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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45화 (145/181)

〈 145화 〉 결혼식 (5)

* * *

결혼이라니, 자기 결혼식에 찾아와 대뜸 결혼 소식을 알리는 두 사람을 멍하니 쳐다본 에반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언젠가 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이건 조금 많이 빠르지 않은가?

물론 자신들도 연애한지 1년이 안 되어 결혼하긴 했지만, 임신이라는 특수한 경우가 끼어 빠르게 이루어진 경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에반의 눈빛은 이내 미묘해졌다.

설마...? 두 사람이 동거한다는 소리를 듣긴 했으나,

그래도 황태자가 그렇게 경솔하게 일을 처리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여태껏 수많은 여자를 만나던 그에게 추문 한 번이 없던 걸 보면, 황태자는 그런 점에서 무지하지 않았다.

잠시 입술을 깨물고, 곧이어 한숨을 푹 내쉰 에반이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묻는 질문이 아주 실례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아, 물론 괜찮죠. 에반 씨라면 뭐든지 물어보셔도 돼요!”

“설마, 결혼을 이리 빨리 하시려는 이유가...혹여 아이를 잉태하신 건 아닙니까?”

“흐읍.”

스칼렛이 입을 꾹 다물자, 에반의 눈은 점차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마치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것만 같은 이 태도라면.

에반의 그런 눈을 본 카이셀은 조용히 헛기침을 내뱉었다.

“내가 자네와 같은 경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름 일국의 황태자라는 사람이, 고작 안전일을 헷갈려 아이를 임신시켰으리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왜 이렇게 상세합니까? 제가 그렇게 묻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냥 해본 말이야. 내가 그랬을 리가 없지 않나.”

“그렇다면...축하해드릴 일이군요. 결혼이라니, 국가의 경사입니다.”

황태자의 태도가 조금 미심쩍긴 했지만, 그렇다고 추궁할 수는 없는 터라 에반은 스칼렛을 보며 작게 웃었다.

소설에서도 그저 연인 사이였던 두 사람이 결혼을 한다니. 어찌 축복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겨울에 결혼을 한다니, 이제 가을에 막바지에 들어서고 있었으니 곧 결혼을 한다는 얘기였다.

구태여 그렇게 급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에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이 머리를 싸매고 있는 황태자의 모습이라, 에반은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 그냥 솔직히 말씀해주시죠. 일찍 결혼하신다는 이유가 제가 말한 것과 얼마나 일치합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서로를 열렬히 사랑한 나머지 결혼을 한다는, 그런 이유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정말 그랬다면 원작에서도 결혼을 했으리라. 그렇다면 이 봄과 가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에반의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단 하나말곤 뾰족한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카이셀,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에반 씨에게는 말씀드려도 괜찮잖아요.”

“후우. 이러다가 자네에게 전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날이 올 것 같군. 내 꼴이 말이 아니야.”

이마를 감싸던 손을 떼어낸 카이셀은 스칼렛의 손을 잡았다. 조금의 상처도 나지 않도록 아주 부드럽게, 그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 오는 손을 꼭 쥔 채 에반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걸 보는 에반에겐 그저 헛웃음만 절로 나오는 광경일 뿐이었다.

저 둘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라 하면 너무도 명확하지 않은가.

카이셀이 스스로 상세하게 말해주었던 ‘실수’, 그것이 단지 장난이 아니라...아마도 현실로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딸입니까?”

“아들이라고 하더군.”

“그건 그나마 괜찮군요. 어찌 됐든 황태손이 태어난 거라고 둘러대면 몇몇 사람들은 납득할 테니까요. 그런데, 심한 말 하나만 해도 됩니까?”

“얼마든지, 스칼렛에게 하는 말만 아니라면.”

에반은, 관자놀이를 꾹 누른 채 카이셀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미치셨습니까?”

“...할 말이 없다는 건 인정하지. 내가 조금 경솔했다는 것도.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 하냐고 묻는다면, 후회는 안 하고 있어.”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더 무어라 해야 하는 건지.

그러나 나쁜 일은 아닌 터라, 잠시 쓰게 웃은 에반이 스칼렛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이, 아무래도 속이 후련해 보이는 듯 했다.

허나 결국 축복할 일 아니던가? 황태자의 잘못이 아니라고는 못해도, 결국 두 사람이 사랑했으니 결혼이란 것까지 결정했을 터였다.

그걸 제3자인 자신이 무어라 하는 것도 우스웠고, 이제 와 모든 것을 돌이킬 수도 없었다.

어쩌겠는가, 에반은 이 상황에 대해 체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두 분이 마음이 잘 맞는 듯 하니, 아마도 겨울에 한 번 더 뵐 수 있겠군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아직까지 우리를 제외하곤 자네 하나뿐이야. 그렇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고, 그냥...내 친우로써 먼저 알려주고 싶었네.”

친우라, 그 말에 피식 웃은 에반의 입에서 자그마한 숨이 새어나왔다.

처음 황태자를 만났을 때 품었던 생각은 경계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무려 황태자 본인에게 직접 친우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조금 뭉클한 감정이 피어오르기도,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간질이는 것만 같기도 했다.

놀라긴 했지만,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것은 이 좋은 날 듣기 알맞은 좋은 소식이었다. 아마 아이린도 이 소식을 듣게 된다면 기뻐하리라.

허나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자신을 볼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으니, 에반은 이내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소파에 머리를 기대었다.

결혼식을 위해 꾸민 머리가 헝클어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괜스레 생겨나는 여러 감상에 젖어 몸이 나른했다.

겨울에 결혼식을 한다고 했던가. 신혼여행을 다녀와 공작령을 추스르면 금세 겨울이었다.

눈이 오고, 다시 작년의 1월이 끝나 다시금 1월이 찾아온다니. 이 시간의 변화가 괜스레 새삼스럽기만 해서,

에반은 다 식어버린 찻잔을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

에반과 아이린의 결혼은 제국 내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한 가장 뜨거운 소식 중 하나였다.

알라르조차 봉인에 그쳤던 고룡 마베트를 토벌한 기사, 그리고 그런 기사의 연인이자 3대 가문 중 가장 거대한 세력을 가진 유리스의 소가주.

이전부터 두 사람의 이야기는 유명했건만,

1월에 있었던 붉은 달이 사라진 이래로 두 사람의 유명세란 어쩌면 황제를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자리가 꽉 찼는데 어떡하죠? 오신 순서대로 들여보냈는데, 아직 한참 남았어요!”

“...어쩔 수 없지. 나도 이렇게 많이 올 거라고 생각은 못했는데.”

정원이 가득 차도록 자리를 준비한 것 같은데, 어느새 그 많던 자리를 한가득 채운 사람들의 모습에 에반은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어디서 듣고 이렇게 많이 온 걸까. 그렇다고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닌 터라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무어라 하기도 뭐했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은 카이셀과 스칼렛, 그 옆에 있는 건 아제스트와 메디브의 가주,

카심 백작과 제라드 또한 앉아 있는 걸 확인한 에반이 옅게 웃었다. 크리스도 앉아 있었고,

공작이 있어야할 자리가 비워져 있긴 했지만...그래도 곧 이어 아이린과 함께 들어올 테니까.

“근데, 크리스 경은 왜 앉아 계신 겁니까?”

에반의 말에 크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혀를 찼다.

잘 하면 주례를 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건만, 자신을 향해 원망어린 시선을 보내는 크리스의 모습에 에반은 헛웃음만 흘릴 따름이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이 말을 해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늦게 했네요.”

어느새 키가 훌쩍 자라버린 로페나의 말에 에반은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전에는 허리를 숙여서 쓰다듬어 줘야 했던 것 같은데, 꽤 키가 많이 자라지 않았는가.

로페나의 모습은 이전에 보았던 여동생의 모습과 꽤 많은 것들이 닮아있었다.

행동은 조금 성숙했지만, 자신 또한 여동생이 다 자란 것을 본 적은 없었으니. 아마도 여동생이 잘 컸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페나는 에반이 머리를 쓰다듬자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예전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어서, 그저 입술을 삐죽인 채 툴툴 거릴 뿐이었다.

“언제까지 애 취급하려고 그러세요. 저도 이제 성인인데요.”

“...그러게, 네가 벌써 성인이다.”

“고작 한 살 차이인데. 누가 보면 막 10살은 차이 나는 줄 알겠어요?”

“나한테는 그 정도 차이가 느껴져서 그래. 처음에는 작았잖아.”

참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자주 떠올리는 감상이었지만, 오직 자신과 아이린만이 걸을 수 있는 이 하얀 길 위에 서있으면.

단 두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 이렇게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면, 여러모로 오묘한 감정의 쇄도 속에 젖게 된다.

6년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있을 무언가가 두렵기도 했다.

혹시 고룡 마베트보다도 더한 게 있으면 어쩌나, 만약 자신이 아는 사람 중 누군가가 크게 다치면 어쩌나. 그게 아이린이라면, 자신의 아이들이라면.

“빠­!”

어느새 자리에 앉은 로페나에게 안겨있던 로벨리아가 손을 흔들었다.

방금 아빠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고작 2개월짜리 아이였으니,

제 착각이라 생각한 에반이 조심스럽게 셔츠를 만졌다. 주름진 곳을 펴고, 살짝 떨리는 어깨의 긴장을 풀면서.

꽃잎이 흩뿌려진 새하얀 천이 깔린 길을 걷는다. 옆에 보이는 건 하나같이 익숙한 얼굴들 뿐.

언젠가 같이 전쟁에서 싸웠던 기사들도 있었고, 같이 공작저에서 얼굴을 마주하던 시녀도, 기사도 있었다.

길을 걸을 때마다 보이는 건 여태껏 지나온 시간들이었다.

아이린을 처음 만나고, 호위 기사라는 직책을 얻고, 수정궁에서 처음으로 마음의 편린을 엿들었다.

처음으로 손을 잡고, 처음으로 껴안고,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옛 기억을 떠나보내고, 함께 별을 보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고백하고, 마음을 나누고.

그러다가 결국에, 여기에 선다.

차가운 목재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선단.

그 앞에 서있는 것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 경.

“뭐해, 거기 서있지 말고 자리에나 앉아 있어라.”

“...그래야죠.”

화르륵­! 부모가 없는 에반이었기에, 초에 불을 붙이는 것은 스칼렛과 카이셀이었다.

거대한 촛대 위에 새빨간 불꽃이 일렁이고, 마법으로 어두워진 주변을 살핀 크리스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모두가 앉아있는 것을 확인하곤, 자신에게 주례라는 부담스러운 자리를 맡긴 에반을 슬쩍 흘겨보면서.

“지금부터, 결혼식 개식사가 있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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