어졌다.
허나 에반은 그럼에도 마베트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마법에 의해 상처를 입어도, 그림자에 휩쓸려 잠시 주춤거려도.
어느 순간 자신의 앞에 다다른 에반에 마베트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쿠웅, 발이 뒤로 움직여 땅에 닿자 마베트는 머리가 새하얗게 물드는 감각을 느꼈다.
인간을 두려워하여 뒷걸음질 쳤다. 그것을 차마 용납할 수 없어서,
정확히는 인정할 수가 없어서. 마베트의 얼굴이 이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나는...나는, 마베트다.”
천 년이란 시간을 견뎌 여기까지 왔다. 알라르가 일궈낸 모든 것들을 망가트리고 부정하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건만,
고작 인간 기사 한 명에게 패퇴하는 꼴이 얼마나 우습단 말인가. 누가 자신을 두려워하겠는가.
설령 모든 힘을 잃더라도, 마베트는 이 기사를 죽이고자 마음 먹었다.
후욱 부풀어 오른 드래곤 하트가 마베트의 입에 거대한 마력을 담았다.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마력, 에반은 그 마력에 몸을 흠칫 떨었다.
...막을 수 있을까. 아니, 저 브레스를 뚫고 칼날을 마베트에게 박아 넣을 수 있을까.
의문투성이의 상황이었다. 확신이랄 것도 없이,
단지 검을 휘두른다는 선택지 이외에 제게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두렵다고 묻는다면, 에반은 그 질문에 부정했다. 두렵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느껴지는 것은 자신만의 마나가 아니었으니까. 5년, 그 시간이 흘러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아스칼론의 섬광이 하늘을 꿰뚫었다. 낼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끌어낸 검이 하늘의 여명과 맞닿아 공명했다.
콰가가가각! 땅을 가르며 나아가는 검의 첨단에 황금색 검기가 생겨났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이 에반에게 닿아, 다시금 휘몰아치는 금빛의 물결이 브레스와 맞닿았다.
허공에서 타오르는 흑염이 에반의 불꽃과 닿았다. 하늘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땅에서 에반의 자세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로지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끝나는 싸움. 마베트의 몸에 있던 비늘이 바스라져 흩어졌다.
에반의 몸에 걸쳐진 갑옷이 타올라 녹아내렸다. 그럼에도 놓지 않는 검,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흑염. 이를 악문 에반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앞으로 얼마나 더 긴 시간이 흘러야 결착이 날까. 순간의 부딪힘이었으나, 그 시간이 꼭 영원처럼 느껴졌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기억들. 처음 스스로를 에반이라 자각했을 때 떠올린 감정,
아이린을 만나고, 흑마법사와 싸워 다쳤을 때의 기억. 연심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걸 고백하고 연인이 되었을 때, 아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공작과 마주하여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 중 소중하지 않은 기억이란, 에반에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놓지 않는다. 피로 미끌거리는 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자신에게 내리쬐는 이 빛, 이질적이지 않았다. 그저 영역으로 소모된 마나를, 이제야 비로소 온전히 제것으로 다룰 수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늘을 베었다.’
영역을 처음 베었을 때, 에반은 마베트를 향해 내지른 일격으로 하늘을 베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일격, 그 경지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마스터가 아닌 그 위의 단계로 나아간다면 어떤 일격을 펼칠 수 있을까.
그 공격은, 화려하지 않았다. 너무 단순해서 초라하리만치 수수한 공격이었다.
마나가 용처럼 타오르지도 않고, 산을 부수며 하늘을 가르지도 않았다.
힘을 밖으로 흘리지 않는다. 근육 하나하나에 응축된 힘이 심장과 연결된 혈관을 타고 폭발적으로 증폭하기 시작했다.
점차 사라지는 흑염, 그리고 점차 더해지는 백염.
아스칼론의 금빛이 터져나가 흑염을 완전히 지워냈을 때, 에반의 시야에 보인 것은 제 가슴팍을 훤히 드러낸 마베트의 몸뚱아리였다.
그어진다.
흰 색의 도화지에 붓을 휘두르듯,
악보의 끝에 있을 마침표에 도달한 공격은 이 5년간의 행진곡을 끝으로 만들 방점이었다.
쏟아지는 여명이 마베트의 몸을 갈랐다.
그 거대한 몸에서 쏟아지는 빛의 실선이란, 그 빛을 바라본 에반이 이내 조용히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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