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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66화 (166/181)

〈 166화 〉 가족 나들이 (3)

* * *

“뭐해?”

아직까지 식당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두고 잠깐 나온 로벨리아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카일인 줄 알았지만 사실 아서라, 이에 실망해야 할지 아님 다행이라 생각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멍하니 입을 벌릴 따름이었다.

“뭘 그렇게 멍하니 봐. 바보처럼.”

“...왜 네가 거기에서 나와. 깜짝 놀랐잖아.”

“카일이 나오길 은근히 기대했었나봐? 반응이 이렇게 싱거운 걸 보면.”

엄마를 꼭 닮은 미소였지만, 그 안에 자신을 놀리려는 의지가 가득하다는 걸 깨닫곤 눈살을 찌푸린다.

남매끼리 사이가 좋은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했던가. 하지만 아서와 로벨리아는 나름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서로 놀리긴 해도, 진심으로 싫어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한 번은 있었나.’

아빠한테 선물 받았던 목검을 로벨리아가 부러트렸을 때, 아서는 딱 한 번 로벨리아를 진심으로 미워한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다섯 살 때의 일이었고, 어느 정도 자라서는 한 번 말다툼도 해본 적 없었으니.

이상하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아서는 제 뺨을 살짝 긁적였다. 그리고는 깨끗한 골목을 천천히 살피면서, 로벨리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엄마 아빠가 여기서 데이트 했다는 거, 나는 잘 모르겠어. 예전엔 여기 엄청 더러웠거든. 한 번 가봐서 기억하고 있어.”

“나도 알아. 그때 같이 같잖아.”

아무리 예전이라지만, 엄마도 아빠도 그리 낮은 신분은 아니었을 텐데.

도대체 왜 이런 곳까지 같이 왔던 걸까. 허나 의미없는 생각이라,

잠시 머리카락을 베베 꼬던 로벨리아는 이내 아서를 힐끔 바라보았다.

자신과 카일의 관계는 아직 친구에서 머무르고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동생처럼 생각하던 아이였으니, 이제 친구 사이라는 것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서와 레비의 관계는...무어라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친구 사이라 하기엔 가깝고, 연인 사이라 하기엔 먼 관계. 애초에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던가.

하여 몇 번을 물어봐도 아서는 항상 레비를 그저 친구라고 할 뿐이었다.

“레비 말이야. 혼자 두고 온 거 아니야?”

“아, 아닌데요.”

아서의 등 뒤에서 쑥 튀어나온 레비를 본 로벨리아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건지, 여태 인기척 하나 내비치지 않은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아서는 그런 반응에 옅게 웃었다. 자신이 그런 자리에 레비를 혼자 두고 올리가 없지 않은가.

카일도 오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아서는 카일이 여기 오길 그리 바라지 않았다.

정말 재밌는 건...아마 어른들이 있는 곳에 있을 테니까.

“데려왔으면 데려왔다고 말 좀 해. 놀랐잖아. 그리고 카일은 왜 두고 온 거야?”

“그야 걘 봐야할 게 있으니까.”

“봐야할 거라니, 뭐 보고 있어?”

영문을 몰라하는 로벨리아를 한참 바라보다가, 아서는 어깨를 으쓱이곤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가 어렸을 때 했던 말들, 그거 녹화해둔 것들 틀어놓고 있거든. 다들 보고 있어.”

“...뭔 소리야 그게.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지?”

“그런 거 맞을 걸.”

레비가 멀뚱히 자리에 서있는 사이,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 로벨리아가 입을 멍하니 벌렸다.

자신이 어렸을 때 했던 말, 그리고 행동이라면...게다가 그것을 카일이 본다고 상상하니, 도저히 이 자리에 서있을 수가 없었다.

“...나 잠깐 다녀올게.”

“그러던가.”

푸시이­ 하는 소리가 머릿속 어딘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로벨리아는 다급히 식당의 안 쪽으로 들어섰다.

자신의 어릴 적이라면, 정말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런 흑역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어릴 때가 좋았지.”

문득 카이셀이 내뱉은 말에 에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어릴 때가 아닌, 아이들이 어렸을 때를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말도 잘하고, 나름 제 할 일을 찾아서 하는 걸 보며 뿌듯해하긴 했지만.

그래도 가장 귀여웠을 때를 꼽자면 말도 제대로 못하던 어릴 때라 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방실방실 웃어대던 아이들, 그 때를 떠올리자 괜스레 웃음이 새어나오는 터라.

부부들은 각자 서로가 기억하는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자네 아이들은 엄마랑 아빠 둘 중에 누굴 먼저 불렀나? 우리는 스칼렛을 먼저 엄마라고 불렀는데.”

“흠, 그건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로벨리아는 저를, 아서는 아이린을 먼저 불렀으니까요.”

어쩌면 에반이 로벨리아를 특히 아끼는 건, 한 때 했던 그 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먼저 엄마나 아빠 소리를 듣는 사람에게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던 내기.

하지만 로벨리아는 아빠를, 아서는 엄마를 먼저 부르는 바람에 무승부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옹알거리면서 아빠라고 부르던 것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던지, 그 꼼지락 거리는 발은 아직까지 에반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걸 녹화했던 것이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좋지. 어차피 할 것도 없지 않은가.”

아이린이 수정구를 꺼내들자, 그것에 마나를 불어넣은 에반이 가만히 영상이 틀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시간이 흐르고, 영상 속에서 자그마한 손을 흔드는 한 아이의 모습이 드러나자 아이린이 옅게 웃으며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기억하는 로벨리아의 어린 모습이었다. 에반의 머리카락과 눈 색을 쏙 빼닮은 아이.

제 아빠의 미색 또한 완전히 빼닮아서, 아기였을 때부터 항상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로벨리아였다.

애기처럼 쭈글쭈글하지도 않고 통통하게 살 또한 잘 올라서,

카일의 어렸을 때와 완전히 다른 그 어린 모습에 다들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소리를 들을 따름이었다.

­자, 아빠 해봐.

­엄마를 먼저 해야지. 항상 내가 곁에 있었잖아요.

­로벨리아는 저를 더 좋아하시는 거 모릅니까? 보시죠, 지금 저한테 손을 흔들고 있잖습니까.

어릴 때부터 유독 에반을 좋아하긴 했지만, 아이린은 이때 자신을 먼저 불러주리라 의심치 않았다.

젖을 먹인 것도, 에반이 자리를 비울 때 항상 같이 있던 것도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누워있던 로벨리아가 부른 이름은 그 희망을 산산히 부서놓았다.

­어...빠!

­지, 지금 들으셨습니까? 날 불렀습니다! 아빠, 들으셨죠!

­기다려 봐요. 난 못 들었으니까요.

­아빠!

그리곤 허공을 향해 주먹을 불끈 내지르는 에반이 포효했다.

무척이나 기쁜 듯, 붉게 상기된 얼굴에 화면 속 아이린은 그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리도 좋을까. 허나 누구나 그때의 기분을 이해했으니,

부끄러운 듯 어색하게 뺨을 긁적이는 에반의 어깨를 카이셀이 툭툭 두드렸다.

“나도 그런 기분 한 번쯤 느껴보고 싶은데 말이야. 우리 아들은 엄마를 더 좋아하는 것 같더군.”

“그러게 누가 그렇게 바쁘래요? 카일이 어렸을 때는 아빠 얼굴도 가끔 까먹었잖아요.”

절멸을 막 처리한 터라 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런 것을 바로 잡으려면 어쩔 수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허나 아이에게 신경쓰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 카이셀은 카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금 그 수정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끝난 줄 알았던 영상이 쭉 이어져, 아까보다 조금 커진 로벨리아의 모습이 나왔다.

그걸 본 카일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자, 에반은 카일을 힐끔 보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고 싶은가 보구나. 로벨리아가 4살 때 무슨 말을 했는지.”

“...아, 아니요.”

“솔직하게 말하면 보여줄 수도 있는데. 물론 로벨리아에겐 숨겨야 겠지만.”

그 달콤한 속삭임에 카일은 침음을 삼켰다. 로벨리아에게 숨겨야 한다는 게 걸리긴 했지만,

자신이 보지 못했던 로벨리아의 모습이란 그만큼이나 구미가 당기는 미끼였다.

수차례 생각하고, 다시 수십 번 고민 했을 때. 에반과 눈을 마주친 카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합격.’

음흉한 녀석이라, 아무래도 로벨리아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한 에반은 조용히 수정구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어차피 볼 생각이었으니, 카일이 그리 말하지 않더라도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로벨리아, 이리로 오렴.

­아빠아­!

영상 속의 로벨리아는 늘 그렇듯 해맑게 웃고 있었다.

에반의 품에 안겨 허공을 붕붕 돌다가, 팔에 들려 하늘 위를 날기도 했다.

조금 성숙해진 지금은 볼 수 없는 모습이었으니, 아련한 표정을 지은 에반은 이어서 나온 장면에 입꼬리를 한껏 당겨올렸다.

에반의 앞에 선, 하얀 드레스를 입은 로벨리아는 마치 신부처럼 보였다.

아이린이 입었던 드레스를 작게 만들었던 것이라, 손에 꽃다발을 든 로벨리아는 에반의 손을 꼭 붙잡곤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로벨리아는 나중에 커서 누구랑 결혼할 거야?

­결혼이 뭔데요오?

­사랑하는 사람이랑 평생 사는 걸 말하는 거야.

에반의 말에 잠깐 고민하듯, 고개를 한참 갸웃거리던 로벨리아는 이윽고 배시시 웃으며 하늘을 향해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로벨리아는 커서 아빠랑 결혼 할래요!

“아빠!”

그와 동시에 들려온 것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로벨리아의 목소리였다.

그 영상을 모두가 보았다는 사실에 수치심이 한껏 몰려와서,

이윽고 다급히 수정구를 숨긴 로벨리아가 에반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내, 내가 언제 이런 말을 했어요. 이거 다 만든 영상이잖아요. 그렇죠?”

“어머, 그랬니? 내가 이걸 찍었던 것 같은데.”

아이린마저 로벨리아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아서, 로벨리아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에반의 팔을 두드렸다.

도대체 왜 그런 걸 카일에게 보여주는 건지. 한편 카일은 그런 로벨리아의 모습과 영상 속의 모습을 비교하고 있었다.

그 결혼이란 말을 언젠가는 자신에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음흉한 상상을 품으면서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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