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외전) 몽중화 (7)
* * *
“...제가 방금은 잘못 들은 거죠?”
“제대로 들은 거 맞습니다. 애초에 허언을 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너무도 태연한 표정으로 그리 말한 터라, 아이린은 자신이 순간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관심이 있다니, 그렇다는 말은...순간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 것만 같아서. 제 배에 있던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가린 아이린이 뒤로 살짝 물러났다.
“어...갑자기 그렇게 말해도 내가 뭐라 할 말이 없는 건 알죠?”
“관심있다는 말이 그렇게 놀랍습니까?”
“네! 아니, 갑자기 그 상황에서 그런 말이 왜 나오는 거예요? 창문 보고 있었잖아요. 저 술에 취해서 널브러지고, 그거 차에 태워서 여기까지 왔으면서 갑자기 관심 있”
“쉿.”
주변을 둘러보던 수현은 그대로 다가가 아이린의 입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목소리가 큰 터라, 이러다가 수진이 깨어나면 변명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지 않겠는가.
입술에 닿은 그 거친 감촉에 화들짝 놀란 아이린의 몸이 꿈틀거렸지만,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던 수현은 그런 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요. 수현 씨?”
방금 막 씻은 수현의 몸에선 스킨 향이 가득 했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강렬한 그 향에 시야가 흐릿해졌지만,
애써 몽롱해진 정신을 일깨운 아이린의 손이 수현의 가슴팍을 소심하게 밀어냈다.
“가, 갑자기 그렇게 훅 다가오면 어떡해요.”
갑자기 훅 다가오는 게 잘못된 건가.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붉어진 아이린의 뺨을 쿡 찌른 수현이 작게 웃었다.
조금 붙었다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걸 귀엽다고 하는 건지,
꽤 새로운 감상에 묘한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침대에서 내려와 천천히 이불을 펼쳤다.
말없이 이불을 펼치는 모습은 꼭 아래에서 자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자신이 신세를 지는 입장인데, 침대에서 자야 하는지 조금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거기서 조금 더 생각하니 떠오르는 게 있어서, 눈살을 찌푸린 아이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전 여기서 자는 건가요?”
“다른 방에서 자도 상관없는데, 아무런 말이 없어서.”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지 않았던가. 애초에 자기 방이 아니면 잠이 잘 오지 않는 터라,
수현은 부득이하게도 이렇게 잘 수밖에 없었다.
아이린이 침대에서 나올 생각은 없어 보였고, 자신은 이 방에서 꼭 자야했으니.
수현의 말에 아이린은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각해보니 이 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잔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넓은 집이었고, 그만큼 침대가 놓인 손님 방 하나 정도는 있을 테니까.
헌데 굳이 다른 곳에서 잘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 방에 자신을 데려온 건 수현이었고, 자신은 그냥 누워있던 게 전부 아닌가.
참으로 뻔뻔한 생각이었지만, 아이린은 그대로 침대에 픽 쓰러지며 머리가 아직 어지러운 척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 숙취가 덜 풀렸나 봐요. 걷지도 못 하겠네.”
“그럼 거기서 자는 게 나을 겁니다. 아침 일찍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동생에게 걸린다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플 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동생 분은 다른 곳에 계신가 봐요?”
“지금쯤 저쪽 방에서 자고 있을 겁니다. 제가 자고 있으라고 연락했거든요. 누구 덕에 금방 돌아오긴 했지만.”
페부를 쿡 하고 찔러오는 말에도 아이린은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시자고 한 것도 자신이고,
먼저 취해서 여기까지 온 것도 자신이지 않은가. 하여 고개를 숙이자, 수현은 그대로 불을 끄며 바닥에 누웠다.
“어, 침대 써도 괜찮은데요.”
“저도 괜찮습니다. 하루 바닥에서 잔다고 어디 다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음.”
다시 베개에 머리를 가져다 대자, 평소에 수현이 쓰던 것이란 생각이 들어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섬유 유연제 냄새만 나야할 곳에서 조금 다른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이 이불도, 따지고 보면 수현이 덮고 자는 이불이 아니던가.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그 상황에서, 아이린이 택한 것이란 본능에 제 몸을 맡기는 것이었다.
킁킁, 이불의 향을 맡은 아이린은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섬유 유연제 향만 난다기엔,
조금...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술에 취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이 상황이 이상한 건지.
평소보다 훨씬 많은 용기를 얻은 아이린의 행동은 점차 대담해져서, 이제는 아예 베개에 코를 묻을 정도였다.
“푸하.”
순간 크게 터져나온 숨에 몸이 흠칫 굳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수현을 보곤 조용히 안도할 따름이었다.
생각할수록 변태 같은 행동이었다. 기껏 술에 취한 자신을 이렇게 데려와줬는데,
자신이 하는 것은 베개와 이불의 냄새를 맡는 것이지 않은가.
나름 바이올리니스트라 자부하던 자신이 행하는 것치곤 너무도 부끄러운 행동이라, 평소와 반대된 스스로의 행실에서 배덕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변태.”
문득 들려온 목소리를 듣지 못한 아이린은 여전히 이불을 끌어안은 채였다.
몸에 그 이불을 꼭 맞대어서, 잘 느껴지지도 않는 온기를 느끼려 애쓰는 중이었다.
허나 수현이 다시금 조용히 중얼거리자, 창백하게 굳은 얼굴의 아이린이 천천히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변태.”
“히익.”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남의 이불 냄새는 왜 맡는 겁니까?”
“어, 어...그건 그러니까. 해, 햇빛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오해가 아니라”
“그거 제가 쓴 적 없는 이불입니다. 애초에 손님한테 쓰던 이불을 내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게 다시 누운 수현이 입을 다물자,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물든 아이린이 이불을 발로 퍽퍽 차기 시작했다.
퍽퍽, 이불이 하늘로 붕 날며 침대에 바람이 한껏 불었다.
‘미쳤어, 미쳤어!’
그냥 한 번 궁금해서 해본 건데, 거기서 딱 걸릴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한 터였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기껏 방금 관심이 생겼다는 말이 들었는데...
내일이 오면 경찰에 신고하는 건 아닐지 문득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수현이 아무 말도 없어서,
침대 아래를 향해 머리를 빼꼼 내민 아이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요?”
“안 잡니다.”
등을 돌린 채 대답하는 것에 잠시 놀랐지만, 그것에 안심한 아이린이 다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천장에 보이는 것은 불이 꺼진 전등 뿐이었다. 하지만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 묘하게 안심이 돼서, 아이린은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미안해요. 방금 그건 고의가 아니었어요. 정말로...그냥 궁금해서 한 번 맡아본 거예요.”
“괜찮습니다. 화가 나진 않았으니까. 그리고, 제가 그런 상황이었어도 궁금했을 겁니다.”
순간 수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아이린은, 시간이 흐르곤 얼굴을 확 붉히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벼, 변태에요?”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냥 궁금해서 그렇게 했을거라는 겁니다.”
“그, 그래도 저랑 당신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알고 하는 거랑 모르고 하는 거랑 같아요?!”
“정말 모르고 했습니까?”
“...그, 그으...아으.”
모르고 했냐는 질문에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말을 얼버무린 아이린이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웠다.
그걸 그렇게 물으면 자신만 이상해지지 않는가. 따지고 보면 잘못한 건 자신이었건만,
이렇게 말하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아마 분명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으리라.
방금의 행동이 후회돼서,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요, 그냥 궁금해서 그렇게 해봤어요. 수현 씨가 쓰는 이불일까 봐, 그냥 한 번 냄새 좀 맡아봤어요!”
“그럼 됐습니다.”
저 혼자 성을 내는 아이린의 대답에 수현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은 하나도 없었으니, 자신이 쓰는 이불일까 봐 그랬다는 대답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자신이 이상한 걸까. 아니면 그런 행동을 한 아이린이 이상한 걸까.
이상한 사람들끼리 만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수현은 조용히 이불을 끌어올려 뜨거워진 뺨을 가렸다.
수현이 이불을 덮는 모습을 본 아이린은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 잠들었다간 오해를 풀 수 없을 것만 같아, 수현의 등을 쿡 찌르며 입술을 달싹였다.
“...미워할 거예요? 내가 그렇게 행동해서.”
“미워했으면 좋겠습니까?”
도대체 누가 거기서 긍정하겠는가. 아이린이 등을 세게 찌르며 고개를 젓자,
수현은 등을 돌려 아이린과 시선을 마주했다. 흐트러진 하얀 머리카락 안 쪽에서,
특유의 푸른 눈동자가 참 선명하게도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제게 호의를 보내던 눈동자,
마치 운명처럼 끌리는 것은. 전생에서 한 번 본 것처럼 마음이 이끌리는 것은. 아마도 저 눈동자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제가 미워하지 않으면, 좋아해주길 바랍니까?”
순간 말문이 턱 막히는 질문이었다.
대뜸 그런 걸 물어보는 수현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아이린은 입만 뻐끔거린 채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시선이 마주치기를 한참,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린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장난입니다.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 안 해도 되는데, 아무래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셨나 봅니다.”
“...뭐, 뭐에요 그게.”
수현이 다시 등을 돌리자, 화끈해진 뺨을 만지던 아이린 또한 씩씩거리며 등을 돌렸다.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바라고 그런 건지 하나도 모르겠지 않은가.
그래도...하나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언제까지 말 그렇게 딱딱하게 할 거예요? 이제 편하게 해도 되잖아요.”
언제나 자신에게 경어를 쓰는 수현의 태도가 신경 쓰였다.
마치 선을 긋는 것만 같아서, 자신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만 같아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린이 묻자, 수현은 베개를 꼭 움켜쥐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언젠가는...편하게 말할 겁니다.”
단지 지금은, 그랬다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빠져버릴 것만 같을 뿐이었다.
스스로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다면, 신호조차 무시한 채 돌진하게 될까 봐. 수현은 그것이 두려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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