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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63화 (163/181)

〈 163화 〉 분홍 새싹이 피어날 나이 (5)

* * *

“리제라고요.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아이린의 반응은 평범했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왜 그 이름이 나왔는지에 대한 이유를 듣고도 그저 무감할 따름이었다.

오히려 반가운 감정이 먼저 아닐까, 애초에 경쟁자로 생각해본 적도 없었으니. 작게 웃음을 흘린 아이린은 에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찔려요? 나만 사랑했다면서.”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음, 거슬려서 그런 것뿐입니다.”

리제라는 이름에 에반은 여러 기억들을 떠올렸다.

애초에 리제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던 터라, 아이린을 좋아한 뒤부터는 리제를 조금 피하지 않았던가.

정식으로 연인이 된 이후에 리제가 나갔으니. 거의 10년 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그런 리제가 수녀라니, 게다가 남자를 싫어한다니.

당찬 성격을 지녔던 시녀가 수녀가 되어 레비를 키웠을 거라곤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허나 그렇다고 껄끄러운 감정이 생기지는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 한번쯤은 마주할 거라 생각했으니,

에반은 레비의 얼굴을 떠올리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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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업혀도 되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

아서의 말에 혹했지만, 레비는 집까지 꿋꿋하게 걸어가는 것을 택했다. 옆에 있는 것은 아서 뿐만이 아니기도 했고,

자신을 바라보는 에반의 시선이 조금 신경쓰였기 때문이었다. 호의적인 것 같으면서도, 자신을 관찰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티가 났나.’

안 걸리려고 나름 잘 숨겼던 것 같은데, 허나 걸렸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어차피 한 번 확 다가가는 게 아니라, 천천히 시간을 들여 조금씩 마음을 열게 만들 작정이지 않은가.

기사단에 들어가 천천히 녹아든다면...아마도 에반 또한 자신을 인정해주리라.

“그래서, 성당은 어디에 있는 거죠?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은데.”

“이제 곧 보일 겁니다. 그리 먼 곳은 아니었으니까요.”

“흐음, 주소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미리 알아두고 있던 거 아니에요?”

“...설마 그러겠습니까.”

살짝 투덜거리던 아이린은 이내 장난스레 웃으며 에반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평소처럼 손을 잡지 않고 팔짱을 낀 두 사람은 꽤나 가까워 보여서,

그 얼굴들을 익히 알고 있는 영지민들은 하나같이 그 모습에 미소지을 따름이었다.

에반이 이렇게 곤란해하는 것이 얼마만인지, 신혼 때는 얇은 잠옷만 입어도 당황했던 것 같은데,

이제 꽤 무덤덤해져서 삶의 재미를 절반이나 잃어버린 터였다. 이번 기회에 실컷 놀리리라 다짐한 아이린은, 평소 잘 하지도 않던 팔짱을 낀 채 에반에게 착 달라붙었다.

“리제가 에반을 보면 뭐라 할지 궁금하지 않아요? 나는 너무 궁금한데, 그러니까 내가 나만 보라고 말했잖아요. 왜 조심을 안 해서 이런 일을 생기게 만들어요?”

“그때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잖습니까.”

“서로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잖아요.”

“그럼 먼저 고백하셨어야죠. 사람 애만 태우게 만들고...자꾸 놀리시면, 저도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라니, 아이린이 어디 한 번 말해보라며 싱긋 웃자 에반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말을 이었다.

“오늘 거실에서 혼자 잘 겁니다.”

“...네?”

“침대에서 안 자고, 차가운 바닥 위에서 혼자 잘 거라는 소립니다.”

“왜, 왜 굳이 그래요. 나랑 같이 자면 되잖아요. 바닥 차가운데 거기서 자면 입이 돌아갈지도 몰라요. 장난이죠?”

허나 에반이 아무 말 없이 아이린을 응시하자, 작게 혀를 찬 아이린이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장난도 못 치게 하고, 이제 결혼한 지 8년째면 이런 장난 정도는 너그럽게 받아줘야 하지 않겠는가.

입술을 삐죽이자, 그 입술을 손가락으로 쿡 누르곤 입을 열었다.

“어차피 금방 끝날 겁니다. 얼굴을 오래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서류 하나만 받아서 오면 되는 거잖습니까. 그러니 그만 놀리시죠. 더 놀리면 정말 혼자 잘 테니까요.”

“네, 여보가 알아서 다­ 하세요.”

그리곤 다시 정적이 흘러서, 한참을 걷던 레비는 눈앞에 보이는 성당을 가리키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제가 사는 곳이에요. 수녀님을 불러올까요?”

“그러면 고맙겠구나. 어차피 한 번 봐야하니까, 그럼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면 될까?”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모셔올게요!”

대련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쉬지도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을 보아 아마 기사에 대한 꿈이 간절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무어라 말을 전해야 할지. 어릴 때부터 키워왔다는 걸 보면 아마 딸처럼 키우지 않았을까.

대뜸 찾아와 그런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아무리 생각해도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도둑이나 강도 정도 되려나.”

“무슨 얘기에요?”

“레비 말입니다. 여기서 공작저까지는 꽤나 먼 터라, 레비가 오고 가기엔 힘이 들 테니까요. 애초에 여긴 황도가 아닙니까. 게이트를 늘 이용하게 둘 수도 없고요. 그래서 데려가려 하는 건데, 어렸을 때부터 키운 아이를 남에게 맡기는 건 아무래도 조금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아이린 또한 그 말에 긍정했다. 아서나 로벨리아를 누구에게 맡긴다고 생각한다면, 그럴 바엔 차라리 자신이 공작을 내려두는 것이 나을 테니까.

사전 통보도 없이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아마도 오늘 바로 일이 처리될 가능성 또한 희박할 터였다.

과연 리제가 어떻게 나올지, 그래도 예전에 꽤 친하게 지냈던 시녀였음을 떠올린 아이린은 레비가 사라진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후작님! 저 왔어요!”

그리고 들려온 레비의 목소리에 에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녀복을 입은 채 레비 옆에 있는 여인은 아무리 봐도 익숙한 얼굴이었으니,

이윽고 눈이 마주친 에반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리제­”

“레비를 데려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연유인지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그 시선이 생각보다 많이 차가워서, 에반은 쓰게 웃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본 적 없던 표정이었다.

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아무런 감정조차 비춰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이린은 그런 리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휙휙 젓곤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자신이 무어라 할 필요는 없었다. 이전의 인연을 생각하며 만난 것이 아니라, 단지 레비를 데려가기 위해 만난 것이었으니.

에반 또한 그런 생각이라, 이윽고 레비를 슬쩍 바라보곤 천천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유리스에서 본 입단 시험에 레비가 당당하게 합격했습니다. 정식으로 기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사 견습생의 신분으로 남으려면 유리스에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하여 유리스에서 직접 레비의 신변을 책임지려 하는데, 그에 대한 허가증을 발급받고 싶습니다.”

“...레비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한 것입니까?”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수녀님.”

소매를 꼭 붙잡은 레비의 표정에 리제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표정은, 레비가 태어나 처음으로 보여주는 얼굴이었다.

여태껏 웃으면서, 무얼 해도 괜찮다고 말하던 아이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니.

하필이면 그런 생각을 품게 된 대상이 에반이라, 리제는 조용히 제 뺨을 쓸어내렸다.

이미 에반의 대한 마음을 버린 지 오래였다. 한 때의 미련을 버리고자 수녀가 되었고,

다른 남자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에 일부러 남자를 피했다.

버려진 아이를 키우며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건가 했는데, 결국엔 그 아이 또한 에반에게 갈 줄이야.

사람의 운명이 이리 비참해도 되는가 싶다가도, 어쩌면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비가 그곳에 가면, 유리스의 기사가 되는 것이겠죠.”

“그렇습니다. 견습생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제가 그랬던 것처럼 서임식을 하게 된 이후 정식으로 기사가 되겠죠.”

“정말 너무하시네요. 이제는 제 딸도 이렇게 데려가시다니, 전생에 원수라도 진 게 아닌가요.”

허나 리제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허탈하게 웃더니, 이윽곤 레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금 말을 이어갈 따름이었다.

“이번에도 후작님이 레비에게 말하신 건가요? 기사가 되는 게 어떻냐고.”

“아니, 저는 아서 때문에...”

“아서라면, 네가 맨날 얘기하던 그 아이? 그런데 후작님은 도대체 왜...설마.”

에반의 옆에 있던 아서를 본 리제는 그제야 레비가 왜 그토록 남자 아이 얘기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에반과는 미묘하게 달랐지만, 한 때 모셨던 아이린을 쏙 빼닮은 남자 아이.

누가 봐도 두 사람의 아이인 터라, 순간 어이없다는 듯 리제는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서가 저보고 유리스로 오면 어떻겠냐고 물어봤어요. 평민이라고 놀림 받지 못하도록,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더라고요.”

“어머.”

“...이런 부분은 또 쏙 빼닮았나 보군요. 얼굴은 아가씨를 닮았는데.”

리제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레비는 아서의 옆으로 슬쩍 다가가 리제의 눈치를 살폈다.

만약 가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리제는 그런 레비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갓난 아기때부터 키워왔지만,

결국 자신의 아이도 아니었으니까. 자신의 삶은 스스로 결정해야하지 않겠는가.

“데려가시죠. 레비가 원한다면, 저는 허락해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수녀님.”

“난 정말 괜찮단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야지, 너도 이제 9살이지 않니.”

허락받았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했지만, 막상 이렇게 떨어진다는 사실에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부모라는 존재가 없었던 레비의 삶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아이처럼 대해주었던 것은 리제 한 사람 뿐이었으니까.

허락을 받으면 뛸 듯이 기쁠 것만 같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아 레비는 아서의 옆에 선 채 가만히 리제를 바라보았다.

리제는 그런 레비의 시선에도 묵묵히 서류를 적어나갔다. 이름을 적고, 성당의 명칭을 적고.

이제는 조금 덜 익숙해진 유리스의 그 문장을 보다가, 이윽고 맨 아래에 레비의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다치거나, 울거나, 누군가와 싸웠다는 얘기가 들려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심성이 착한 아이라, 시비가 걸리더라도 아마 괴롭힘만 당할 게 뻔하거든요.”

“그런 일은...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반드시.”

“그럼 데려가시죠. 이제야 레비가 제 할 일을 찾은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망설임 없이 일어선 리제는 다시금 원래 있던 제 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히려 오랫동안 시선을 두고 있으면 미련이 남을 테니까. 어차피 우연히 만난 인연이었다.

이렇게 자신이 사라져주는 것이, 레비에게 더욱 좋은 것이리라.

그렇게 한참을 걸어,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던 리제의 걸음이 이내 우뚝, 멈춰섰다.

“...고마웠어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길게 한숨을 내쉰다. 여기서 등을 돌렸다간, 분명 후회할 것이 뻔해서. 리제는 이를 악문 채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오늘 아카데미에서 아서라는 아이를 만났어요! 귀족 같은데, 저한테도 친절하게 대해주더라고요.

­제가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음, 평민이잖아요.

­어쩌면 제가 기사가 될 지도 몰라요. 오늘 꼭 좋은 소식 가지고 올게요!

아서라는 아이를 만났다고 했을 때 차라리 가지 말라고 말렸다면, 허나 이내 눈가를 꾹 눌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비참한 상상이었다. 어른이라면서, 어찌 그리 이기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다만 고맙다는 그 한 마디가 참으로 마음에 들어서, 울컥거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긴 리제가 다시금 앞을 향해 걸었다.

“잘 먹고, 잘 살게요! 편지도 할 거고, 가끔 성당도 찾아올 거예요!”

그런 말은 필요 없는데, 늘 입버릇처럼 말했던 잘 먹고 잘 살라는 말이 유독 거슬리게만 들려왔다.

“그러니까, 나 잊지 않을 거죠?”

어떻게 잊겠는가. 처음으로 자식처럼 키웠던 아이인데, 리제는 아무 말 없이 앞을 향해 걸었다.

귀를 막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내며, 레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쭉 걷기만 했다.

이제는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서, 마침내 복도의 끝에 다다른 리제가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한 걸음, 위를 향해 올라섰을 때. 더 이상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아서, 성당의 문이 닫히는 종소리가 들려서.

리제는 계단의 난간을 붙잡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지 않았으면 했는데. 조금 더, 내가 키워줘도 괜찮았는데.”

섭섭하고, 밉고, 허나 그럼에도 레비가 행복할 거란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입꼬리는 씰룩이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텅 빈 시선으로, 다시금 텅 빈 허공을 바라본다.

행복할까, 아마 행복하리라.

그것이면 충분해서, 리제는 조금 후련하게 웃을 수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레비를 딸처럼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다음에 볼 때면, 엄마라는 소리를...조금 듣고 싶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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