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 외전) 몽중화 (4)
* * *
딴
강의실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는 학생의 표정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평소였다면 연주를 지켜보지 않던 수현이 직접 연주를 봐주는 터라, 피아노를 전공한 이들은 손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어두운 표정을 지은 수현이 눈을 가늘게 뜨자,
피아노를 연주하던 학생이 그에 놀라 건반을 잘못 눌러 연주를 멈추고 말았다.
“...계속 연주할 필요는 없어. 들을 만큼 다 들었으니까.”
부족한 점이 많았다. 연주자라는 사람이 이렇게 기본조차 돼있지 않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피아노는 단순히 손으로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호흡마저도 연주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연주를 하는 동안엔 오로지 악보와 음악이란 세상 속에 모든 것을 집중해야만 했다.
도대체 요즘 학생들은 왜 이런 건지. 한국으로 돌아온 참에 연주를 봐주려 했건만,
생각보다도 한참 못 미치는 수준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자신이란 존재가 학생들을 긴장시킨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것을 감안하고 듣고 있던 건데, 기본조차 제대로하지 못하는 것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죄송합니”
“죄송할 필요도 없어. 죄송해야 하는 건 이 악보한테 해야 되는 말이겠지. 자기가 하는 연주를 녹음해서 들어보도록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을 테니까. 나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솔직히 이번 연주는 이래저래 실망이야.”
쏟아지는 수현의 말에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땅을 바라보았다.
무어라 하고 싶어도, 상대가 피아니스트 이수현이었다. 세계 3대 콩쿠르를 모두 우승한 그 거물이 아니던가.
학교에 찾아와 자신들을 가르친다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가슴이 뛰었건만,
막상 마주한 수현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실망감을 차마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이 너무 기대감을 품었나,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어쩌면 스스로의 눈이 너무 높아져 그런 걸 수도 있다며 애써 위안할 따름이었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있던 곳은 세계 최고들만 모이던 곳들이 아니던가.
제 아무리 여기 있는 학생들이라도, 어쩌면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할 학생들이 수두룩할 터였다.
이렇게 혼자 진을 빼는 것보다는, 스스로의 눈높이를 낮추는 편이 이롭지 않을까.
수현의 표정이 변할 때마다 학생들이 흠칫거렸지만, 그런 것을 신경도 쓰지 않던 수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선망과 동경을 보내는 그 시선 속에는, 처음엔 느끼지 못했던 긴장과 두려움이 얼핏 보이는 듯 했다.
그런 것 때문에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리라.
“...좋아,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조금 난이도가 쉬운 곡부터”
벌컥,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가르치려는데, 갑작스레 벌컥 열린 문소리에 집중이 깨진 수현이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화를 내려다가, 문을 연 학생 하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어...교수님을 찾으시는 분이 계신데요. 지금 당장 만나고 싶다고 하시던데요.”
“나 지금 수업 중인 거 안 보이나? 수업 끝나고 찾아가겠다고 말해”“아이린 유리스라고 하면 알 거라고...”
아이린이라는 이름을 들은 그 순간, 잠시 허공에 손을 올린 수현은 그대로 머리를 슥 뒤로 넘겼다.
다른 이름이라면 몰라도 그 사람이라면...아무래도 만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이 무언가에 끌릴 때가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그럴 뿐이었다. 수현은 그대로 학생들을 뒤로 한 채 강의실을 떠났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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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했나?’
강의 하는 도중에 유독 예민했다는 사실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실망스럽다면 정말 화내는 편이었으니,
이전에 검술을 가르칠 때도...아니, 자신은 검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른 이유는 몰랐지만, 수현은 주변을 힐끔 살핀 채 방금 자신이 행동에 대해 떠올렸다.
너무 노골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아이린 유리스, 척 봐도 여자처럼 보이는 이름이지 않은가.
어쩌면 자신이 여자 친구를 만나러 이리 행동한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이제 와 돌이킬 수 있는 행동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찾아올 줄이야.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자신이 쓰는 공간으로 향하자, 어느새 홀로 자리를 잡은 채 앉아있는 아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왔네요.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갑자기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연락도 없이.”
“연락 했는데요? 맨날 무시하지 말고 자주 확인 좀 해줘요.”
그 말에 핸드폰을 살피자, 그 말대로 아이린이 보낸 문자 하나가 와있었다.
‘오늘 찾아갈게요.’라며, 한 30분 전에 도착한 문자 하나가.
수현이 눈살을 찌푸리자, 싱긋 웃은 아이린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뭐, 딱히 할 말이 있어서 온 건 아니에요. 그냥 물어볼 게 하나 있었거든요.”
“그런 건 전화로 해도 되는데.”
아이린이 앉은 곳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리 말하자, 아이린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이리 쌀쌀맞으면 어찌 하란 말인가.
물론, 수현도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여자와 이렇게 단 둘이 있는 상황이 어색했을 뿐이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지난번에 했던 말이 자꾸 떠올라 이래저래 불편하기도 했다.
대놓고 관심이 있다고 말하면, 어쩔 수 없이 여러 생각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도 스스로 조금 실례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아서, 뺨을 긁적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조금 갑작스러워서 말입니다.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은 또 처음이니까요.”
“익숙해지세요.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찾아올 테니까요.”
“물어볼 게 있다는 건 뭡니까? 이렇게 찾아와서 물어볼 정도라면 사소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이번에 제가 연주회에 하나 참가해요. 누구처럼 개인으로 여는 건 아직 못하지만, 나름 이름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연주회죠. 그래서 반주자를 찾고 있는데...”
반주자를 찾고 있다는 말에 수현이 눈을 가늘게 뜨자, 어깨를 움찔 떤 아이린은 품에 있던 하얀 종이를 슬쩍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로페나가 적어준 종이에는 여러 것들이 적혀 있었다.
아이린이 어떤 얘기를 꺼냈을 때 돌아올 반응을 예상하고, 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정답들.
그 중 하나가 다행히도 수현의 반응과 겹쳐서, 아이린은 헛기침을 한 차례 내뱉곤 수월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음, 제 반주자가 되어주세요. 부탁할 사람이...당신 말고는 없더라고요.”
“...제가 반주자요.”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 불리는 자신에게 반주를 부탁하다니,
같은 음악계에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도 당돌한 말이었다.
그리고 아이린에게 위험한 부탁이기도 했다. 만약 스스로의 실력이 형편없다면,
자칫 했다간 반주자의 연주에 묻혀 바이올린이 제 색깔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존재했으니.
“괜찮겠습니까? 제가 반주를 서는 것 말입니다.”
반주를 서는 것 자체엔 거리낌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것이 최근 들어 관심이 생긴 아이린의 부탁이었으니까.
친한 사람이라 했던가. 그 말이 조금 마음에 들어서, 말을 듣는 순간 반주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주회라면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할 텐데, 자신이 끼는 순간 주목이 제게 쏠릴 테니까.
“당연히 괜찮죠. 그런 것도 생각 못 하고 부탁했다고 생각해요?”
“그런 거라면 뭐...알겠습니다. 반주자로 서 드리죠.”
하지만 아이린은 수현이 승낙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면서, 로페나가 준비했던 종이를 품속으로 조용히 숨긴 아이린의 시선이 수현에게 향했다.
저번에 만났을 때와 비슷한 옷차림이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색 정장 바지.
허나 그것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은 또 처음이라, 붉어지는 귀를 살짝 만지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일 따름이었다.
“흠, 흐음.”
사실, 이렇게 찾아와서 얘기할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반주자를 부탁하긴 했지만,
연주회가 며칠 뒤라는 건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사실 이전부터 말하려 했지만...어쩐지 부끄러워서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 이렇게 말했는데, 연습을 곧바로 시작해야 한다는 걸 어찌 말해야 할까.
무릎 위에 놓인 손이 연신 꼼지락거렸지만, 수현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어렸을 때나 가끔 했던 반주자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연습은 언제부터 하는 겁니까? 시간을 조절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아, 그게 그러니까 말이죠.”
정곡을 단숨에 찔러오는 말에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당장 시작하자고 하면 화를 내려나, 하지만 그렇다고 숨길 수도 없어서.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열 따름이었다.
“...오늘부터 연습해야 할 것 같아요. 연주회가 일주일 뒤거든요.”
“일주일 뒤.”
“네. 일주일 뒤.”
수현이 벙찐 표정으로 흘겨보자, 아이린은 그 시선을 마주칠 수가 없어 고개를 더욱 숙였다.
대뜸 반주자를 부탁하길래 혹여 급한 게 아닐까 했건만, 당장 연주회가 일주일 뒤라니.
허나 신기한 것은, 딱히 화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화를 내도 충분할만한 말이었고,
가뜩이나 시간이 모자란 자신이 이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더라도...문제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화가 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린 수현은 그저 조용히 답했을 뿐이었다. 조금의 화조차 섞이지 않은,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그럼 지금부터 준비하죠. 어차피 오늘 할 일은 거의 끝났으니까요.”
사실은 수업을 더 해야했지만, 그건 크리스에게 맡기기로 이미 결정해둔 상태였다.
왜 거짓말을 하는 건지, 그런 말을 하면서도 같이 있으려 하는 건지.
수현은 그 이유를 스스로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리 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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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을 거머쥔 아이린은 피아노 앞에 앉은 수현을 힐끔 쳐다보았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피아노 앞에 앉은 수현은 평소와는 완전히 달리 보였다.
조금 더 진지하고, 훨씬...무언가에 확실하게 빠진 모습처럼 보이지 않은가.
온전히 그 피아노라는 것에 집중하는 모습은 꽤 잘생겨 보여서, 자꾸 그 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아이린은 숨기지 않았다.
"연주 안 합니까?"
"...어, 그쪽 좀 보고 있었어요."
수현이 눈살을 찌푸리자, 장난스레 미소지은 아이린은 고개를 돌렸다.
잘생겨서 보고 있다는 걸 솔직하게 말하는 건, 아무래도 꽤 힘든 일인 듯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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