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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59화 (159/181)

〈 159화 〉 분홍 새싹이 피어날 나이 (1)

* * *

유리스는 제국의 방패로 불리던 가문이었지만, 로만이 무너진 뒤로는 검의 역할 또한 겸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에반이 있는 이상, 다른 어떤 곳이 검의 칭호를 받더라도 어색할 테니까.

애초에 제국의 유일한 위협이 그나마 북부의 야만족인 상황이었다.

야만족의 남진을 막는 데에 유리스의 역할이 필수적인 지금,

에반이 살고 있는 유리스야 말로 검과 방패 모두의 조건을 충족하는 유일한 가문이었다.

아이린과 결혼한 뒤 에반이 주력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기사단의 육성이었다.

한때 크리스가 가장 강한 기사였을 만큼 낙후된 것이 기사들이었으니,

이제는 그 평균적인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게 에반의 생각이었다.

마스터들끼리의 싸움만 성사되더라도 익스퍼트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고,

게다가 마스터가 셋이 넘어가는 유례없는 황금기였다.

평균적인 수준의 상승은 당연히 따라와야 하지 않을까.

“조금 더 빠르게 움직여라!”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감으로 해왔던 만큼 가르치는 것에 익숙하진 않았지만,

에반은 그래도 나름 열심히 기사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제 기사단 하나는 꽤 괜찮은 수준이라 할만 했고, 익스퍼트의 기사들을 3천 명 정도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까.

8년이란 시간은 황실과 유리스 모두 기사를 다시금 양성하는 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절멸과의 싸움으로 잃었던 전력을 복구하고, 이전보다 조금 더 수준 높은 기사들을 만들어낸 에반은 더 이상 싸움의 일선에 나서지 않았다.

애초에 에반이 기사를 키우겠다고 나선 이유는, 조금 더 가정에 집중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이제 제국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일일이 에반이 나설 만큼 약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섰던 이유도 절멸로 인한 혼란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지 않던가.

그렇게 유리스가 안정되어, 유리스의 기사만을 한가로이 키우는 것이 에반의 업무 전반이었다.

아이들이 커가는 걸 지켜보는 일은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이었고, 8년 동안 아이린과 말다툼 한 번 해본 적 없었다.

그렇게 오래오래...아무 걱정 없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아, 안녕하세요.”

에반은 아서와 함께 나타난 여자 아이를 보고 순간 하던 행동 그대로 멈춰섰다.

상황을 파악하기보다 앞서 눈에 띤 것은, 아서를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다는 점이었다.

에반은 둔한 편이 아니었고, 자신의 앞에서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 여자 아이가...

아서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 반갑구나. 그런데, 아서 친구니?”

“예? 아, 네! 아서 친구...에요. 이름은 레비고요.”

“뭘 그렇게 긴장해. 아빠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아서는 레비를 제 뒤로 물러나게 한 뒤 에반을 바라보았다. 얼떨떨한 표정을 보아 꽤나 놀란 것 같았지만, 아서는 이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아빠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요.”

“부탁할 거라니, 너한테 고백이라도 한 거냐?”

“그, 그럴리가요! 아직 고백까지는...!”

레비가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이내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곤 고개를 푹 숙였다.

에반은 그 모습에 잠시 쓰게 웃었다.

아이들이라 해봐야고작해야 8살인데, 벌써부터 제 짝을 하나씩 찾아오다니.

자신도 아이린을 15살부터 만나긴 했지만, 제대로 교제한 것은 19살이 아니던가.

에반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레비가 눈치를 힐끔 살피자, 에반은 괜찮다며 살짝 웃어주었다.

허나 그럼에도 레비가 불안해하는 기색이 사라지지 않아서, 아서는 레비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옅게 미소지었다.

“잠깐 나가 있어도 괜찮아. 아빠랑 내가 얘기할 테니까.”

“아, 응!”

에반이 웃어줄 때와는 달리 순식간에 표정이 풀어진 레비는 이내 아서를 힐끔 살피곤 밖으로 향했다.

그렇게 방 안에 단 둘만이 남자, 에반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고백이 아니면, 여자애는 왜 데려온 건지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나는 아빠처럼 인기가 많은 편이 아니라, 아마 레비도 그냥 친구로 생각할 걸요. 누나처럼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 하지 마세요.”

오해? 오해라기엔, 레비라는 아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던 것 같은데.

허나 에반은 그것을 구태여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서가 꽤 둔감하단 것은 잘 알고 있었으니,

그런 것을 입 밖으로 꺼내 레비의 마음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걔가 실력이 괜찮거든요. 저랑 반반. 정확하게 따지면 제가 한 6이고 레비 누나가 4 정도?”

“누나야?”

“네, 저보다 한살 많거든요. 그건 그렇고, 레비 누나가 실력이 괜찮아요.그런데 평민이라서...아마 기사가 되기 힘들지도 몰라요. 아니, 아마 힘들 거예요. 제국이 그렇잖아요. 평민 출신 기사라 해봤자 몇 십 년에 한 번 나온다는 거.”

많은 것들이 변했다곤 하지만, 평민과 귀족 간의 격차는 여전했다.

애초에 황제의 권력이 가장 강력한 곳이 제국일진데, 하물며 귀족과 평민의 차이는 어떠하겠는가.

이미 대륙 전체가 제국인 만큼, 귀족들의 수가 불어나는 것도 하나의 사회적 문제였다.

전란마저 모두 끝난 지금, 평민의 출세가 말이나 될까.

에반 또한 그런 것을 모르는 건 아니라, 레비의 문제를 조금 진지하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허나 아서의 말만 듣고 기사로 만들어주기엔, 아무리 자신이어도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필요한 건 실력의 검증, 에반이 그에 대해 얘기하자 아서는 자신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내가 직접 실력을 봐도 괜찮겠지?”

“...아빠가 직접은 좀.”

“그 편이 인상 깊을 테니까. 사람들이 레비라는 아이의 실력을 확인하는 데에도 괜찮을 테고.”

물론 전심전력을 사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아무래도 레비가 평민이다 보니 조금 과격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에반의 옷깃이라도 스친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사들이 인정하기 쉬울 테니까.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결국 평민이었다. 현대 사회를 경험해본 에반이 생각하기에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만큼 당장은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원한다면 아이린과 얘기해서 방법을 찾아보마.”

에반이 아서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달래자, 아서는 어깨를 으쓱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찮아요. 그것말고는 레비 누나가 기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아마 누나도...이해할 거예요. 그리고 통과할 거고요.”

아이린을 빼닮은 눈동자에 비친 것은 신뢰인 터라, 에반은 흐뭇하게 웃으며 탁자 위에 놓은 쿠키를 건넸다.

아서는 초코칩이 박힌 쿠키를 받아들어 이내 반으로 쪼개 하나를 자신이 가졌다.

나머지 반쪽은 누구의 것일까. 그의 대한 대답을 알아내기 참 쉬워서.

에반은 어딘가를 향해 사라지는 아서의 뒷모습에 슬쩍 미소지었다.

“벌써 저렇게 컸어.”

크리스가 자신을 볼 때마다 왜 이리 컸냐고 말했던 그 마음이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잠시 시야에서 놓치면 사라져 훌쩍 성장해있으니, 그 흘러가는 시원을 책망하지 못해 그 사람에게 푸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28살, 곧 있으면 서른을 바라보는 에반은 여전히 젊었다.

마나에 있어 한계를 부순 만큼 수명도 남들보다 길었으니, 다만 걱정하는 것은 아이들의 성장세였다.

어느 순간 어른이 된 아이들이 결혼하겠다고 하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공작이 그리 극성을 부린 것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만 같았다.

“로벨리아가 올 때가 됐는데.”

시계를 살피던 에반은 저 홀로 중얼거렸다. 아서가 이 방에 찾아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

로벨리아가 오는 일은 꽤나 자주 있었다. 매일 같이 오는 터라, 늘 그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건만. 왜 오늘은 이렇게 늦게 오는 건지.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자,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에반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올 로벨리아를 안아들 준비를 마친 에반은, 이윽고 문을 향해 슬쩍 팔을 벌렸다.

“...아빠?”

허나 로벨리아는 평소와 달리 에반의 품에 안기지 않았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에반은 즉시 표정을 굳힌 채 로벨리아를 바라보았다.

우물쭈물 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로벨리아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에반이 입을 열었다.

“왜,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 있었어? 카일이 또 괴롭혀? 아빠가 혼내줄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음, 이건 고민 상담 같은 거예요.”

고민 상담, 그 단어에 에반은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의 딸이 제게 처음으로 꺼낸 고민 상담이라니. 몰려오는 감격에 젖은 에반은 자리에 앉아 로벨리아를 제 무릎 위에 올려 앉혔다.

“우리 로벨리아한테 무슨 고민이 있을까.”

“그냥 사소한 건데요. 음, 카일이 저한테 저번에 고백한 거 아시죠?”

카일이라는 말에 에반의 표정이 어두워 졌지만, 에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로벨리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카일이 많이 변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많이 좋은 쪽으로 변했거든요?”

“좋은 쪽이라 하면?”

“이제 수업 시간에 장난도 안 치고요, 선생님 말도 잘 들어요. 밥도 편식 안 하고, 오늘 보니까 검술도 엄청 잘 다루더라고요. 어쩌면 정말 유저일지도 몰라요!”

그외에도 사소한 변화 하나하나를 언급하는 로벨리아를 볼 때마다, 에반의 표정은 점차 딱딱하게 굳어갈 따름이었다.

큰 변화라면 모를까, 도대체 사소한 것까지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는 건지.

이건 마치...로벨리아가 평소에 카일을 관심있게 지켜본 것 같지 않은가.

“그래, 그런데...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니?”

“절대, 제가 카일에게 관심이 있거나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갑자기 변하니까 걱정 되잖아요, 혹시 카이셀 아저씨한테 혼난 거면 미안하니까요.”

걱정, 걱정이라. 어쩌면 8살이기에 가질 순수한 감정일 수도 있었다.

자신을 쏙 빼닮은 그 눈에 비치는 것은 너무도 순수한 걱정이었으니.

에반은 무어라 타박하지도 못한 채 로벨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래, 카일이 많이 달라졌다고.”

“...오늘은 조금 멋있긴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정말 조금요.”

그 말에 잠시 손을 멈춘 에반은, 로벨리아와 눈을 마주친 채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 유치한 질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집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아빠가 좋아, 카일이 좋아?”

“당연히 아빠가 좋죠. 그냥 카일은 동생 같은 거란 말이에요.”

“그렇지?”

­나는 커서 아빠랑 결혼할래요!

에반은 그제야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과 결혼하겠다고 말하던 로벨리아가 남자를 만난다니,

에반의 상식으로는...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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