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신혼여행 (2) (악녀호위X로판용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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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정의 속도는 빠르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어쩌면 자신이 아는 일반적인 여객기보다 빠르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피아니스트 시절에는 전용기를 사용했는데, 그 속도와 비슷할 정도로 느껴졌으니. 에반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비공정의 성능에 감탄했다.
하루 만에 대륙을 건넌다는 말은 과연 거짓이 아닌 듯 했다. 이 세계에선 아마도 처음 보는 바다가 흘러가듯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 찰나에 보이는 것은 하늘을 향해 물을 뿜어대는 고래, 어지간한 배보다도 더욱 거대한 고래의 모습을 본 아이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게 고래라는 건가 봐요.”
“처음 보시는 겁니까? 저것보다 훨씬 큰 고래가 많다고 하더군요.”
동화책에서 나오는 고래란 하나같이 괴물처럼 표현되기 마련이었다.
입으로 물을 빨아들이고, 배만큼이나 거대한 지느러미를 휘둘러 파도를 일으키는 괴물.
배를 타는 사람들에겐 재앙과도 같은 존재이지 않던가. 허나 이리 마주한 고래는 재앙처럼 보이지 않았다.
자그마한 지느러미를 드러낸 채, 무리를 지어 헤엄치는 모습,
거기에마치 비공정을 따라 움직이듯 이동하는 걸 본 아이린의 시선은 그 움직임을 쫓기 바빴다.
“돌고래군요. 원래 고래라는 것은 저것보다 훨씬 크기 마련입니다.”
“저것보다 크면 얼마나 큰 거죠? 언뜻 봐도 사람보다 훨씬 큰 것 같은데요.”
아마 한 4~5m 정도 될까. 현대에서 알던 돌고래보다는 훨씬 커 보이긴 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에반은 팔을 활짝 벌린 채 입을 열었다.
“아마 이것보다는 훨씬 클 겁니다. 세이렌에 가져다두면 꽉 차지 않을까요.”
세이렌이 가득 찰 정도라면 어느 정도인 걸까. 잠시 눈을 데구르르 굴리던 아이린이 에반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팔을 벌린 채 왜 가만히 서있는 건지. 에반은 피식 웃고는, 벌린 팔을 허공에 붕 휘두르며 입을 열었다.
“안아달라는 건데요.”
“그럼 그냥 안기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아요?”
에반의 품에 쏙 안긴 아이린이 말하자, 그 가벼운 몸을 끌어안은 에반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가끔은 새로운 표현도 필요한 법이죠.”
“흐음, 난 평범한 것도 그리 질려하는 편은 아닌데요.”
아직 질릴 만큼 무언가를 해본 것도 아니고. 그것 또한 틀린 말은 아니라, 에반은 그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을 뿐이었다.
사실, 그냥 팔을 벌린 김에 그리 말해본 것에 불과했다. 새로운 표현이니 뭐니, 결국 충동적인 행동이었으니까.
우우웅
비공정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푸른빛에서 어느덧 갈색을 더욱 많이 비칠 때쯤,
창문으로 다가간 에반과 아이린은 저 멀리 보이는 로데노프 공작령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리스와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북부란, 그 어떤 대륙을 가더라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까.
허나 그런 것이 오히려 좋지 않은가. 익숙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풍광이란, 어쩌면 자신들이 살던 곳과 하나하나 비교하는 재미도 존재했으니 말이다.
“이제 조금 뒤면 착륙입니다. 슬슬 준비하시죠.”
서서히 가까워지는 땅, 그리고 그 아래에 모인 사람들을 본 아이린이 눈살을 작게 찌푸렸다.
조용히 왔다가 가고 싶었건만, 도대체 이곳으로 오는 걸 어찌 알고 이리 마중까지 나온단 말인가.
불편하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에반과 자신의 이야기가 옆대륙까지 전해질 정도라니. 나중에 로페나에게 알려주겠다고 생각하며,
에반이 건넨 망토를 두른 아이린의 시선이 이내 완전히 가까워진 땅에 향했다.
펄럭이는 깃발엔 이전에 한번 서적에서 보았던 로데노프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그 앞에 휘날리는 다른 깃발은 오르테어의 문양이리라. 두 가문은 결혼으로 맺어진 사이라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사이가 생각보다도 더욱 돈독해 보였다. 프리드라는 가문이 사라져 유리스로 통합되어버린 자신들과는 달리.
비공정의 문이 열리고, 아래를 향해 내려가는 발판을 밟은 아이린의 뺨에 차가운 바람이 닿았다.
익숙한 온도였다. 북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
에반이 아이린의 앞에 서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다가와 손을 건넸다.
“반갑습니다. 휘안 오르테어라고 합니다.”
“에반 유리스입니다.”
“에반 프리드가 아니었습니까? 무언가 착오가 있었나보군요.”
“그 이름도 맞습니다. 다만, 사정이 조금 있는 터라 그런 것뿐입니다.”
에반 유리스라는 그 이름이 어색했다. 이렇게 직접 이름을 말한 적은 결혼한 뒤로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휘안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미청년을 보곤 작게 혀를 내둘렀다.
분명 인간이라면 마나를 품고 있을 텐데, 어찌하여 아무런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단 말인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란 단 하나였다. 마나가 자신이 느끼지 못할 만큼 미약하거나, 아니면 그 격차가 너무 커 파악조차 할 수 없거나.
개인의 힘으로 고룡을 토벌했다고 하던가, 날갯짓만으로 대지가 뒤흔들리는 그런 존재를 홀로 토벌했으니.
어쩌면 이런 격차가 벌어진 것이 당연한 게 아닐까. 휘안은 그것을 그리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애초에 동생과도 꽤 차이가 나는 편이라, 열등감을 가질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런 휘안을 물끄러미 보던 아이린은 기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로데노프가 아닌 동부의 오르테어에서 나온 사람이 여기 있는 건지 궁금한 눈치였다.
“그나저나 오르테어의 사람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요. 여긴 로데노프의 영지가 아닌가요?”
“...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아직 결혼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하기야, 자신들도 이제 막 결혼식이 끝나 여행 온 입장이 아니던가.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휘안은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신혼여행에 이렇게 마중을 나올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 한들 타대륙의 영웅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여행을 온다는데 어찌 허투로 대접할 수 있겠는가.
허나 간섭할 생각이란 추호도 없었으니, 아이린과 눈을 마주친 휘안이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오긴 했으나, 그저 안전하게 영지까지 모시기 위할 뿐입니다. 그보다 더 신경써드리고 싶긴 해도...원하시지 않는 눈치니까요.”
“둘이서 온 여행이니, 가능하면 둘이서만 다니고 싶으니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신혼이 원래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이쪽에서 무례를 범한 게 아닐지 걱정일 따름입니다.”
에반과 휘안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애초에 사이가 틀어져 좋을 것도 없지 않은가.
다만 휘안은 에반의 겉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들리던 소문과는 이래저래 다른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제 동생의 아내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녀는 용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비늘이나, 뿔 같은 것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용혈을 타고 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평범한...사람처럼 보이는 군요.”
잠시 그에 대해 설명하려다가, 에반은 그보다 직접 보여주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눈동자 색만 변하고 끝나는 것이니, 별 문제도 없겠다고 생각한 에반이 마나를 아주 작게 끌어올렸다.
휘안이 그 낌새를 눈치 채고 눈을 가늘게 떴지만, 어느덧 금빛으로 물든 눈동자를 발견하곤 작게 입을 벌릴 뿐이었다.
“이 정도입니다. 제가 용혈로 달라지는 거라면 말입니다.”
에반에게 적의가 없다는 것은 휘안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끌어올린 마나가 이 주변에 퍼진 게 끝이었으니까.
허나 이 전율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주변에 있던 기사들의 경의를 순식간에 이끌어내어,
기사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에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진심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아이린은 에반을 바라보는 그 경의어린 시선을 보며 몰래 속으로 웃었다.
역시 나의 에반이라며, 자꾸만 씰룩이는 입꼬리를 손으로 애써 가릴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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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로데노프 공작령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라 하면, 역시 성채 도시 칼틱스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아딜룬과 휘시스의 이야기 중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곳이 여기였으니, 그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성채를 본 아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확히는, 성문 바로 바깥에 있는 한 표지판을 본 탓이었다.
남자 하나가 눈에 뒤덮여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의 그림이 그려진 표지판에는,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간단한 이름만이 쓰여져 있을 뿐이었다.
“...이건.”
“아딜룬 로데노프에게 내쫓긴 휘시스 오르테어는 이곳에서 용서받을 때까지 기다렸다더군요. 아마 그녀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휘시스는 여기서 죽었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사람을 얼어죽기 직전까지 방치하다니.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리려던 아이린은, 이윽고 에반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곤 헛기침을 내뱉었다.
생각해보면...자신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아가씨라 불렀다고 그리 타박을 했으니, 그것에 대해 원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 아니던가.
아이린의 시선이 닿자, 에반은 싱긋 웃으며 아이린의 손을 붙잡았다.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이는 것 같지 않은가.
“뭐, 저는 그래도 이렇게 죽을 때까지 내몰린 적은 없지 않습니까.”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거예요?”
죽은 적이야 있었지만, 그건 아이린의 탓이 아니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기억을 떠올리는 건지, 아이린의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는 걸 본 에반은 서둘러 외성으로 진입했다.
경비병은 에반의 얼굴을 보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윽고 유리스의 문양을 보곤 뻣뻣한 자세로 경례를 취했다.
외성의 풍경이란 흔히 볼 수 있는 도시의 모습이었다.
북부 특유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은 투박함 또한 있었고, 또한 발전된 마법으로 인해 유리스 보다도 깔끔한 시가의 모습 또한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숙박하기로 한 곳이 호텔이라는 곳이었나요?”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곳과 비슷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유리스에 존재하지 않고, 이 로데노프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호텔이란 것이었다.
투숙객에게 제공하는 여관이나 성이 아닌, 온전히 투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이 호텔이란 건물이었으니.
아이린은 난생 처음 보는 호텔이란 건물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주변 건물과는 완전히 다른 건축 양식, 마치 현대의 호텔을 그대로 가져온 것만 같은 모습에 에반 또한 신기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나타난 것은 빨간 베스트와 하얀 셔츠, 그리고 검은색의 넥타이를 입은 호텔 직원.
현대에서 본 것을 그대로 빼닮은 그것들에 놀라기도 잠시, 키를 받아 스위트룸으로 향한 에반과 아이린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귀족들이 평소에 지내는 것이라 해도 믿을 만큼 깔끔한데다, 탕에서는 여러 향을 내는 입욕제가 구비 되어 있었다.
식사는 아마도 북부 최고의 셰프가 직접 담당한다고 했던가. 짐을 한 곳에 둔 에반은 아이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먼저 씻으러 들어가겠습니다. 잠시 쉬고 계시죠.”
“알았어요. 그럼 나는 짐정리 좀 하고 있을게요.”
옷을 챙긴 에반이 욕실로 사라지자, 에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아이린이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챙겨왔던 짐꾸러미를 들고 텅 빈 방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방, 다시 한 번 문 밖을 확인한 아이린이 가방 속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신혼여행을 위해서 잊지 않고 챙겨온 것.
이전에 수도에서 구매한 것이자, 이 대륙과, 특히 아딜룬 로데노프라는 여인과 그 인연이 매우 깊은 물건.
가방 속에서 나온, 그 양처럼 휘어진 뿔이 달린 머리띠를 보는 아이린의 눈동자에, 순간 묘한 이채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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