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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68화 (168/181)

〈 168화 〉 외전) 몽중화 (2)

* * *

아이린 유리스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머릿속을 관통하는 따끔한 충격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직접 대화를 나눠본 적도, 그렇다고 대회에서 마주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묘한 기시감이 드는 걸까. 하여 묻자, 아이린은 수현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음, 날 기억 못 할 줄 몰랐는데요. 우리 예전에 한 번 본적 있지 않나요? 바르샤바에서.”

“...아, 쇼팽?”

“저는 바이올리니스라서 직접 보진 못했지만, 먼 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연주 잘 들었어요. 그런데...바이올린엔 관심이 없나봐요?”

그 물음에는 어색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라면 동생이 아프다는 걸 알았을 때라, 다른 연주를 느긋하게 구경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허나 아이린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듯, 별 다른 변화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위 아래로 살피며, 이윽고 크리스를 향해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잠시 둘이서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죠?”

“얘기? 뭐...상관 없긴 한데.”

둘이 남는다는 말에 크리스를 힐끔 쳐다봤지만, 크리스는 아이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선 잡고 싶었지만, 야속하게도 크리스의 발걸음은 생각보다도 훨씬 빨랐다.

그렇게 크리스가 사라지고, 단 둘뿐이 남은 이 상황에 수현은 작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도대체...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 건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을 아이린이라 소개한 이 처음 보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생김새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머리카락은 은빛에 가까운 하얀색이었고, 눈동자는 파란색이었다.

외국인이란 것을 감안해도 조금 특이한 외형이었지만, 염색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저런 머리카락을 타고난 것이리라.

손은 가늘었지만,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은 분명 수없이 노력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솔직히, 미인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자신의 짧은 인생에서 꽤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예쁜 사람이었다.

끌린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단순히 호기심인 걸까.

그런 상념 속에 잠겨 잠시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볼 때쯤, 눈을 가늘게 뜬 아이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 아닙니다. 그냥 얼굴을 조금 기억하려고 했던 거라서.”

“관심이 있으면 그냥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편이 좋아요. 난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별로 거든요.”

“솔직히 말해서, 아직 관심이랄 것도 없는데 말이죠. 애초에 방금 이름을 듣지 않았습니까?”

관심이 없다니, 처음 듣는 그 생소한 반응에 입을 삐죽인 아이린은 가만히 수현을 쳐다보았다.

나름 콩쿠르에서 자주 봤다고 생각했건만, 그저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그게 묘하게 섭섭해서, 아이린은 의자에 앉아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는 수현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실상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서로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 아니던가.

허나 이상하게...눈이 마주치는 순간 뺨이 뜨거워져서, 가만히 뺨을 쓸어내리곤 한숨을 내뱉었다.

“답답하네요. 계속 그렇게 가만히 있을 거예요? 여자 한 두번 만나봤을 것 같지도 않은데.”

“음, 죄송하지만 연애는 해본 적이 없는 터라.”

“...어, 정말요?”

그 얼굴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되물었지만, 수현은 어색하게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부모님은 계속 피아노에 집중하기를 강요했고,

그 와중에 동생 또한 신경써야 했는데. 그런 와중에 연애를 할 수 있었다면 자신이 초인이었어야 가능 했을 터였다.

“그럼 여자랑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것도 처음?”

“뭐...레슨이 아닌 걸로 만나는 건 그렇죠.”

아이린은 그 말에 작게 입을 벌렸다.

설마 정말로 여자에게 익숙하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하기야 이렇게 있는 자신도 연애 한 번 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애초에 누굴 좋아한 적도 없는데, 막상 나서서 얘기하는 게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어쩌면 늘 먼발치에서만 보던 사람을 직접 보는 것이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결국 피아니스트 이수현의 팬이나 다름없는 자신이었으니, 그 팬심에 이런 용기를 얻은 것이리라.

‘...용기?’

보통 팬이 스타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굳어진다 하던데,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었다.

사람이 편해서인 건지, 아니면 조금은 마음에 들은 탓에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멀뚱히 서있는 수현을 가만히 보다가, 이윽고 눈을 데구르르 굴린 아이린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시 저녁 약속 해둔 거 있어요?”

“없습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무슨 일로...?”

“식사나 한 번 하죠. 사실, 제가 미스터 리의 팬이거든요.”

아무래도 조금 더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다고, 아이린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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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의외인 것 같습니다.”

“어떤 점이요?”

“실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조금 성격이 차가워 보였거든요. 말 걸기가 쉽지 않은...그런 분위기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어요. 예전에는 실제로 그랬으니까.”

아이린은 수현의 말에 싱긋 웃었다. 어렸을 때엔 그랬지만, 이런저런 친구들을 만난 뒤로 성격이 바뀐 지 오래였다.

가장 친한 친구인 로페나가 이 사람을 봤으면 무어라 했을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아이린은 그런 생각을 지우곤 수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수현의 도움도 있었다. 물론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한 건 예전에 수현과 나눴던 대화 때문이었으니.

그런 걸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해도, 지금 이렇게 만날 수 있음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마에스트로 크리스에게 부탁해서 만남을 요청한 것도, 혹시 예전 일을 기억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양갈비 스테이크네요. 고기 좋아해요?”

“못 먹는 건 없습니다. 그리 많이 먹는 편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제가 한국에 올 때면 자주 들리는 레스토랑이에요. 미국 사람이 유럽풍 레스토랑 좋아하는 게 신기하죠? 바베큐보다는 이쪽이 조금 고급져 보이니까요.”

사실, 아이린과 자연스럽게 대화하기가 힘들었다.

애초에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둘이서 저녁 식사를 하는 것도 어색하게만 느껴졌으니까.

자신의 어떤 점에 흥미가 생긴 건지, 차라리 외모라면 이해하겠지만.

아이린이 수현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예전에 했던 콩쿠르의 기억들이었다.

“저번 브뤼셀에서 열렸던 콩쿠르 기억하나요? 그때 연주해서 우승했던 곡이 뭐였더라.”

“쇼팽의 곡이었죠. 피아노 협주곡 1번.”

“잘 들었어요. 혹시 그때 했던 말도 기억해요?”

“...인터뷰까지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논란이 일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요.”

애초에 그럴 거라 생각해서, 실망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도 섭섭한 건 사실이었다.

자신은 그때를 기억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정작 본인은 기억하지 못한다니. 아이린은 계속해서 수현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좋아하는 건 뭔지, 혹시 특별히 좋아하는 음악가가 있는지.

바이올리니스트 중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수현이 고개를 저었을 때,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런 게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풍의 레스토랑, 우아한 분위기에 피아노 소나타 곡이 흘러나오는 이 곳은 수현에게 조금 생소했다.

애초에 돈이 많아도 전부 부모님에게 드렸고, 막 모으기 시작한 건 동생과 따로 나온 뒤부터였으니 말이다.

유명인들과 만날 때나 가끔 왔던 것 같은데, 외국이 아닌 한국에서 이런 곳을 왔다는 것이 영 신기할 따름이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뭐요? 나에 대한 거라면, 얼마든지 물어봐도 괜찮아요."

"음...혹시, 저한테 관심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오랜 고민 끝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막상 그 말을 들은 아이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에 수현은 작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이게 아닌 것 같았다. 자구 자신에 대해 묻길래 그런 쪽인 줄 알았는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주책이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이윽고 얼굴을 쓱 문지른 수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못 들으신 걸로 하면 안 됩니까?"

"싫은데요."

"그럼 제가 그런 말 한 적 없던 걸로 하죠. 그냥...그 쪽이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어머, 제가 그랬나요? 저는 그냥 순수하게 팬심으로 물어봤던 건데."

확실히 이상했다. 오늘 처음 만나는 건데, 어째서 이렇게 익숙하게 대화할 수 있는 걸까.

마치 어디선가 만났던 것처럼, 설령 그것이 우연일지언정 이번이 첫 만남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긴장도 되지 않고, 생각보다 편한 분위기에 수현은 아이린을 보던 시선을 황급히 돌렸다.

그리고 보인 것은 피아노였다.

레스토랑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그랜드 피아노.

아마 가끔 연주자가 저기에 나와 연주라도 하는 걸까.

방금 했던 말 때문에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 좋을 것 같아서,

수현은 양해를 구하고 말릴 새도 없이 피아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 냅킨을 주워 탁자에 올려 놓곤.

그 냅킨에 적힌 레스토랑의 이름을 힐끔 살핀다.

"...세이렌이라."

피아노로 누굴 홀릴 생각은 없는데. 그런 실없는 상상을 할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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