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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67화 (167/181)

〈 167화 〉 외전) 몽중화 (1)

* * *

나들이가 끝났을 때, 다시 공작저로 돌아온 에반이 하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가끔 아서의 훈련을 봐주고, 로벨리아와 대화하고, 아이린의 옆에 누워 잠에 청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제는 모든 일들이 궤도에 들었으니, 에반이 직접 나서 할 일이 딱히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리라.

나른한 오후였다. 가을이 만연한 지금,

평소보다도 한껏 따듯한 날씨에 에반은 졸린 눈을 비비며 풀밭에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저 멀리서 혼자 검을 휘두르는 아서를 보다가, 등에 있던 나무에 머리를 기댄 채 지그시 눈을 감는다.

이상하리만치 피곤한 날이었다. 늘 평소처럼 생활했고, 달라진 것 하나 없이 쭉 있었을 텐데...왜 이렇게 피곤한 건지.

아서를 계속 지켜보는 것을 포기한 에반은 한숨을 푹 내쉬며 상념을 지웠다.

아주 잠깐 자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선선한 바람, 그리고 따듯한 햇볕 아래에서. 솔솔 몰려오는 졸음에 몸을 맡긴다.

#

[띵띵띵~굿모닝~띵띵~]

삑­

익숙한 손놀림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지각하지 않기 위해 10분 간격으로 맞춰둔 알람이었지만, 첫 알람에 깨어났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아직 해도 채 뜨지 않은 새벽, 창문을 멍하니 보던 시선은 꼼지락거리는 손에 향했다.

“...뭔가 이상한데.”

왜 침대에 누워있는 지에 대해 의문이 일었다.

분명 잠은 침대에서 자는 게 분명할 텐데, 왜 이렇게 위화감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거울에 보이는 모습은 엉망이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퀭한 눈가. 오늘 교수님이 호출하지 않았던가, 이래저래 할 말이 있다고.

“오빠! 나와서 밥 먹으라고!”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이래저래 만지작거리다가,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꾸벅 숙이곤 몸을 일으킨다.

좁은 방이었다. 허나 하나도 엉망이지 않고 오히려 깔끔해서, 그런 점이 이상해 고개를 갸웃거린다.

애초에 자신을 오빠라고 부를 사람이 있던가. 여러모로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어쩐지 이런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보인 것은 한 여자였다. 정확히는, 여동생인 수진이었다.

앞치마를 두른 채 찌개를 끓이고 있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는다.

“너 안 죽었어?”

스스로 내뱉고도 의아한 질문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왜 이런 질문을 한단 말인가.

어이가 없는 터라, 잠시 머리를 긁적이곤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수저를 피할 뿐이었다.

“아침부터 무슨 소리야. 멀쩡한 사람을 갑자기 왜 죽여.”

“...아니, 나도 모르겠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오빠가 치료 안 시켜줬으면 죽었겠지? 와서 밥이나 먹어. 오늘 중요한 일 하나 있다며.”

그 말에 떠오른 것은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한 교수였다.

음악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유명 교수이자,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크리스의 그 험상궂은 얼굴을 떠올리며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해보니 오늘 누군가를 소개시켜 준다고 하지 않은가. 만나야 할 텐데, 아무래도 조금 더 빨리 준비해야 할 성 싶었다.

“사람 한 명 소개시켜 준다던데.”

“여자야? 오빠도 슬슬 여자 친구 만날 때 됐잖아.”

“무슨 소리야. 나 결혼도 하고 애도 있는...나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이상하네. 오늘 뭐 꿈 꿨어?”

꿈이라는 말에 잠시 어깨가 흠칫 떨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찌개에 수저를 올린다.

자신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혼도, 아이가 있던 적도 없는데...왜 가슴 속에 이상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건지.

동생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이상하게 눈이 시큰거린 것도 이상했다.

매일 보던 얼굴인데, 이제는 병도 다 나아서 멀쩡한데.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져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히 밥을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사실, 머릿속이 복잡한 나머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 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럼 늦게 들어오겠네. 난 치킨 시켜 먹어야 겠다.”

“너무 그런 것만 먹지 말고, 조금 건강한 것 좀 챙겨 먹어.”

“돈이 아무리 많아져도, 나는 그런 서민적인 음식이 조금 좋거든.”

오빠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데, 동생은 조금 서민적이어도 괜찮지 않은가.

텅 빈 그릇을 치우는 수진은 제 오빠의 얼굴을 보곤 피식 웃었다.

오늘따라 조금 멍한 얼굴이긴 했지만, 가끔 그런 얼굴을 하곤 했으니까.

자신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은 순전히 오빠의 덕이라 할 수 있었다.

늦지 않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그렇기에 완치될 수 있던 게 아닌가.

수진의 시선은 방 중앙에 걸린 커다란 트로피로 향했다.

반짝거리는 빛을 머금은 채 홀로 고고하게 빛나고 있는 조각상,

그리고 그 중앙에 붙여진 이름이란.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제 오빠의 이름이었다.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

#

­도대체 왜 이렇게 늦는 거지? 사람 기다리게 만드는 것에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죄송합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교수님.”

­자네가 여러 연주 준비 때문에 피곤한 건 알겠지만, 오늘은 아주 중요한 자리라고 내가 몇 번이나 강조하지 않았나. 깔끔하게 차려 입었겠지?

“당연하죠. 이제 10분이면 갑니다.”

전화를 끊고 옷차림을 확인한다. 익숙하게 운전도 하면서,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이란 늘 그렇듯 깔끔할 따름이었다.

애초에 피아노 실력보다도 외모가 더 유명한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 것을 그리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꽤 과분한 인기도 얻고 있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차에 붙어있던 편지를 치우느라 30분을 썼으니 말이다.

[200m 전방에서 좌회전입니다.]

콩쿠르 우승 이후에 나름 휴식기를 가지고 있었다.

동생을 챙겨야 하는 것도 그렇고, 한동안 음악에 대한 흥미도 잃어버린 터였다.

이제는 다시 음악도 해보고 싶었고, 동생 말대로...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여자 친구라, 그런 것에 관심은 딱히 없었다. 애초에 자신과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을 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언젠가는 만나겠지,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었다.

운명 같은 만남이 있다는 걸 믿지도 않을 뿐더러, 세상이 참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요즘 들어 깨닫고 있었다.

자신에게 그런 인연이 있었으면 벌써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첫눈에 반한다는 표현처럼, 눈이 딱 마주치지 마자 멍하니 입이 벌리게 되는 여인.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한 번도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뭐 로봇도 아니고.’

그렇기에 오늘 교수와의 만남을 나름 기대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소개시켜 준다는 사람이 남자인지, 아니면 여자인지는 몰라도. 그 만남에서 나름의 즐거움을 느끼길 바라고 있었다.

끼이익­

차가 멈춰서고, 밖으로 나오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향했다.

누군가는 얼굴을 붉히고, 누군가는 몸을 파르르 떨면서 황급히 어디 론가로 향했다.

처음에야 부담스러웠지, 이제는 이런 것이 익숙하여 자연스럽게 안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와, 미친. 이수현이야? 이수현이 왜 여기에 와.”

“우리 교수님이랑 친하다던데. 아예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 들었어.”

엄청난 유명세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경호원이 되었다.

쉽사리 다가오지 못 하는 학생들을 헤치며 한 문앞에 이르렀을 때,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가 하얗게 샌 교수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5분 21초 늦었군.”

“이번엔 메트로놈으로 안 재는 겁니까? 몇 박 늦었는지는 말씀 안 해주시다니, 순해지셨습니다.”

“그 잘난 입을 언젠가 꿰매줄 날이 올 거다. 아쉽게도, 오늘은 손님이 있어서 그렇게 못해주겠지만.”

옅게 웃자, 크리스는 그런 표정이 못마땅한 듯 눈살을 가득 찌푸렸다.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나저나 손님이라니, 그 성질 괴팍한 사람이 무슨 일로 이렇게까지 화를 참는 건지.

의아하다는 고개를 갸웃거리자 가롯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알고 있듯이, 나는 지휘자다. 지휘자는 정확히 어떤 능력이 필요하지?”

“뭐...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 모든 악기에 통달해야겠죠. 정확히 알아야 연주를 조율할 테니까요.”

“poprawny(빙고). 너한테 피아노에 대한 것을 전수해준 게 나였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순전히 제 재능이지 않았나요? 처음 봤을 때 고칠 게 없다고 했으면서.”

머리를 향해 날아온 지휘봉을 피해내곤 어깨를 으쓱이자, 크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내렸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얼굴이 창백한 게 조금도 사내답지 못했는데, 이제는 저리 능글맞아지다니.

오늘 데려온 손님을 떠올리자 불안한 마음이 조금 들긴 했지만, 그래도 데려왔으니 소개는 시켜줘야 했다.

“요즘 들어 네가 음악에 대해 흥미를 잃은 것 같아서, 내 아주 친분 깊은 바이올리니스트 한 명을 데려왔지. 뭐, 너도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으리라 생각한다. 최근에도 콩쿠르에서 당당하게 우승을 차지한 사람이거든.”

“바이올리니스트라면, 설마 여자입니까?”

“음, 설마 남자가 더 좋은 건가? 그런 거면 당장 내 방에서 꺼지는 게 좋을 텐데.”

“그럴 리가요, 조금 당황스러워서 그런 겁니다.”

소개 시켜준다기에 당연히 남자일 거라 내심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자라니. 흠칫 놀란 채 자그맣게 열린 문을 바라봤을 때, 그 사이에서 머리를 살짝 내민 여인에 멍하니 입을 벌린다.

은색의 머리카락이 길게 뻗은 여인이었다. 푸른 눈동자는 빛을 머금은 채 자신을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어두운 색의 드레스를 가뿐히 소화해낸 채, 이 정적 속에서 홀로 온몸으로 소리를 뿜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따스한 방 안에서도 유난히도 차가운 분위기,

허나 그것은 이질적이지 않고 오히려 잘 어울러져서...마치 인상파 화가가 그려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데려온 바이올리니스트지. 흠, 어떤가?”

“...어. 글...쎄요.”

멍하니 입술을 달싹이자, 앞에 있던 여인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는 듯, 그 손을 마주잡자 이내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독일? 이탈리아? 허나 특이하게도 국적이 미국이었던 여인은, 수현을 향해 자신의 이름을 얘기했다.

“반가워요. 아이린 유리스라고 해요. 이름은 많이 들었어요?”

아이린 유리스라는 이름에, 또 다시 위화감을 느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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