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신혼여행 (6) (악녀호위X로판용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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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지막날이 되어서까지, 에반과 아이린은 결국 아딜룬과 휘시스를 만날 수 없었다.
만났다면 좋았겠지만, 자신들이 신혼인 만큼 그들 또한 바쁘지 않겠는가.
허나 신혼여행이란 원래의 목적만큼은 확실하게 이루고 싶어서, 에반은 평소보다도 조금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찌뿌둥한 몸을 쭉 편 채, 허공을 응시하던 눈이 이내 가늘어진다. 아직 새벽녘의 빛이 어스름하게 퍼진 시간.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떠올리는 것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혼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여러모로 고민이 되긴 했지만, 에반은 이내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머리를 휘휘 저었다.
말이 신혼여행이지, 사실은 그저 여행에 불과하지 않은가. 한 번 했던 프로포즈를 다시 할 수도 없는 터라,
둘이서 이 여행에서 찾을 의미란 사실상 조금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애들도 보고 싶고.”
벌써 일주일, 고작이라 할 수도 있는 그 시간동안 아이들을 보지 못했다.
금방 지나갈 시간이라 생각했건만, 아이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허전한 기분이었다.
아이린 또한 그건 마찬가지인 건지, 날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걱정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마무리는 깔끔하게 지어야 하리라. 에반은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 아이린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깨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 날인 만큼, 인상 깊은 하루를 보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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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반갑습니다, 길테온 오르테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아이린 유리스입니다. 헌데, 저희를 무슨 까닭으로 만나고자 한 건지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아이린이 묻자, 길테온은 차려진 식사들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앉으라는 그 손짓에 에반과 아이린이 나란히 앉은 뒤, 그 모습을 바라본 길테온이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귀한 손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진즉에 초대해드렸어야 했는데, 이래저래 바쁜 터라 이제야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타대륙의 이야기가 흔치 않은 이곳에선, 두 분의 인기가 제법 뛰어난 편이란 걸 알고 계십니까?”
에반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자신들을 알아보던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
에반과 아이린은 이 곳이 유리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품을 정도였다.
아무리 동화책으로까지 나온 이야기라지만, 그 유명세가 꽤 상당하지 않은가.
아이린 또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니, 이윽고 너털웃음을 지은 길테온이 말을 이어갔다.
“제 아들 또한 여러분과 비슷한 이야기를 지닌 터라, 아무래도 한 번 직접 뵙고 싶었습니다.마침 신혼여행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저런 것을 묻고 싶기도 하고, 아무래도 일찍 만나셨으니 제 아들에게 조언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무언가 조언을 할 만큼 많은 것을 알진 못합니다. 그저 마음이 맞아 만난 것에 불과하니까요.”
아딜룬과 휘시스, 그리고 에반과 아이린. 워낙 유명한 이야기인 만큼, 두 연인들의 이야기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은 호사가들에게 흔하디 흔한 취미일 따름이었다.
호위기사와 공녀에 불과했던 아이린과 에반의 이야기, 그리고 약혼한 상태였으나 사이가 나쁘다 못해 최악이었던 아딜룬과 휘시스.
두 연인들이 만나 사랑을 나누어 결국 이루어진 것까지엔 꽤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길테온은 타대륙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두 사람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지니고 있었다.
아딜룬과 휘시스가 공식적으로 사랑을 나눈 것은 고작 몇 달에 불과했으니,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록 만나왔던 두 사람이라면 앞으로의 일에 대해 조금 조언을 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갓 결혼한 아들을 둔 길테온은, 비슷한 관계를 지닌 이 두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지에 대해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오르테어의 영주가 부르기에 무슨 일인가 했는데, 에반과 아이린은 눈을 한 차례 마주치곤 이내 동시에 살짝 웃었다.
혹여 일주일간 무슨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닐까 걱정했건만, 막상 만난 뒤에 묻는 것은 어떻게 부부가 됐는지에 대한 아주 조심스러운 질문들뿐이었다.
“몇 살 때 처음으로 만나신 겁니까?”
“제가 유리스에 온 건 10살이었지만...아마도 15살 때 처음 만난 걸로 기억합니다. 그 때 기사 견습생이었으니까요, 아마도.”
“그때 처음 만난 거 맞아요. 내 기억에도 에반을 처음 본 건 그때였으니까.”
아무리 옛 기억을 좋게 말해 추억이라 한다지만, 썩 좋은 기억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반이 아이린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아이린은 에반을 꽤 싫어하고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탐탁치않게 여겼을 뿐이지만, 에반은 자신이 미움 받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아이린은 저를 미워하고 있었죠. 그렇죠?”
“...내가 언제요? 나는 에반 미워한 적 없어요. 그냥...조금 피했던 것뿐이죠.”
미워했다니, 하늘에 맹세코. 아이린은 에반을 미워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야 어색한데다,
행동도 어벙한 것 같아 조금 피했을 뿐이었다. 남들과 같다고, 지금에야 친근한 척 하지만 나중에는 남들처럼 등을 돌릴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허나 마음을 연 뒤로는 일부러 잘 대해줬는데, 미워했다니.
아이린이 눈살을 찌푸리자, 에반은 슬쩍 웃으며 아이린의 입가에 묻은 기름을 살짝 닦아내었다.
“칠칠맞으신 건 여전하시군요. 예전에도 책상에서 그대로 주무시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적 없네요.”
쌀쌀맞은 반응이었지만, 입가에 닿은 손가락을 느낀 아이린이 이내 뺨을 매만지며 얼굴을 붉혔다.
허락도 안 했는데 대뜸 그렇게 손을 내밀면 어떡하란 건지.
사람이 보는 데도 과감하게 행동하는 것이 영 익숙하지 않아서, 헛기침을 내뱉은 아이린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에반도 내 욕 많이 했잖아요. 로페나랑 내 얘기하다가 걸렸으면서.”
“...제가 그랬습니까?”
“내가 그 때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알아요? 에반만 아니었으면 바로 내쳤어요.”
“그러는 아이린이야 말로 저 몰래 웃는 연습하고 있었잖습니까. 거울 보면서.”
“어, 언제요?”
이어지는 폭로전을 멍하니 지켜보던 길테온은, 이어 헛웃음을 흘린 채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신혼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단순히 오랫동안 알고 지낸 탓에 그런 건지. 눈만 마주쳐도 꿀이 떨어지기보다는, 마치 친구 사이 같지 않은가.
휘시스와 아딜룬은 아직까지 서로에게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아직 한창 그럴 때이긴 했지만,
두 사람과는 달리 훨씬 편해 보이는 아이린과 에반의 모습은 길테온에게 조금 새롭게 느껴졌다.
“두 분은...사이가 매우 좋으신 것 같습니다.”
한참 예전 일을 얘기하다가도, 길테온의 말을 들은 에반과 아이린은 이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옛날 얘기를 할 때마다 으레 이렇게 말다툼을 벌이곤 했으니, 이젠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어느새 익숙해진지 오래이지 않은가.
그렇게 한참 웃던 에반이 입을 다물자, 길테온을 바라본 아이린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가끔 이렇게 대화에 빠지곤 해서, 다른 분이 계시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 아들도 나중에 이렇게 지냈으면 하니까요.”
아무리 달콤한 사랑을 하던 연인들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 감정에 무뎌지기 마련이었다.
괜히 부부들이 나중에 불륜을 하는 일이 생기겠는가. 물론 모든 이들이 그럴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특히 이 두 사람이라면 그런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연인보다도 더욱 친근하게 지내는 이런 모습은 꽤 인상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쌍둥이라고요.”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죠. 아들은 아서, 딸은 로벨리아.”
그 말을 하자 괜스레 아이 생각이 나서, 에반과 아이린은 이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신혼여행이 처음이야 즐거웠지, 막상 이리 멀리 나오니 자연스레 아이들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그런 낌새를 알아챈 길테온은 조용히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막바지에 다다른 식사 자리,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 위해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식사는 이만 마쳐야 할 것 같군요. 오늘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선 더 함께 하고 싶지만...두 분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좋을 테니까요.”
“배려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의아해하면서도, 아이린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활짝 웃은 길테온이 에반과 아이린을 슬쩍 보며 물었다.
“만나시고, 결혼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은...행복하십니까?”
사랑을 하는 사이라고 해도 결혼 이후에 뜻이 안 맞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자신의 아들인 휘시스와 아딜룬 또한 그렇지 않을까,
그런 두려움에 물어본 질문이었으니. 그 질문을 들은 에반은 살짝 웃음을 흘린 채 흔쾌히 대답했다.
“당연히 행복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행복할 겁니다. 너무 간단한 질문이라, 이게 답이 되었을지 모르겠군요.”
“...충분합니다. 진심으로요.”
에반의 대답에 아이린이 싱긋 웃었다. 너무도 간단한 대답이라 그리 대답했을 뿐이지만,
공교롭게도 아이린이 하려던 대답과 똑같았으니까.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으라면 아마 지금이 아닐까.
에반이나 아이린이나, 지금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툭, 하고 부딪히던 손등에 손가락이 꼼지락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였더라, 아마도 카심 백작의 영지에서 이런 적이 있던 것 같지 않은가.
동시에 똑같은 기억을 떠올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그때처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잡은 것이 아닌,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식탁에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길테온은 눈에 담았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휘시스 또한, 저런 부부 사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진심으로 바랐다.
언제까지,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영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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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우웅
해가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비공정에 탑승할 수 있었다. 로데노프와 오르테어 두 곳을 전부 둘러보고,
이 대륙에 대한 모든 미련을 해결한 뒤에 탄 것이니. 생각보다 늦은 시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인생에 단 한 번 있을 신혼여행이란 시간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서,
아이린은 에반의 어깨에 기댄 채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가을인 유리스와는 달리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로데노프 공작령,
비록 아딜룬과 휘시스라는 연인들을 만나진 못했으나...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름 특별한 잠자리를 가지기도 했고, 또한 세이렌에서 보았던 정경을 직접 눈으로 담기도 했으니까.
저무는 노을에 물든 바다는 샛노란 색을 띠고 있었다. 이제 조금 뒤면 달라지는 날짜,
하루종일 돌아다닌 탓에 조금 피곤한 건지. 몽롱한 정신에 아이린은 눈앞이 조금 흐릿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피곤하네요.”
“집으로 돌아가면 조금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야죠. 에반도 쉬어요. 어차피 같이 자긴 하지만.”
집이라는 말이 에반에겐 아직 어색했다. 집, 어디론가 떠났다가 다시금 돌아올 집.
아이들이 있고, 친분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 존재했다. 한 때는 이 세상이 그저 소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그래도 뭐, 상관없지.’
길테온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에반은 지금 이 순간이 삶의 그 어떤 순간보다도 행복하게만 느껴졌다.
행복했고, 앞으로도 행복할 터. 어느새 쓸데없는 상념을 지운 에반의 눈앞에 어둡게 물든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희끄무레한 달이 바다에 비쳐,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쏟아지는 별빛들.
새근거리는 숨소리는 그 풍경 속의 음악과도 같았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 하기에 소박했고,
가장 찬란한 별빛이라 하기엔 어두운 풍경이었다. 허나 이런 소박한 풍경이 좋아서, 에반은 아이린의 머리에 가볍게 제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윽고 어두워지는 시야.
집으로 간다는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래서 일까, 에반에게 집이란 단어는...이제 그렇게 어색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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