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47화 (147/181)

〈 147화 〉 결혼식 (7)

* * *

“음, 크흠.”

황태자가 목을 다듬을 때마다 좌석에 앉아있던 이들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황태자가 축가를 부른다. 잘 부르면 최선을 다해서 반응해주는 것으로 끝날 일이지만, 혹시나 황태자의 노래 실력이 별로라면? 그때 누군가가 웃음을 참지 못한다면?

생각만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일이라, 신분이 그리 높지 않은 기사들은 저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평소 믿지도 않던 신을 찾기 시작했다.

부디 앞에 있을 10분 동안은 웃음을 참을 수 있기를, 그리고 황태자의 노래 실력이 뛰어나기를.

공식 석상에서도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

제국의 황태자가 직접 나선다는 걸 이 자리에서 처음 들은 공작의 동공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이 꼭 새하얀 도화지처럼 물든 것 같아서, 마음 같아선 공작 자신이 황태자 대신 축가를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생각보다 다들 많이 긴장한 것 같은데요.”

아이린의 말에 에반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큰 반응을 보여주는 게 사람들이었으니까.

다들 황태자가 부를 노래를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수하게 황태자를 응원하는 사람이라 하면, 아마 자신들과 스칼렛 뿐이 아닐까.

멍하니 있던 군악대가 나팔을 다시 만지자 카이셀은 조용히 손을 뻗었다.

이제 자신의 차례라는 듯, 조용해진 좌중을 바라보던 카이셀이 천천히. 그 고요 속에서 마침내 자신의 목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만약에...”

목소리가 울려 퍼진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은 팔에 어린 소름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켜쥐었다.

가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전율, 이 고요했던 정원의 정적을 가볍게도 찢어발기는 불협화음이 고막을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소리 뭐야.”

눈을 크게 뜬 스칼렛의 말에 옆에 있던 기사 하나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이린과 에반은 서로의 손을 꼭 쥔 채 고개를 숙였고, 공작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에반을 허공을 바라보았다.

속으로 애써 다른 노래를 떠올리면서.

순간 긴장한 카이셀이 주변을 둘러봤지만, 꽤 괜찮은 주변의 반응에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워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모두가 자신의 노래에 감탄하고 있다고...오로지 자신만의 착각 속에서, 카이셀은 열창을 이어갔다.

훗날 스칼렛만 기억하는 추억 중 하나지만, 스칼렛은 카이셀의 이 노래를 몰래 녹음해 가지고 있었다.

만약 카이셀이 결혼하고 멋대로 행동한다면, 이 노래를 제국 전체에 퍼트리기 위해서.

#

그렇게 축가가 끝나고, 크리스는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떨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웃음을 참느라 입 안에서 피가 흘렀지만...그건 이 식장 모두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이었기에, 아무도 크리스의 불안정한 상태를 탓하지 않았다.

“그으, 네. 흠, 훌륭하신­ 큽. 크흐흑. 황태자 전하의 축가였습니다.”

자리에 앉은 카이셀은 왜 크리스가 흐느끼는 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이내 수고했다는 스칼렛의 말에 그 의문을 깨끗이 지워냈다.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긴 해도, 어쨌든 다들 웃으면서 듣지 않았던가.

노래에 대해 소질이 없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이번에 부른 것은 꽤 잘 부른 모양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카이셀이 이내 편한 마음으로 결혼식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짝짝짝­!

다시금 터져 나온 박수에 크리스는 억지로 입꼬리를 당겼다. 이제 한 바탕 고비를 지났으니, 남은 것은 자신의 주례뿐.

허나 그마저도 자신이 없어서, 처음 이 선단에 섰을 때 느꼈던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너무 긴장하시는 게 아닙니까.”

“크리스, 너무 부담 가지지 말아요. 그냥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을 해도 괜찮으니까.”

“...하아. 알겠습니다.”

아이린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인 크리스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모두 크리스를 향해 시선을 두고 있었다.

손을 마주잡고 있는 아이린과 에반도, 이 결혼식에 하객으로 찾아온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침음을 삼킨 채, 멍하니 그 시선을 느끼던 크리스는 에반과 눈을 마주한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가 두 사람을 만난 건 각기 다른 시기였습니다. 한 사람은 아직 더위라는 단어가 어색할 만큼이나 추웠던 봄이었고, 한 사람은 아직 추위라는 단어가 어색할 만큼 더웠던 가을이었죠.”

아이린을 처음 만났을 무렵, 크리스는 단지 불명예스런 은퇴를 앞둔 중년의 기사였을 뿐이었다.

실력은 괜찮았지만 다른 기사들과 어울리지 못해 기사를 그만두려 했던, 남들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그런 기사.

그런 자신을 찾아낸 공작이나, 자신을 덥썩 데려가겠다던 공작을 믿고 따라간 자신이나 똑같은 사람 아닐까.

그렇게 분에 차고 넘치는 호위 기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만난 아이란,

사람을 많이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그마한 여자 아이였다.

쉽게 누군가를 믿지 못하고, 늘 다른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처음에는 아이를 그렇게 만든 공작에게 무어라 하긴 했으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는 공작에게 계속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언젠가 이 아이가 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의문만을 품을 뿐.

허나 결국 이렇게 됐다. 남을 믿지 못하던 여자 아이는 커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꽤 너그러운 시선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공작이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던 것은, 순전히 아이린이 공작을 용서했기 때문이었으니까.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같이 있었던 입장으로, 솔직히 이렇게 되리라곤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때의 아가씨는 지금보다 겨울이 어울리는 사람이었고, 에반은 겨울보다는 여름이나 봄에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차갑게만 느껴지던 푸른색의 눈동자에 비춰지는 것은 훈풍이었다.

이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잊힐 만큼이나 따듯하고, 또 겨울의 눈마저 녹아내릴 그런 따스함.

그런 아이린의 앞에서 쭈뼛거렸던 에반은 이제 능청스레 웃고 있었다.

아이린에게 장난치고, 그러면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녹색의 눈동자는 항상 부드럽게 휘어있을 따름이었다.

변하지 않을 터였다.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어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수많은 경험을 거쳐도 변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피식 웃고는, 다시 두 사람의 눈을 나란히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허나 이제 이 두 사람만큼 또 잘 어울리는 짝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한 사람은 겨울이라기엔 너무나 따스한 사람이 되었고, 한 사람은 여름이라기엔 다른 한 사람과 너무도 잘 맞지 않습니까?”

그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리자, 지그시 눈을 감은 크리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행복이란 것은 참으로 잡기 어려운 것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고, 서로 사랑을 하게 되어 지금까지 오기에 많은 피를 흘렸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일 겁니다. 절멸을 처치하고, 고룡 마베트와 싸우고, 울고, 피를 흘리고, 다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당사자들은 더 많은 상처를 입었겠죠.”

아이린의 시선이 에반에게 향했다. 크리스의 말에 떠오르는 기억들이란,

아직까지 아이린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허나, 이제 그런 일은 없을 터였다. 에반은 아무렇지 않게 아이린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손이 완전히 얽혀, 깍지가 낀 손이 완전하게 이어졌다.

선선한 바람 속에서도 느껴지는 체온에 괜스레 안심이 되는 것은 왜 일까.

늘 잡는 손이었고, 이제는 이런 행위가 자연스러울 만큼이나 익숙한 행위였는데도.

지금 맞잡은 손에서 전해져오는 감정이란, 지금까지 느꼈던 것과는 꽤 다른 색다른 감정이었다.

“힘들게 잡은 것인 만큼, 두 사람 모두 그것을 꼭 쥐고 있길 바랍니다. 절대 놓지 말고, 평생.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이 늙은이의 작은 바람입니다.”

아이린과 에반이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입꼬리를 흐뭇하게 끌어올린 크리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마법사들의 손이 하늘로 뻗고, 동시에 어두웠던 하늘이 다시금 푸른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뿌려지는 새하얀 꽃잎들, 그리고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오색찬란한 단풍까지.

하늘에 떠있는 태양을 보던 아이린은, 이윽고 하나둘 일어나는 하객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직 한 쪽 손에 깍지를 낀 에반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옆에 있던 에반과 눈을 잠깐 마주친 아이린이 즐겁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분이 좋아보이십니다.”

“어떻게 안 좋겠어요. 다들 우리를 축하해주려고 이렇게 모인 거잖아요. 이제 결혼식도 거의 끝났고, 우리 정말 이제 부부네요?”

“...그렇죠, 전 이제 에반 유리스가 되겠고요.”

에반 유리스, 에반 유리스. 그 이름을 곱씹던 아이린은 이윽고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야 모든 것이 시작이라는 기분이 들지 않는가.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것들은 모두 이 날을 위한 초석일 뿐이었고,

결혼식을 끝내 부부가 된 이 순간부터...비로소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기분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자, 그럼 신부는 부케를 하객들을 향해 던져 주시길 바랍니다!”

크리스의 말에 아이린은 조용히 부케를 손으로 쥐었다.

누구에게 던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국엔 머릿속에 스쳐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릴 뿐이었다.

에반이 목숨을 걸고 구해주었던 여인, 그런 것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긴 했으나.

결국 황태자와 이어져 잘 지내고 있었으니 원망할 이유까지는 없지 않겠는가.

지금은 그저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 지내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에반이 구해준 목숨, 앞으로도 서로 싸우지 말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야 말로 에반에게는 가장 기분 좋을 보답일 테니까.

휙­

하늘을 가르고 날아간 부케는 꽤 오랜 시간동안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여인들은 그것을 잡으려 땅에서 껑충껑충 뛰고, 카이셀의 어깨에 올라탄 스칼렛은 까치발을 든 채 부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소란스러운 와중, 모든 사람이 부케를 잡기 위해 집중하는 그 사이에. 에반은 조용히 아이린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아무래도, 다들 저 부케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걸 해야겠죠.”

공작도, 로페나도, 주례를 맡고 있던 크리스도 부케를 보는 그 잠깐,

서로를 보며 조용히 미소지은 두 사람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이후로 6년, 그 모든 것의 방점을 찍는 순간이자­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

가볍게 맞닿은 입술이 이내 얽혀, 새롭게 열린 미래를 축복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그리고 달콤하게.

“빠아­”

푸른 하늘이 빨갛게, 그리고 노랗게 물들었던 어느 가을날.

두 사람이 누릴 행복이란, 어쩌면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한 것일지도 몰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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