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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57화 (157/181)

〈 157화 〉 8살 (4)

* * *

레비와 아서가 만난 지 한 달, 다시 두 달이 흘렀을 때. 아서와 레비는 꽤 친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애초에 별관으로 빠져나와 하는 것이라 해봤자 훈련뿐이었으니, 늘상 검을 맞대다 지쳐 쓰러지는 탓에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승패를 따진다면 아마 확률은 반반 정도 될까.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승리를 차지하는 쪽은 아서였다.

처음에는 처참하게 패했지만, 점차 레비가 휘두르는 검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이 차이는 무시할 수 없었는지, 어느 순간 반반으로 고정된 승률은 쭉 유지되고 있었다.

“아서...님, 그만 할까요?”

“난 아직 할 만 한데. 그리고 말 편하게 하라고 했잖아. 언제까지 그럴 건데.”

“...알았어, 내가 힘들어서 그래. 나는 체력 약한 거 너도 알잖아.”

지친 듯, 숨을 헐떡이는 레비의 모습을 본 아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은 자신과는 체력이 다를 수밖에 없었으니까.

레비가 저리 말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었다.

아서가 자리에 앉자,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낸 레비가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힘들어?”

“응, 체력을 더 길러야 하는데...한 번에 확 나아지는 게 아니니까.”

평민인 레비는 어릴 때 검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다만 크리스의 눈에 띠어 시작하게 됐을 뿐,

하여 기초적인 것에서 아서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타고난 재능이 있어 따라가곤 있었지만, 기사 훈련을 정식으로 받은 아서와 실력이 벌어지는 게 당연한 것이다.

아서 또한 그런 점을 알고 있는 터라, 요즘 들어 계속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차였다.

크리스 또한 이제 은퇴한지 시간이 꽤 흐른 만큼, 유리스의 기사들만큼 제대로 훈련을 시켜주기엔 여러모로 문제점이 있었다.

체력을 기를 목적이라면 이곳보다 북부의 험지에서 기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두 달이라는 시간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카일이 진심으로 변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게 충분한 시간이었고,

로벨리아가 카일에 대해 조금 다르게 생각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아서가 레비와 친해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지 않은가.

아서가 레비를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 ‘아깝다’라는 생각이었다.

레비가 만약 평민이 아닌 어릴 때부터 자신처럼 귀족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괜찮은 실력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주제넘은 생각일지도 몰랐지만, 아서는 레비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음, 누나.”

“...왜, 나 힘들어.”

“유리스로 올래?”

그 말에 레비의 눈이 커지자, 아서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이런 말을 꺼내면 기분 나빠할까 조심했는데, 대련을 계속할수록 유리스로 오면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로페나 누나도 평민이었다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 않았던가.

엄마가 데려왔던 로페나처럼, 자신 또한 레비를 데려와 기사로 키우고 싶었다.

정이 든 것도 있고, 허나 이건 정 보다는...레비라는 사람이 기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다.

“하기 싫으면 거절해도 괜찮아. 그냥, 누나가 계속 기사가 하고 싶다고 했잖아. 아카데미에선 기사가 되기 힘들어. 누나도 알지?”

“...알지.”

황립 아카데미, 애초에 레비는 이 아카데미의 학생조차 아니었다.

그저 크리스가 데려와 별관 출입을 허락했을 뿐,

크리스가 없을 때는 남들의 눈치를 보며 몰래 숨어있던 것이 아서 덕분에 편해진 것이었으니까.

유리스라는 말에 혹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레비는 그것에 대한 대답을 망설였다.

...평민이라는 신분은, 생각보다 많은 제약이 따랐다.

애초에 3대 가문에 속하는 유리스의 자제와 어울리는 것도 꽤 부담스럽지 않던가. 아서는 모르고 있지만,

단지 가까이 한다는 이유만으로 레비를 욕하는 사람들은 늘 존재했다.

최근 들어 정도가 더 심해졌고, 그런데 자신이 만약 유리스로 간다면 혹여 폐가 되는 게 아닐까.

“조금...생각해봐도 괜찮을까? 엄마한테도 물어봐야 하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음...”

잠시 머뭇거리던 아서는, 이윽고 뺨을 쓸어내리며 조용히 웃었다.

어쩌면 당연한 말인데, 왜 이렇게 민망한 건지. 밀려오는 민망함을 이겨낸 아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린 친구잖아.”

친구, 그 말이 왜 이렇게 어색하게 들리는 건지. 레비는 피식 웃으면서도 착잡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과연 자신이 이 제안을 승낙할 수 있을 지. 레비는, 아서에게 고맙다고 할 자신이 없었다.

#

어느새 여름이 찾아와, 분홍색으로 물들었던 벚나무는 금세 녹음으로 물들기 마련이었다.

나비 대신 날아다니는 꿀벌들이 꽃을 찾아 나서고,

아카데미 한쪽에 있는 정원은 어느덧 각양색색의 꽃으로 물들어 학생들이 즐비했다.

“요즘 어때? 친구 생겼다면서.”

로벨리아의 말에 아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 기사들을 따라다니느라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이 레비 하나가 아니던가.

“레비라고, 나보다 한 살 많아.”

“유리스로 오라고 했다면서, 그건 어떻게 됐어? 오겠대?”

“...아니, 아직 대답이 없어.”

왜 아직까지 대답을 안 하는 건지 알 겨를이 없어서, 아서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유라도 시원하게 말해준다면 모를까, 나중에 대답하겠다면서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 말 없지 않은가.

오기 싫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설마 부모님이 허락해주시지 않은 걸까.

“온다고 구박할 생각은 없는데.”

“구박하면 로페나 씨가 널 혼내러 달려올 걸.”

어흥, 하면 소리를 낸 로벨리아가 팔을 벌렸다. 아서는 그걸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 다시금 생각에 빠져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별관에 오는 것도 뜸하고, 어째 자신을 피하는 것 같지 않은가.

저번에 너무 거칠게 대련한 탓인가, 허나 그만큼 많이 맞았는데.

애초에 레비가 그런 이유로 자신을 피할 것 같지는 않아서,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레비의 행동에 푹 하고 한숨을 내뱉는다.

“모르겠다. 나중에는 말해주겠지. 누나는 좀 어때, 카일 말이야.”

“걔 이상해. 나한테 고백도 안 해. 벌써 세달 째라고.”

카일을 떠올린 로벨리아는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말도 안 걸고,

자신을 볼 때마다 반응을 보이는 건 맞는데. 이전과는 달리 훨씬 반응이 얌전해졌다.

그저 잠시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휙 돌리는 게 전부였으니. 황태자한테 엄청 혼났나 싶어 물었지만,

카이셀은 그저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아빠는 다행이라고 하는데, 나는 뭔가 있을 거라 생각해.”

“걔 성격에 세달 씩이나 뭔가를 꾹 참고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아니, 고백을 안 하니까 괜히 이상하잖아. 이상해!”

전에는 고백 받는 거 싫다더니, 이제는 고백을 안 하니 이상하다고 할 줄이야.

도대체 로벨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다시 시선을 돌린 아서의 눈이 순간 가늘게 뜨였다.

물처럼 푸른색을 지닌 머리카락, 혼자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는 레비를 발견한 아서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저 사람이야. 레비, 내 친구.”“여자였어?”

“내가 누나라고 몇 번을 말해, 이 빡대가리야.”

“네가 언제 여자라고 말했어, 그리고 내가 왜 빡대가리야. 너 나보다 공부도 못 하잖아.”

“조용히 해. 지금 레비 보고 있잖아.”

왜 저기서 혼자 있는 건지는 몰라도,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려던 아서의 발걸음이 순간 멈춰섰다.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히 레비를 향해 쏟아지는 것이었으니까.

“야, 레비. 네가 레비야?”

아서와 로벨리아는 그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얇은 탓에 몸을 숨기기도 힘들었지만, 몸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숨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상황을 지켜보자, 레비를 향해 다가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가슴팍에 있는 문양은 분명 귀족의 표식이었다.

아마도 백작가 정도 될까, 아서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는 친구끼리 만난 것이라면 모를까, 레비를 향해 다가가는 두 사람의 얼굴에 서린 건 분명 비아냥거림이지 않은가.

괜스레 불안해서, 로벨리아가 옷깃을 당김에도 아서는 레비를 향해 시선을 떼지 않았다.

레비의 표정은 누가 보더라도 어두워보였다.

무언가를 불안해하는 듯, 주변을 힐끔 살피는 시선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처럼 보이진 않았다.

잠시 제게 다가온 이들을 바라본 레비는, 이윽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저한테 무슨 볼일이...?”

“너한테 볼일이라 하면 하나밖에 없잖아. 너,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 말에 칸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최근 들어 영애들 사이에서 이래저래 불만이 있지 않은가.

별관에 있는 아서 유리스에게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평민 하나가 있다는 이야기.

하여 이렇게 그에 대해 따지러 왔더니, 이렇게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유리스로 오지 않겠냐는 제안마저 받았다는 소문 또한 있는 터라,

평소 아서에게 관심이 있던 영애들은 모두 레비를 싫어하는 편이었다.

정확히는 증오하는 편이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피식 웃은 칸나는 조용히 레비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몰락했던 귀족 가문이라면 몰라도, 부모 없는 평민이 어찌 공작을 상대로 꼬리를 칠 생각을 했는지.

여전히 자신을 가만히 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칸나는 미간을 일그러트린 채 크게 소리쳤다.

“뭘 잘했다고 그렇게 봐, 네가 맨날 아서님한테 들러붙는 바람에 아서님이 얼마나 귀찮아하시는지 알아? 너 같은 고아가 자꾸 그렇게 다니니까, 아서님의 애꿎은 평판만 깎이고 있다고. 정말 모르는 거야?”

“그, 그게 정말인가요?”

그 말에 레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혹시나 하고 걱정했지만, 그게 정말 사실이었을 줄이야.

아서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레비는 계속 신분의 격차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은 평민이고, 아서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귀족가문의 자제.

친하게 지내고 싶더라도, 결국엔 신분이라는 것이 가로막기 마련이지 않은가.

레비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칸나는 훗 하고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이야. 네 속셈을 우리가 모를 줄 알아? 불쌍한 척 다가가서, 나중에 기사가 되면 모르는 척 할 생각이잖아. 아니야?”

“그런 건 정말 아니­”

“뭐가 아니야. 진짜 웃겨. 애초에 평민이 황립 아카데미에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크리스 경만 아니었으면 이 근처에 오지도 못했을 거면서. 너는­”

그렇게 칸나가 말하던 도중, 레비는 칸나의 뒤로 나타난 누군가를 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익숙한 얼굴, 평소와는 달리 무척이나 차가운 눈빛을 띤 아서는. 칸나의 어깨를 잡은 채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누가 그래.”

입가에서 흘러나온 것은 서늘한 음성이었다. 한때 아이린이 그랬던 것처럼,

조금의 감정조차 담기지 않은 시선이 칸나의 폐부를 꿰뚫었다.

순간 계절이 겨울이 아닌가 착각할 만큼, 아서의 몸에서 새어나온 마나가 주변의 온도를 끊임없이 낮추고 있었다.

“누가 그래, 내가 레비를 귀찮아 한다고.”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리고 자꾸 고아, 고아 그러지 마.”

칸나의 이마에 목검을 툭, 가져다 댄 아서가 이내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마도 에반이 보았더라면 아이린과 닮았다고 할 만큼 차가운 그 미소에, 칸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네가 뭔데 레비한테 그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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