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가족 나들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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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이 소풍을 계획하면서 생각했던 것은, 지금처럼 따로따로 흩어져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나름 가족 나들이랍시고 나왔는데, 자기들끼리 모여 있으면 어쩌란 말인가.
품에 있던 로제가 잠들자, 요람에 부드럽게 놓은 뒤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여기 왜 왔는지 기억하는 사람 있나요?”
“가족 나들이 아닙니까?”
에반이 답하자, 아이린은 에반을 째려보며 혀를 쯧 찼다. 그걸 알고도 그렇게 따로 있었던 걸까.
스칼렛은 그런 아이린을 보곤 카이셀을 힐끔 쳐다보았다.
카이셀 또한 영문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긴 마찬가지라, 작게 눈살을 찌푸린 스칼렛은 이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다들 그렇게 떨어져 있으면 어떡해요. 이래서야 그냥 가족 나들이가 아니라 놀러 나온 것 같잖아요.”
레비는 아이린의 말을 들으며 멀뚱멀뚱 서있을 따름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가족 모임에서 유일하게 상관없는 게 자신이었으니,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공작님이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이런 거면...자신은 그냥 빠져도 되는 게 아닌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뻘쭘해지기만 해서, 자신이 여기서 빠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옆에 있는 아서도 묵묵부답, 누구 하나 자신에게 언질을 주는 사람이 없어 꼭 고립된 것만 같았다.
‘걸어서라도 돌아갈까.’
그렇게 멀뚱히 서있던 레비는 이윽고 누군가 옆구리를 쿡 찌르는 감각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익숙한 푸른색의 눈동자였다.
“아서, 왜?”
“아마 엄마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부른 걸 거야. 그렇게 딱딱하게 있을 필요 없어.”
“어...티 났어?”
“아니, 그냥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레비의 옆에 있던 아서는 레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보다 한 살 많은 것치곤 어른스러운 것과 거리가 먼 사람 아닌가.
분명 저 가족 나들이라는 말에 혼자 찔려서 꽁해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예상과 딱 맞는 반응에 웃음이 살짝 흘러나왔다.
물론 레비는 계속 보고 있었다는 말에 얼굴을 붉혔지만, 늘 그렇듯 아서는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자주 보는 반응이라, 그런 것에 질렸을지도 몰랐다.
“여기에 우리가 모였으니까...음.”
그렇게 한참 말을 늘어놓던 아이린은 이내 자신 또한 무언가를 준비하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 와서 그냥 다같이 있고 싶었던 거지, 애초에 무언가를 하려고 온 건 아니었으니까.
“설마 준비한 게 없는 건가요?”
“없어요. 나들이에 무언가를 하려고 준비해오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럼 그냥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건 또 별로인가?”
카이셀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 말에 아이린과 스칼렛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아서, 그 제안은 이내 빠르게 통과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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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과 아이린에게는 익숙한 광장이었다.
고백하기 전, 아직 어른이 되기도 전에 처음으로 단둘이서 다녔던 곳이 바로 이 광장과 거리였으니까.
아서와 로벨리아도 말로만 들었지 여기에 직접 오는 것은 처음이라, 광장 가운데에 우뚝 서있는 동상을 보며 두눈을 반짝였다.
“이게 아빠죠?”
“...예전엔 이런 거 없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언제 생긴 겁니까?”
“내가 만드는 거 허락했어요. 유리스의 간판이잖아요, 당신.”
하늘을 향해 검을 빼들고 있는 에반의 모습이 광장 가운데에 떡 하니 놓여있는 터라, 카이셀은 에반을 툭툭치며 키득거렸다.
여태 여길 자주 오지 않아 몰랐는데, 이렇게 커다란 동상이라니.
심지어는 그 앞에 앉아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있어서, 금방 얼굴에 열이 확 달아오른 에반이 고개를 휙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동상이라니, 자신이 죽은 뒤면 모를까 이렇게 살아있을 때 보는 동상이란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어깨에 매달린 로벨리아를 조용히 목 위에 올린 에반은 뜨거워진 뺨을 쓸어내렸다.
아이들이야 신기하게 보고 있지만, 스칼렛이나 카이셀은 자신을 놀릴 생각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아이린에게 무어라 할 수도 없었으니, 아서의 눈을 조용히 가린 에반은 광장의 빈 공간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빈 공간에 있던 천막이란. 아직까지 에반과 아이린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보라색 천막에서 들었던 한 예언 같은 말이 어쩌면 지금 이렇게까지 오게 만든 이유가 아닐까.
아이린 또한 그 빈 공간을 보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서, 에반과 시선을 마주치곤 한 번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처럼 아프기도 했고, 피도 많이 흘렸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만나 결혼까지 하지 않았는가.
서로를 닮은 아이도 있고, 지금의 삶에 워낙 만족하는 터라. 에반은 그때 들었던 예언에 대해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린은 그 점성술사가 사실 마법사 아제스트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마도 용혈을 연구하기 위해 유리스에 왔을 때가 아니던가.
허나 훗날 에반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생각나서. 에반에게 슬쩍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예전에 아제스트 씨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예요? 처음 점성술사로 만났을 때는 그 사람이 아제스트인 걸 몰랐잖아요.”
“아, 나중에 흑마법사 토벌을 하다가 잠깐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조금 바쁘지 않았습니까.”
그 직후라면 에반이 한창 절멸 토벌로 바쁠 때였다. 아이린의 호위 기사로 일하다가,
황태자가 요청하면 절멸이 있는 곳으로 가 토벌을 하고 다시 돌아오곤 했으니까.
그때는 카이셀이 참 미웠던 것 같은데, 그 생각에 잠시 웃던 에반은 이윽고 아제스트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때 아제스트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마법적인 실력보다도 저주, 함정에 특화된 흑마법사가 아제스트 한 사람을 노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죽었을 테니.
아마 자신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마법사 하나를 잃었으리라. 만약 그때 아제스트가 죽었다면...
‘아마 지금 이러고 있지도 못했겠지.’
당장 절멸을 대상으로 벌였던 대규모 토벌전에서 크게 활약한 것이 아제스트였다.
그때 구하지 못했으면 지금까지 절멸의 잔당을 처리하고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상상만 하더라도 치가 떨리는 것이라, 에반은 그 생각을 지우곤 거리의 한 골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기, 저 골목길 기억나십니까?”
“골목이라니, 아. 어떻게 저길 잊겠어요. 우리 처음으로 데이트한 곳이잖아요.”
아주 낡은 골목길이었던 골목은 이제 완전히 새로이 단장돼 있었다.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 부서진 벽돌은 새로운 벽돌로 갈아 끼워져 있었다.
그때는 데이트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데이트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왔다.
함께 나와서 같이 걸었던 골목이었다. 서로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덩달아 아이린이 에반에 대해 별 다른 감정이 없을 때였다.
그때는 짝사랑이었을까. 허나 지금은 곁에 아이들이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15살에서, 30살. 15년의 시간동안 참으로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아빠는 엄마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에반의 어깨를 타고 있던 로벨리아의 질문에 에반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애초에 좋아한다는 것에 때가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어느 순간 깨닫고보니 품은 것이 연심이지 않았던가.
에반이 대답하지 못하자, 아이린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에반을 흘겨보았다.
“왜 대답을 못 해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면서요.”
“음...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아마 여기 같이 나왔을 때쯤 처음 마음을 자각했던 것 같습니다. 첫눈이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엄마 아빠 여기 같이 나왔어요?"
"저기 식당에서, 같이 밥도 먹었지."
마침 점심 식사를 할 시간이라, 에반과 아이린은 카이셀 부부를 불러 식당으로 들어섰다.
깔끔해진 거리의 외관에도 조금도 변함없는 곳이라 하면 바로 이곳이었다.
여전히 삐걱거리는 바닥, 거미줄이 쳐진 입구.
그 모습에 스칼렛이 기겁했지만, 아이린은 그 고급스러운 외관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아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여기는 변한 게 하나도 없네요. 그때도 이랬던 것 같은데."
"오히려 변하면 어색하지 않겠습니까. 추억하기에 좋은 장소죠."
"...그런데, 난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그때 날 여기로 데려왔던 이유가 뭐에요? 고급스러운 식당도 잘 알고 있었잖아요. 보통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좋은 곳을 데려다주고 싶어하지 않나?"
그런 이유가 있냐고 묻는다면, 이유가 있긴 했다.
당시에 돈이 그리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고, 아이린의 생일 선물을 사겠다며 돈을 많이 쓰지 않았던가.
"목걸이를 구하느라 돈을 많이 썼거든요."
목걸이라는 말에 잠시 고민하던 아이린은 이내 흠칫 놀라며 제 목에 있던 목걸이를 매만졌다.
그때 에반이 사주었던 것은 깨졌지만, 이후에 다시 산 것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설마 그런 이유였을 줄이야, 그 동안 여러 이유로 고민했던 것이 참 우습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즐거운 것이 추억이지 않을까.
이제는 그런 것을 기억하면 남는 게 즐거움 뿐이라, 아이린은 꽤 기분좋게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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