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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39화 (139/181)

〈 139화 〉 1부 완) 동화처럼 (2)

* * *

모든 싸움이 끝났다. 마베트는 죽었고, 한 때나마 제국을 위협했던 절멸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이라 해봤자 활약한 이들의 보상을 지급하는 정도일까.

이종족들이 많이 다치긴 했지만, 그들은 죽음에 대해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엘프들은 장로를 잃었기에 다시금 무리를 수습해야 했고, 드워프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 추모의 술을 마셨으며,

트롤들은 그들 모두 전사들의 전당으로 갔을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 했을 뿐이었다.

황태자는...원작에서 내가 알던 것처럼, 스칼렛에게 마음을 품은 것이 확실해보였다.

말은 아니라면서, 스칼렛을 감옥 대신 자신의 거처에 두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만 봐도 뻔하지 않은가.

물론 그 요청은 기각되어 스칼렛은 결국 감금되었지만, 황태자의 배려로 사실상 귀족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스칼렛이 그렇게 좋으십니까?”

“내가? 하, 에반. 나는 아무에게나 쉽게 마음을 주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시겠죠.”

황궁에서 내리는 작위를 받기 위해 황도에 오긴 했지만,

마음 같아선 조금이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이제는 곧...아이들도 태어날 테니까.

싸움이 끝나고 어느새 몇 달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 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사실 마베트에 대한 것을 수습하고, 절멸의 잔당을 추격해 모두 죽이는 것에 시간을 꽤나 썼으니.

여름이 된 지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이런 매듭을 지을 수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싶다.

마스터 다음의 경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다.

그랜드 마스터로 하자고 하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그 이름에 대해서는 내가 기각했다.

그랜드 마스터라니,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부를 생각만 떠올리더라도 부끄럽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번에 작위를 받게 되는 소감은?”

“글쎄요. 어차피 프리드라는 가문은 이제 없어지지 않습니까.”

결혼을 하게 되면 나는 성을 바꿀 생각이었다. 에반 프리드가 아니라, 이제 에반 유리스라 불려야겠지.

그리고 아이들은 각각 로벨리아 유리스, 아서 유리스가 될 터였다.

유리스라는 성이 어색한 것도 아니고, 그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이란 아이들에게 작위를 물려줄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그런데 후작이라니...너무한 게 아닙니까? 아무 작위도 없던 일개 기사에게 대뜸 후작이라뇨.”

“공작으로 밀고 나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반발이 너무 커서 말이야. 애초에 3대 가문으로 좁혀진 것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거기서 다른 공작이 나타나 유리스와 세력을 합치는 것을 우려한 거겠지.”

“그렇습니까. 저는 정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데 말이죠.”

정치 같은 것에는 예전부터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내가 지금 권력을 잡으려고 한다면...그런 마음을 먹는 순간 사실상 반역 행위나 다름없어질 테니.

유리스와 북부, 이종족이 나를 지지하는 것 자체는 그리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마베트를 죽일 무력을 지닌 사람이 대륙에 나 한 사람 있는 것도 그렇고.

“뭐,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

“그나저나, 제가 옆 대륙에 가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마물의 왕이라 불리는 무언가가 나타났으니, 굳이 그들을 도울 필요가 있냐는 소리인데. 어차피 거기 가는 이유라 해봐야 신혼 여행아닌가?”

“그렇죠. 그리고 이제 다 해결했다고 듣기도 했으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마베트가 한 번 더 나타나도 이제는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마스터 너머의 경지란 사실상 초인을 아득히 뛰어넘는 그런 것이었으니까.

모습도 조금 젊어진 것 같고, 외모와 골격 또한 이전보다 훨씬 나은 방향으로 변한 뒤였다.

아이린이 폴짝 뛰며 놀랄 정도였으니, 아무래도 밖에서는 조금 더 조심할 필요가 있으리라.

“이제 결혼식은...그래, 가을에 한다고 들었는데.”

“오실 거죠?”

“당연히 가야지. 스칼렛도 갈 거고.”

“안 좋아하신다면서, 어째 행사마다 항상 같이 다니십니다? 소문 듣고는 계신 겁니까? 벌써 사람들은 태자비가 스칼렛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어깨를 흠칫 떤 황태자는, 이윽고 어색하게 웃으며 딴청을 피웠다.

저럴 거면 차라리 빨리 고백을 하지. 어쩌면 나와 아이린의 예전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런 심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연인이 되었다고 했을 때 가장 기뻐한 건 다름 아닌 공작저의 사용인들이었으니까.

...이제는 조금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곁

에서 지켜보는 입장이란, 이렇게나 답답한 것이었으니.

처음 에반 프리드라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도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이었지만, 지금은 사실 덥다는 자각자체가 힘들었으니까.

고작 5년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일 텐데, 너무도 많은 것이 변한 게 아닌가.

“테오라드 경도 은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붙잡으려고 했는데, 기사단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일하고 싶다 하더군.”

“그래도 전하 곁에 있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은퇴를 허락했지. 아니었으면 죽을 때까지 안 보내줬어.”

친분이 생겼던 사람들이 하나둘 제 자리를 떠나는 일이란, 늘 미묘한 감상을 안겨주는 법이었다.

당연하게도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면, 크리스 경의 얼굴이 생각나자 괜스레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지난 토벌전에 자기를 불렀다며 어찌나 투덜거리던지, 로페나에게 휴가를 주어 보내지 않았다면 아마 달래기 힘들었을 터였다.

“크리스 경 생각하나?”

“...그렇게 티가 납니까?”

“뭐, 테오라드 얘기를 하고 고민에 잠기는 거면 무슨 생각하는지 뻔하지. 듣자하니, 로페나 라는 아이를 아예 입양했다고.”

음,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될 거라 생각하지는 못했는데,

크리스 경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도 로페나를 조금 더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설마 입양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말이다. 로페나도 그 말을 듣곤 엄청 기뻐했으니 다행이지만,

역시 그 둘이 붙어있으면 부녀지간 처럼 보였던 게 꼭 내 착각이었던 것 아니었던 것 같다.

“잘 된 일이죠. 크리스 경도 적적하진 않으실 테니까요.”

매일같이 공작저로 찾아오던 크리스 경은 어느 순간부터 그 발걸음이 뜸해지더니,

어느 순간 대뜸 시골로 내려가 살 거라며 입을 열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이란, 스승이고 뭐고 한 대 때려줄까 하는 마음이었지만.

자기가 그렇게 살고 싶다는데 어찌 말리겠는가. 로페나를 데려가지 못한다는 소리에 당황하긴 했으나, 크리스 경은 그래도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다 말했다.

자기가 그렇게 원한다면야. 한 편으론 부러운 일이다.

내 꿈이 크리스 경처럼 그런 한적한 곳에서 집짓고 사는 것이었으니까.

허나 아이린이 유리스의 가주가 될 예정인 만큼, 나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부군으로 유리스에 남아야 하리라.

“그나저나, 이젠 뭐 할 일도 없겠군. 통일은 진즉에 했고, 남은 건 그나마 북방과 남방에 남은 야만족인가?”

“전 안 싸울 겁니다. 황도가 함락될 것 같을 때나 불러주십쇼.”

“...내가 이래 뵈도 마스터인데, 야만족하고 싸울 때 자네를 부를 것 같나? 치사하고 아니꼬와서, 자네를 부를 일은 없을 것 같군.”

“이제 황도를 찾아올 일은...씁. 많겠네요. 아이들 학교가 여기에 있으니까 말이죠.”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파지는 터라,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들이 다닐 아카데미가 황도에 있지 않던가. 물론 유리스에도 하나 있긴 하다만,

명색이 공작가의 아이들인데 황도에 있는 황립 아카데미에 보내야 하지 않을까.

...설마 아이들이 따돌림을 당하진 않겠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이건만, 괜스레 이런 걱정이 떠오르는 게 우스워서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쩌면 주책이 점점 심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다는 이 현실이 적응되지가 않는 탓이 아닐까.

더 이상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도, 그럴만한 적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벌써부터 아이 생각부터 하는 건가. 아이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여자애는 로벨리아, 남자애는 아서. 괜찮지 않습니까?”

“괜찮아 보이는데.”

잠시 고개를 주억거린 황태자는, 이윽고 고개를 들어 이제 완전히 가까워진 황궁을 바라보았다.

슬슬 잡담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는 것일까. 그대로 입을 다물자,

잠시 걸음을 멈춰선 황태자가 갑작스레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도 언젠가는 결혼을 하겠지?”

“갑자기 말입니까?”

“자네와 소가주를 계속 지켜보면서 부러워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많이 배우기도 했지만. 막상 내가 자네 입장이 되니까 뭔가...실감이 나질 않아.”

“아까는 안 좋아한다고 하시더니.”

“곧 있으면 스칼렛에게 있는 모든 혐의가 풀릴 거야. 그렇게 되면 스칼렛은 자유의 몸이 될 거고, 머무를 곳이 없어 아마 황도를 떠나게 될 테지. 하지만 영지도 박살이 나고, 받아줄 가족도 없는 스칼렛에게 돌아갈 곳이 어디 있겠나.”

“챙겨주고 싶다는 겁니까?”

“그런 거지.”

황태자가 하고 있는 것은 꽤나 진지한 고민이라, 나는 조금 생각한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의외로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가 황태자여서가 아닌, 그녀가 스칼렛이어서가 아닌.

입장을 바꿔 아이린과 나의 일이었어도 이렇게 행동했을 테니까.

“데리고 사시죠.”

“뭐?”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이미 고백하셨다면서요. 곁에 있어달라고 말해주셨다면서, 무얼 그리 소극적으로 행동하십니까? 그냥 당당하게 말씀하시죠. 같이 살자고.”

그 말에 눈을 크게 뜬 황태자는, 그 말이 의외로 나쁘지 않았는지 턱을 슬쩍 쓰다듬었다.

어쩌면 이미 그렇게 말하는 걸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따름이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문턱에 발을 얹은 황태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금은 후련한 표정으로.

“...그러지 뭐.”

아이린과 내가 결혼한 뒤에, 어쩌면 머지 않아 황태자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닐까.

원작에도 없던 결혼식이라, 괜히 기대가 되는 마음에 피식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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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 후작이라. 영 어색한 호칭이었다. 처음에 그저 기사 후보생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후작이라니.

이렇게 된 이상 호위 기사로 남아있기도 애매하지 않을까 싶다.

결혼 하는 이상 부군으로 남아있겠지만, 나름 5년간 하고 있던 호위 기사직을 내려놓자니 괜스레 아쉬움이 들어서. 마차 밖을 바라보며 넌지시 시선을 던진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니까.”

황제가 직접 하사해준 마차를 타고 게이트로 진입한 뒤, 막상 유리스에 도착하자 이래저래 민망함이 피어올랐다.

최근 들어 이름이 유명해지긴 했지만, 마베트를 잡고 후작이 되니 시선이 확 끌리는 탓이었다.

사용인이랍시고 사람도 붙고, 나중에는 아이린에게 전부 붙이겠다고 생각하면서 얌전히 마차의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대로 공작저로 가십니까? 영지 한 번 확인은 하셔야 할 텐데 말이죠.”

“됐다. 어차피 나중에 하면 되니까. 그리고 공작저가 아니라 세이렌으로 가지.”

“세이렌이라면...알겠습니다.”

반말을 하는 것도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아이린과 자주 붙어 있어서 그런 건지, 그냥 말을 놓는 것이 훨씬 편하게 느껴졌으니까.

세이렌, 이제 너무도 익숙해진 장소. 몇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늘 먼저 생각나는 장소가 그곳이라.

아마도 오늘 또한 거기서 기다리는 한 사람을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해가 저물며, 다시금 달이 떠오른다.

언제나 세이렌에 올 때면 그랬듯이, 하늘 한 구석에서 빛을 내는 건 늘 같은 빛을 내고 있는 달이었다.

웃는 얼굴처럼 둥글게 휜 초승달, 그 옆에 잔뜩 깔린 별빛. 마차에 내려 호수 위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낀다.

습한 바람, 거기에 섞인 풀 내음 사이로 섞여 들리는 풀벌레 소리.

밟히는 흙은 축축했다. 질척이는 흙길을 걸어, 달이 비추어 반짝이는 호숫가를 향해 나아간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떠올리니 여러 감상이 들었다.

아제스트에게 들었던 예언이란, 어쩌면 이제 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피를 흘렸고, 많은 고난을 겪었다. 허나 그럼에도 결국엔 이어질 운명이라니. 그 말이 딱 맞지 않은가.

“늦었네요.”

“폐하께서 보내주시질 않는 터라.”

이제는 완전히 부푼 배를 쓰다듬는 아이린을 보며 옅게 웃는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위치, 다른 입장, 다른 관계, 그리고 같은 사람.

바람이 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적기에, 참 적절한 바람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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