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신혼여행 (5) (악녀호위X로판용R)
* * *
셋째 날.
눈 떠보니 하루가 기억 속에서 지워져 있다는 것을 누가 믿어줄까.
달력의 날짜를 확인한 에반은 퀭한 눈가를 비볐다. 도대체...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밤새 한 것도 아니고, 그 이후로 엎어져 잠든 것이 전부였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이미 깔끔하게 정리된 방이었으니, 한숨을 푹 내쉰 에반은 머리를 긁적이며 밖으로 향했다.
“아, 일어났어요?”
앞치마를 두른 아이린의 얼굴은 에반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뽀송뽀송하고, 어느 때보다도 윤택한 피부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태양을 받아 반짝이는 이슬처럼...
‘어떻게?’
흐릿한 기억이었지만, 에반은 분명 아이린이 제 가슴팍을 향해 떨어졌음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그때 같이 잠들어서, 쭉 같이 잤다고 생각했는데. 왜 자신이 이리 피곤한 것에 비해 아이린은 저리 멀쩡하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많았다. 쓰러진 위치가 달랐던 것도,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을 호텔 방이 전부 정리되어 있던 것도. 거기에 마치 방금까지 몸을 쓴 것처럼 피곤한 것까지.
이미 초인이라 하기에도 부족할 만큼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다시 마베트와 붙더라도 확실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고작 밤에 그 몇 번 했다고 이리 지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불성설이었다.
에반의 시선이 아이린에게 향했다. 얇은 네글리제 차림 위에 앞치마를 차려입은 모습이란, 태어나 오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런 날 구태여 분위기를 흐릴지 모를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데구르르 굴러간 눈동자는 이내 제 자리를 찾았다.
‘그냥 넘어가자.’
혹시나 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긴 했지만, 에반은 그 생각을 무시하기로 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아무 상관없지 않은가. 아이린이 직접 차려주는 아침밥인데, 설령 이틀을 잠들었어도 무어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신혼이기에, 인생에 단 한 번 있을 신혼여행이기에. 에반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퀭한 눈을 손으로 슬쩍 가린 채 웃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침부터.”
“한 번 해보려고요. 에반한테 늘 얻어먹기만 했잖아요.”
“보답을 받으려고 한 건 아닌데.”
“이리 오지 말고 앉아 있어요. 내가 다 해줄 테니까.”
아이린이 요리하는 모습을 살피는 에반의 얼굴엔 웃음꽃이 만연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이제는 아내가 된 사람이 아침밥을 차려주겠다고 이렇게 나와 있는데,
그렇게 다시 식탁으로 향하려던 에반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아이린, 저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지금은 그냥 식탁에 앉아있어요. 나 못 믿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이린의 손에 등을 떠밀린 에반은 머뭇거리며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앞에 나란히 놓인 나이프와 포크, 신혼이라며 선물 받았던 꽃무늬가 그려진 접시.
허나 그럼에도 에반의 시선은 다시금 부엌으로 향하는 아이린에게 향해있었다.
‘방금 소금이라고 써진 통...’
아무리 봐도, 그건 설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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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의 장소를 로데노프 공작령이라 한 것은 맞았지만, 동부 또한 이미 가기로 계획한 곳 중 하나였다.
아딜룬 로데노프, 그리고 휘시스 오르테어. 그 두 사람 중 휘시스 오르테어가 태어나 자란 곳,
북부와는 달리 조금 따듯한 기온에 아이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가을의 말미였으니, 완전히 눈으로 뒤덮인 로데노프의 공작령보다 훨씬 가을의 향취를 풍기고 있었다.
유리스도 아직까지 단풍이 피고 있던가. 북부치고 유리스는 꽤 따듯한 곳이었다.
어쩌면 진짜 북부라 할만한 곳을 야만족들이 점거하고 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허나 이 오르테어의 기온 꼭 유리스를 보는 것만 같아서, 작게 웃은 아이린이 이내 에반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 들었다.
“이제 이런 것도 먼저 하시는 군요. 예전에는”
“제작년 이야기잖아요.”
도대체 언제까지 옛날 얘기를 할 건지. 물론 처음에...연애를 하기도 전에 손을 잡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잡지 않으면 허전함이 느껴질 따름이었다.
물건이 제 자리에 있지 않으면 허전한 것처럼, 에반의 손이 있을 자리는 자신의 손이라고.
아이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앞을 바라보았다.
“그때는 19살이고, 지금은 21살인데. 달라질 때도 됐죠.”
“그렇죠, 이제 아이 엄마이기도 하니까.”
에반의 농담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파, 하고 숨을 내뱉으며 하늘을 바라본다.
여유롭지 않은가. 이전처럼 누군가와 싸울 생각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단둘이서 길을 걷기만 하면 될 뿐이었으니까.
손에 들린 바구니에는 에반이 직접 만든 샌드위치가 있었다.
과일을 갈아서 만든 생과일 쥬스, 거기에 햇빛을 가리기 위해 가져온 챙이 넓은 새하얀 모자까지.
아이린은 이런 여유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에반과 만나 겪었던 모든 것이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 아무런 걱정 없이 이렇게 있을 수 있다는 게, 아직까지 꿈만 같이 느껴질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느긋하게 창문 밖을 바라보고, 에반이 차려준 밥을 먹고,
그렇게 방으로 들어가 일을 보다 다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해가 지면 침실에 들어가서 자도 되고, 이따금 에반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자신을 이상하다는 듯 보지 않았다.
완벽하게 분배된 시간 속에서, 빡빡하게 조여진 태엽이 삐걱거리며 돌아가던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여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절멸이나 마베트 같은 위험도 없었다.
그나마 걱정하는 거라면, 에반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과 아이들이 아닐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냥, 로벨리아랑 아서가 크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는 거죠. 아무래도 이제 내가 엄마가 다 됐나 봐요. 여기 와서도 생각이 나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저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아직까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이었지만, 언젠가는 자신들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훌쩍 자라있을 지도 몰랐다.
나중에 자기보다도 훌쩍 커서 다른 남자나 여자를 데려오면 어떡하나
그런 실없는 상상을 하다가도,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오르테어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동산, 커다란 나무 아래 있는 언덕이란 꽤 익숙한 풍경처럼 보였다.
에반이 피아니스트로 살던 때에...동생과 함께 자주 들렸던 곳이자, 이전에 세이렌에서 한 번 보았던 풍경이기도 했으니까.
그 익숙한 풍경이 풍겨오는 향취란, 에반이 묘한 감상에 잠기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양탄자 위에 자리를 잡은 채 바구니를 내려놓자, 바구니의 덮개 위로 단풍잎 하나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저 멀리 노랗게 물든 밀밭이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밀밭이란, 마치 노오란 물결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그것을 한참 바라보기도 잠시, 샌드위치를 작게 베어 삼킨 아이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맛있네요.”
“제가 만들었으니까요. 그리고...아이린은 앞으로 요리 안 해도 괜찮습니다.”
소금대신 설탕이 잔뜩 들어간 스튜는 꽤 인상적이었다.
분명 토마토 스튜인데, 왜 고기 맛이 나는 건지 에반은 아직까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기야, 사람이 너무 완벽해도 인간미가 없지 않은가? 아이린도 요리 하나 정도 못하는 것 뿐일 거라고...에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에 한 번 와본 것만 같은데, 에반도 그렇죠?”
“제가 고백했던 장소이지 않습니까. 잊어버리면 사람이 아니겠죠.”
그 때의 감정이란 아직까지 가슴 한켠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반지를 세공하고,
그것을 아이린에게 일찍 들킬까 항상 품에 쥔 채 생활하고,
결국에 고백해 연인이 되었을 때를. 아마 평생잊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한 순간에 불과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시간이 영원토록 멈춰 평생 그 자리에 있을 줄만 알았는데, 결국엔 이리 결혼까지 하지 않았던가.
가장 행복했으리라 믿었던 시간은 이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 말인즉슨, 앞으로 더 행복할 일들이 많다는 소리가 아닐까.
스윽, 생과일 쥬스 대신 꺼내든 것은 도수 낮은 와인이었다. 취하지 않고,
그 분위기만 느낄 수 있도록 몰래 바구니에 담아온 것. 그걸 흔든 에반이 옅게 미소 짓자, 헛웃음을 흘린 아이린이 에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런 건 언제 준비한 거예요?”
“그냥, 눈에 보이길래 가져왔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와인 하나에도 많은 기억들이 담겨져 있었다.
처음 아이린이 술에 취했을 때, 별을 보며 했던 말들. 창문 사이로 별을 보던 아이린은 더 이상 별을 동경하지 않았다.
이미 스스로가 별보다도 더욱 찬란한 존재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자신 또한, 더 이상 별이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
늘에 떠있는 별에 더 이상 자신을 비춰볼 필요가 없었으니까. 자신도, 별도, 이제 더는 외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느지막이 져가는 노을 사이에 새하얀 달 하나가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둡기에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저 달이, 저 별이. 그리고 이 선선한 바람을 타고 전해져오는 분위기가.
누가 가을을 쓸쓸한 계절이라 했던가. 툭, 와인잔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혔다.
살짝 흐른 와인이 바닥에 흘러내리고, 이내 마주친 두 눈동자가 어둠 사이에서 반짝였다.
“고백했을 때 제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어떻게 그 말을 잊을 수 있을까. 아이린은 그 말에 피식 웃고는, 에반의 어깨에 기댄 채 작게 속삭였다.
“사랑한다면서요.”
“...진부한 표현이긴 한데, 그래도 그 말만한 것이 없는 것 같더군요.”
말재주가 조금 더 뛰어났다면 훨씬 멋지게 고백할 수 있지 않았을까. 텅 빈 와인잔에 별빛이 부딪혀 쪼개졌다.
술기운에 취해 처음으로 입술을 맞댔을 때를 떠올리며, 자신의 어깨에 기댄 아이린을 본 에반이 그대로 머리를 기울였다.
완전히 닿은 머리,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에반과 아이린 사이에 단풍잎 하나가 살랑거리며 떨어졌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요?”
작게 웃고는, 당연하다는 듯 에반은 대답했다.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영원토록 하늘에서 지지 않을 저 별처럼, 에반은 별이 좋았다.
한 때 아이린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에반의 별이 아이린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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